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영성(4): 도피처를 찾는 자 

삼상 21:1-9  

 

다윗은 요나단의 도움이 있긴 했지만 사울의 추적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더 이상 궁에 머물 수 없었던 다윗은 이제 그의 본격적인 도피가 시작됩니다.

 

첫째, 성도는 죄를 짓고 도망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되지만 세상에서 도피처를 찾는 자는 될 수 있습니다. 도피하는 자는 죄를 지어 도망치는 도망자와는 구별됩니다. 도망자는 자신의 죄 때문에 무작정 살기 위해 은신처를 찾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도피자는 죄가 아니라 세상의 불의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줄 피난처를 향해 달려가는 자입니다.

 

다윗의 도피는 단지 자신의 목숨을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본인에게 주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가 왕이 되어 이루시고자 하는 놀라운 계획을 이루어 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도피자들에게는 분명 피할 장소가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다윗에게는 성소였습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이스라엘에는 성전이 없었지만 제단을 쌓아 예배를 드리던 장소였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기도할 수 있는 장소가 도피처입니다. 우리 교회는 자체 건물이 없고 파킹 문제가 주중에 있긴 하지만 기도 장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서 앞으로 추진하고 있는 비전센터는 어려움을 당하는 학생들에게 피난처가 되어줄 것입니다.

 

유학생들에게 때로 예상하지 않았던 일이 생깁니다. 공부 포기하고 한국 갈 수도 있고, 휴학했다 다시 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을 이곳에 머물게 하면서 힘들지만 공부를 마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비전센터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학생들에게 위로와 도움이 될 줄 믿습니다. 많은 분들이 매달 드리는 헌금에 참여하고 있지만 학생들이 졸업을 하고 첫 월급의 십일조를 드리는 Heavenly Account를 통해 이 비전이 더 빨리 이루어 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우리는 도피처를 찾는 자들에게 이유를 불문하고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어야 합니다. 다윗은 가장 먼저 놉의 제사장 아히멜렉을 찾아갑니다. 다윗이 그를 찾은 이유가 있습니다. 아히멜렉은 엘리 제사장 가문의 계열입니다. 엘리는 사무엘을 어려서부터 키운 제사장입니다. 아직 사무엘이 죽지 않은 상태라 그래도 사무엘과 관련이 있는 사람을 찾아 도움을 받으려는 다윗의 의도로 보여집니다.

 

아히멜렉이 다윗을 대하는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아히멜렉은 일단 자신을 찾아온 다윗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가 도망쳐 왔다는 것을 어느 정도 짐작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사무엘이 거하는 공동체에 사울이 암살단을 보내는 일이 세 번이나 있었기에 어느 정도 소문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1절에 보면 아히멜렉 제사장이 떨며 다윗을 영접합니다. 두 가지 이유일 것입니다. 먼저는 사울에 대한 불안입니다. 다윗을 죽이려 하는 것을 알고 있는데 혹시 그를 숨겨주었다 보복 당하는 것을 두려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다윗 역시 장군이므로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자신을 죽일 수도 있는 위협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히멜렉은 복잡한 문제를 뒤로하고 상처와 아픔, 배고픔을 먼저 보며 맞아 줍니다. 일단 다윗을 받아들인 후 그가 혼자 이곳을 찾게 된 경위를 묻습니다. 다윗은 2절에서 그에게 거짓을 말합니다. 왕의 명령으로 비밀스럽게 왔다고 합니다. 아히멜렉은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요청하는 먹을 것을 줍니다. 피난처를 찾아 달려온 배고픈 사람에게 진위여부를 뒤로하고 아히멜렉은 다윗에게 필요한 것을 도와주는 모습입니다. 성도는 이런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 유럽은 난민들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유럽 경기들이 좋지 않은데 업친데 겹친 격입니다. 몰려 오는 사람들을 향해 각 나라들이 난민수용을 놓고 국경을 폐쇄 하기도하고 일부를 받아들이는 나라들도 생겼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어 우리가 당하는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가 구제와 봉사를 세상을 향해 해야 됨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난민들을 돕는 국제단체와(글로벌전략연맹 GSA, 회장 케빈 제십 목사) 연합하거나 아니면 구제팀이 다시 생겨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도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앞으로 세워지게 될 우리교회의 안수 집사님들과 권사님들 그리고 장로님들이 예배, 교육, 구제와 봉사, 전도와 선교, 친교의 영역에서 하나님 나라 위해 충성스럽게 일할 수 있는 일꾼들이 나오도록 기도하시고 준비해 나가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 다윗의 도피는 그의 모든 미래가 포기되는 순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의 홀로서기가 시작된 출발이었습니다. 죄로 인한 도망은 파멸로 마쳐지지만 다윗의 도피는 새로운 시작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모습이 참 가여워 보입니다. 궁중의 호화로운 삶도 끝이 났습니다. 먹을 것도 충분하지 못하고 두 다리 쭉 펴고 잠잘 곳도 없는 상황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인기 속에서 그가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이 박탈되는 순간입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들 그리고 친구를 떠나는 아픔이 있습니다

 

아무에게도 의지할 수 없고 누가 도와줄 수 없는 환경에 홀로 선 것입니다. 도움이 될 만한 사무엘의 영향 아래 있던 사람들 조차도 그를 도와 줄 수 없는 처지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놀랍게도 다윗에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칼을 줍니다. 사울 왕은 창을 든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에게 골리앗이 사용하던 칼을 그의 손에 쥐어 주게 됩니다. 험하고 거친 세상과 싸우고 이길 무기를 그의 손에 들려 줍니다.

 

사실 다윗이 골리앗의 칼을 손에 쥐는 순간 다른 마음을 먹을 수도 있습니다. 북 이스라엘에 무려 9번 이상 있었던 구데타를 자신도 계획할 수도 있습니다. 그에게는 잘 훈련되고 충성스런400명의 무장들도 있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의 민심이 다윗에게로 와 있었습니다. 많은 전쟁의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도망가는 방향을 돌려 사울의 대항자가 되기만 하면 승산이 있는 싸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도피를 선택합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다른 것을 원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을 해치고 자신이 그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칼이 다윗의 손에 있었습니다.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어디 있습니까? 자신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을 비롯하여 자신도 힘든 시간을 마감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사울을 죽여도 비난할 만한 사람도 없는 그런 상황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칼은 개인의 적을 죽이는데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원수를 죽이는데 사용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도구가 됩니다. 블레셋을 물리치는 일에 사용됩니다(삼상 23). 자기 백성을 위협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방어하고 백성들을 지키는 곳에 사용합니다. 도망자는 자기를 추격하는 자를 피하려고만 목표를 세웁니다. 그러나 공의가 상실된 땅에서 도피자가 된 다윗은 그 땅의 공의를 세우는데 자신의 힘과 능력을 사용합니다. 자신은 비록 도피자가 되지만 자신의 왕국이 될 땅을 위해 미래를 세우는데 다윗은 훈련을 받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도 어려움이 있고 힘든 상황들이 우리를 둘러쌀 때 도망자가 되지 말고 도피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도망자는 먹고 살고, 죽고 사는 일에만 연연합니다. 하지만 도피자는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시간 속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손에 의해 쓰임을 받게 됩니다. 시간을 죽이고 소비하는 자가 아니라 주어진 시간들을 활용하고 미래를 생산해 내는 사람임을 믿고 힘을 내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진정한 도피처는 이 세상에 있지 않고 오직 주께만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21장 전체를 보면 다윗은 사울을 피해 두 곳으로 피합니다. 먼저 아히멜렉을 찾아 갑니다. 그러나 7절을 보면 하필 그곳에 사울의 신하 도엑이라는 사람이 있어 더 이상 머물 수가 없게 됩니다. 결국 삼상 22:18절을 보면 그의 고자질로 인해 놉의 제사장 85명이 사울에 의해 모두 죽임을 당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만큼 다윗에 대한 사울의 적대감이 얼마나 심했던 것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땅에서는 도피처를 찾을 수 없었던 다윗은 10절에 보면 결국 자신이 죽인 골리앗의 고향 가드에(삼상17:4) 이르게 됩니다. 참 인생 드라마는 기구합니다. 블레셋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철천지 원수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갑자기 나타난 다윗은 그들의 눈에는 대문을 그적거리며 수염에 침을 흘리는 미친 사람에 불과했습니다(13). 다윗은 겨우 목숨을 부지하지만 그곳 역시 도피처로서 마땅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생존을 위해서 적의 땅에 머물러야 하고 제 정신이 아닌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곳은 도피처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 진정 안정과 휴식과 미래를 제공해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도피처는 걱정과 불안을 벗을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비전을 준비하는 시간이 주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블레셋의 가드는 다윗이 미래를 준비할 수 없는 장소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도와야 할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없게 만드는 장소였습니다.

 

결국 사람은 진정한 도피처를 마련해 줄 수 가 없습니다. 다윗은 드디어 광야로 나아가게 됩니다. 아무도 없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게 만드는 시간으로 그를 데려갑니다. 도피처는 하나님 만이 제공하는 장소입니다. 하나님만 의존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를 모든 것을 내려놓게 하고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고난을 주셔서 우리를 주님께로 몰아갑니다. 주님께 다가가는 것을 두려워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안에서 나를 향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삶에서 지치고 힘듦이 느껴지는 분이 있다면 지금 당장 피난처 되시는 주님께로 기도로 가까이 나아가는 복된 성도님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