다윗의 영성(3): 진정한 친구를 가진 자 

삼상 20: 1-2, 12-17

 

여기에 계신 모두가 나를 믿어주고 끝까지 갈 수 있는 친구를 원하실 것입니다. 그런 친구가 있다면 그분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친구는 동료이며 위로자이며 어려울 때 도움을 나눌 벗이기 때문입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모습을 보며 진정한 친구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살다가 위급할 때 내가 찾을 수 있어야만 그 사람이 진정한 친구입니다. 알고만 있는 것은 진정한 친구가 아닙니다. 골리앗 이후 치솟는 다윗의 인기를 보지 못하고 사울은 자꾸만 다윗을 제거하려 합니다. 아내 미갈도 사울로부터 다윗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19:12). 사울의 유일한 두려움의 대상인 사무엘을 찾아 갑니다. 사울은 그곳까지 암살단을 보냅니다(19:20). 하나님의 사람마저 두려워하지 않는 최악의 교만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윗은 요나단을 찾아 갑니다. 이스라엘 땅에서 사울을 피할 곳은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직 도움을 요청 할 수 있는 한 사람은 자신을 이해해 주고 사랑해 주는 요나단 뿐입니다(20:1).

 

우리 성도님들에게 이런 믿음의 친구들이 있기를 바랍니다. 성도들의 친구가 되어 주는 섬김위, 목장지기님들, 팀장님들, 부서장님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더 나아가 앞으로 세워질 장로님들이 바로 그런 분들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친구마저도 도움을 주지 못할 때 우리에게는 또 다른 친구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친구가 될 수도 없고 감히 친구라 부를 수도 없는 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분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참혹하고 저주스럽게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것도 벌거벗겨 수치와 고통 가운데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세상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그분의 원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저 우리를 친구라 불러 준 분입니다. 15:1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않고친구라 하였노니라고 선포하십니다.

 

세상에서 찾을 사람이 없고 위로자가 없을 때 유일한 친구가 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를 자신의 생명보다 더 사랑해 주십니다. 누구에게도 도움받지 못하는 처지에서 좌절하지 말고 우리를 돕는 유일한 친구가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분께로 나아가십시오. 우리를 기쁘게 맞아 주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네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네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8-30). 진정한 친구가 되시는 주님이 삶에 지친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그 자리가 바로 예배입니다. 이 예배 가운데 주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정말 아까운 시간입니다. 예배는 무당들이 하는 굿처럼 누군가 여러분을 영적 존재와 접하게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가 아닌 오직 성령 만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우리를 이끄실 수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배는 오직 준비된 자가 직접 하나님을 일대 일로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전적으로 개인의 책임입니다. 분명 주님은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임재 한다고 약속하십니다( 18:20). 그러나 우리가 그 성령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진정 만나고 싶은 열정과 집중하는 우리의 자세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죄가 있는 곳에는 주님이 임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회개의 자리에 이끌기 위해 예배는 찬양과 기도와 말씀과 친교의 시간을 가집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과의 만남의 시간들이 계속 허락되는 것입니다. 그 시간들이 지나갈 때 나의 약함과 죄악 됨을 발견하고 오직 주의 도움 만을 요청하는 자로 변하는 것입니다. 이 체험들이 지금 드리는 이 예배 가운데 있기를 소원합니다.

 

둘째, 진정한 친구는 자신의 상한 감정까지도 솔직히 토로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다윗이 요나단을 찾아옵니다. 친구를 대하는 다윗의 모습이 매우 격앙해 있는 모습이 20:1절에서 보입니다. 인사나 포옹도 없이 바로 요나단에게 마구 쏘아 붙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죄악이 무엇이며 네 아버지 앞에서 내 죄가 무엇이기에 그가 내 생명을 찾느냐.” 다윗은 그 동안 상한 속사정을 털어놓습니다. 이 정도로 말할 수 있는 친구는 참 드물 것입니다. 다윗에게 요나단은 그런 친구였습니다. 요나단으로서는 난처한 순간입니다. 그러나 흥분하고 화난 다윗에게 차분하게 그의 말을 들어주고 이어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성도가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사람이나 하나님께 대한 불만과 원망입니다. 쓴 뿌리가 나고 입에서 투덜대는 소리가 나옵니다. 성도는 이 원망의 소리를 하나님께 직접 털어 놓아야 합니다. 이것을 탄식이라 부릅니다. 대부분 세상 사람들은 원망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원망이 아닌 탄식을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이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다윗입니다.

 

그가 지은 시편3:7을 보면 상대방을 저주하는 소리처럼 들립니다.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꺽으셨나이다.” 라는 끔찍한 소리까지 듣게 됩니다. 성경을 읽을 때 난처한 대목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사람이 아닌 은밀히 들으시는 하나님께만 할 수 있습니다.

 

나의 억울함을 골방에서 하나님께 리얼하게 토로하는 것을 탄식이라 부릅니다. 마음이 상하는데 하나님께 나아가 저 형제자 저 자매가 너무 예뻐 보이네요.”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거짓입니다. 우리의 심령까지 살피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고 계십니다. 나의 상한 마음, 화난 것, 모든 것을 아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아니라고 하면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원망을 그분에게만 털어 놓을 때 그것은 죄가 되지 않습니다. 남들이 듣지 않는 은밀한 나만의 장소에서 눈물로 호소할 때 주님은 찾아와 우리의 슬픔이 기쁨의 화관이 되게 할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진정한 친구는 16절에 보면 추상적인 약속을 넘어 언약의 관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람들은 약속을 많이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삼국지의 의리의 사나이들도 한 날에 의형제의 약속을 합니다. 소설이지만 감동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약속보다 언약이란 단어를 즐겨 사용합니다. 9:10에 노아와 맺어진 무지개 언약, 그리고 아브라함과 맺은 창세기 12장과 15장의 언약들이 대표적인 것들입니다. 이 언약들은 사람과 사람이 아닌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맺어진 것들입니다. 그렇지만 창 31:44을 보면 야곱과 삼촌 라반 사이에 맺어진 언약도 발견됩니다. 이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맺어준 언약을 보고 우리도 세상에서 언약의 관계로 나아가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언약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요나단과 다윗 사이에 맺어진 언약의 내용을 보면 그들이 생존의 최저 바닥 상태에서 서로의 생명을 보호해 주는 것들입니다. 언약은 의리를 지키는 것을 강조하기보다 생명 구원에 더 관심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14절을 보면 나를 죽지 않게 하라.” 지금은 다윗이 도망 다니는 신세이지만 앞으로 다윗이 왕이 될 것을 요나단은 인정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다윗이 대적들을 치는 때가 올 때 자신의 생명을 보장하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15절은 자신의 생명보장과 함께 가족의 생명까지도 요구합니다.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몰아낼 때 너는 내 집에 인자함을 보여라.’ 이것이 언약의 의미입니다. 언약은 자신을 너머 남의 생명까지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언약의 관계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내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에서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생 라합도 가나안을 침입해 올 때 이스라엘이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의 생명도 보장받습니다. 언약의 관계는 서로의 이익을 챙겨주는 의리의 관계를 뛰어 너머 타인의 생명을 살리는데 집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약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이 하는 약속과 별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16절은 언약의 특징을 잘 부각시킵니다. 언약은 나 보다 더 잘 되는 사람을 축복하는 단계로 나아가게 만듭니다. 요나단이 다윗의 대적들을 치실지어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다윗이 자신보다 더 잘 되면 안됩니다. 자신의 목숨이 위태롭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자신의 것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며 다윗을 축복합니다.

 

축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 생명과 같이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표현은 삼상18: 1, 3 그리고 20:17절에서 모두 세 번이나 언급됩니다. 자신의 생명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 진정한 친구라야 남이 잘되는 것을 축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과 구별되는 언약의 성도들입니다. 남이 나보다 먼저 더 빨리 가고 좋은 자리에 간다고 할 때 진정으로 축복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분 날 때만이 아니라 내 평생을 통해 지속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언약들은 영원한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실천하는 다윗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요나단이 죽고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때인 삼하 9: 1절에서 다윗은 어느 날 요나단의 남은 가족을 찾게 됩니다. 유일하게 남은 므비보셋을 찾아내어 자신의 식탁에 앉히고 아들처럼 그리고 왕자처럼 그를 평생 대우하게 됩니다. 언약은 서로에게 이익이 있을 때만 친구가 되어 지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인 영원을 기초로 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요나단과 다윗의 진정한 친구 사이에서 맺어진 언약을 바라보며 우리를 영원토록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원수 되었던 우리들을 먼저 사랑해 주시고 그것도 모자라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우리도 언약의 사람이 되어 나의 형제 자매를 격려하고 서로 위로하는 진정한 친구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