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영성(5): 하나님께 묻는 자
삼상 23:1-14
다윗의 도피생활 가운데 다윗에게 습관처럼 생긴 것이 오늘 본문에서 소개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묻는 삶’입니다.
첫째, 하나님께 묻는 태도는 정말 바쁘고 힘든 상황 가운데서 나와 상관 없어 보이는 일에도 습관처럼 자리 잡혀야 합니다. 다윗의 상황을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누구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없었던 다윗은 유다 광야에(삼상22:5) 머물고 있습니다. 정말 힘든 삶의 바닥에 서 있습니다. 잠자리에 전갈이 나오고 물과 먹을 것 모든 것이 부족합니다. 일교차로 추위와 더위에 시달리고 사울의 추격을 피해 수시로 옮겨야 하는 고난의 생활이었습니다. 뭔가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진짜 생존만을 위해 살아야 하는 시간입니다.
그 때 소식이 들려 옵니다. 1절에 의하면 블레셋 사람들이 그일라를 쳐 들어와 타작마당을 탈취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지형은 동쪽에서 지중해 쪽으로 갈수록 낮아지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쉐펠라로 불려지는 평야 지대가 나옵니다. 문제는 블레셋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추수기이면 블레셋이 침입해서 곡물을 약탈해가곤 했습니다. 사울도 갑작스런 블레셋의 약탈을 다 막아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의 군사 전부가 다윗을 추격하는 곳에 투입되어 있어 자신의 백성들이 피해를 당하는 일에 도움을 줄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이곳 백성을 지키는 일은 다윗과는 무관합니다. 그나마 관심을 갖고 그들을 돕고자 해도 자신들이 쫓기는 주제에 남을 돕는 다는 것이 좀 이상합니다. 이때 다윗은 하나님께 여쭙니다. 자신도 너무 힘든 상황이고 시간조차 내기 힘든 상황에도 다윗은 하나님께 묻는 자로 나아 가갑니다(2절).
하나님은 다윗에게 분명히 ‘그들을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2절). 그러나 함께하는 자들은 다윗의 말에 동조를 하지 않습니다. 3절의 다윗의 보좌관들이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는 것도 당연할 것입니다. 이때 다윗은 4절에 보면 다시 여호와께 나아가 묻습니다. 자신과 무관한 해 보이는 일에도 왜 우리가 하나님께 물어야 할까요? 많은 사람들이 무관하게 생각하려는 일을 하나님이 소홀히 대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증거는 두 번이나 ‘구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다윗에게 전달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힘들고 바쁜 시간에 나와 무관한 일에도 습관처럼 하나님께 묻는 자세를 성도는 확실히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께 묻는 일을 단지 우리의 호기심을 풀거나 힘든 일을 피하기 위하기 아니라 오히려 희생을 감수하고 행동하기 위한 결단이 되어야 합니다. 5절에 다윗은 질문에 대한 응답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고 바로 즉각 행동으로 옮기는 모습입니다.
사실 다윗으로는 매우 부담스러웠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지 말라’ 하면 문제는 간단하지만 혹시 답이 ‘가라’ 할 경우는 복잡해 집니다. 자신의 군대를 동원해야 할 것이고 동료들의 동의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 두 명도 아니고 600명이 넘는 무리입니다(13절). 그들의 가족들도 있습니다. 사실 자신들이 책임질 일도 아닌데 괜히 관심을 보여 남편과 아들들을 잃을 위험이 있습니다. 부상 당하고 죽임을 당하면 비난을 다윗이 다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지나가는 소문으로 무시해도 누구도 다윗을 비난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책임질 문제가 아니라 사울이 책임질 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일에 관심을 가집니다. 자기 동족이 그 고통을 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울이 자신을 추격하는 일이 없었다면 장군으로서 이 일에 투입되어 그들을 막아주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의 처지가 비록 도피자이지만 그일라의 일을 자신의 책임으로 바라봅니다. 그러나 다윗은 먼저 자신의 결단을 움직이기 전에 하나님께 묻는 자로 나아갑니다.
자신의 욕심 때문에 그일라에 관심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평야 성읍을 얻으면 광야에서 생활할 식량을 확보하는 길이 쉽게 열리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일라는 7절에 의하면 문빗장이 있는 성읍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성읍에 거주할 수 있다면 더 이상 도망 다닐 필요도 없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무력으로 이 성읍의 주인이 되면 사울의 추격을 방어할 수 있는 전략적 장소를 확보하기 때문입니다. 전쟁에 능한 다윗으로서는 얼마든지 이런 욕심이 앞서 갈 수 있는 사건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 철저히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로 묻는 습관은 우리의 욕심을 걸러 내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주 앞에서 무릎을 꿇을 때 우리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 우선 되게 필터링이 일어납니다. 내 의지를 내려 놓는 순종이 기도 가운데 일어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교회와 가정과 개인이 잘 되는 것입니다.
셋째, 위급한 상황에 가장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묻는 자에게는 구체적으로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다윗은 그일라를 구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사울이 알게 됩니다. 사울 역시 전쟁에 능한 장군입니다. 그일라는 다윗을 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는 장소임을 알게 됩니다. 다윗이 성에 들어가 있는 동안 사울은 군사적 작전을 빠르게 펼치게 됩니다. 8절에 보면 “모든 백성을 군사로 불러 모으고” 라는 표현입니다. 아마도 사울의 머리에는 그일라를 포위하고 다윗을 독 안에 든 쥐로 만들려는 계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에도 다윗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9절에 누군가가 은밀히 진행되는 사울의 그일라 포위작전을 다윗에게 알려 주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다윗은 도망가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도망 갈 시간도 지금으로서는 어느 정도 있습니다. 이미 사울의 작전이 실행되고는 있지만 아직 자신에게는 미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600명의 병사들에게 지체 없이 빨리 자신의 결정에 따라 철수명령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지금 머뭇거리고 있습니다.
다윗이 지금 성을 빠져 나간다 해도 도망 갈 길이 막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일라는 평지에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평지는 다윗의 움직임이 노출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사울의 부대가 지금 오는 쪽으로 도망 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반대쪽으로 가면 블레셋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21:11절에서 이미 골리앗의 고향 가드로부터 이미 도망쳐 나온 다윗이 다시 그곳으로 갈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정말 위기상황입니다.
조금이나 도망에 성공하려면 빨리 액션을 취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하나님께 또 묻습니다. 다윗은 철저히 하나님의 매뉴얼에 익숙한 사람입니다. 이 위험한 상황에서 구체적으로 두 가지를 하나님께 묻습니다. 11절에 사울이 자신에게로 내려 오겠는가? 그리고 12절에 그일라 사람들이 다윗을 사울의 손에 내어주겠는가? 라는 구체적인 질문을 하나님께 묻습니다. 성도는 위험할수록, 급하면 급할수록, 정말 시간이 없을 때에도 하나님의 뜻을 물으려 나아가야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응답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위기 때일수록 구체적인 질문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을 향해 매우 상세하게 답해주시는 분이십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묻는 자에게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어떤 위험한 상황에도 넘겨 주는 일이 없게 선하게 일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9절에 보면 ‘음모’라는 단어가 발견됩니다. 음모는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상당히 복잡한 것들이 얽혀있고 사악함이 들어있음을 암시합니다. 결국 단순하게 그일라를 포위하고 독 안에 든 다윗을 잡는다는 간단한 작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음모의 깊이가 10절에 하나님께 묻는 다윗의 기도 내용에 노출됩니다. 그일라를 구해준 다윗을 그일라 사람들이 계속 보호할 경우 사울은 이들 역시 다 죽인다는 협박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빗장을 걸어 잡아 두어야 한다는 압박을 그일라 사람들에게 동시에 가했던 것입니다(7절). 이것이 사울과 그일라 사람들과 사이에 일어난 비밀 협약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사울의 압력에 그일라 사람들은 다윗을 배신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야 그일라 백성들이 나중 사울의 손에서 살아 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22:18절에서 다윗을 도와 주었던 제사장 85명을 사울이 다 죽였다는 사실을 그일라 사람들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을 도와준 다윗을 돕지도 못하고 사울을 거역할 수도 없는 처지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게다가 사울은 이미 그일라 사람들의 다윗에 대한 배신을 통보 받고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점점 그일라를 향해 사울은 가고 있었다고 13절은 말합니다.
한편, 다윗을 헷갈리게 했던 것이 바로 그일라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을 구해 준 사람들이 설마 자신을 사울에게 넘겨 주겠는가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다윗으로서도 진퇴양난입니다. 자신이 도망가면 사울이 그일라 사람들을 죽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일라 사람들에게 잡혀 사울에게 죽을 수도 없습니다. 진퇴양난입니다. 바로 이때가 하나님께 물을 때입니다.
14절을 보면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가는 자에게 하나님은 그일라 사람들도 사울에게 넘겨주지도 않았고 다윗도 사울 손에 들어가지 않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어느 곳도 도망갈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하나님이 다윗을 사울의 손에 넘기지 않았기에’(14절) 그는 “갈 수 있는 곳으로” 가게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13절에 ‘갈 수 있는 곳’이란 하나님만이 만드실 수 있는 길입니다. 세상에 없는 길입니다. 주님이 직접 내신 길입니다. 인간의 머리로는 생각할 수 없는 방법입니다. 사막이라고 강이라도 하나님을 우리를 지나가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철저히 묻는 자의 축복입니다.
인간이 풀 수 없는 난제를 하나님은 이렇게 풀어가십니다. 이 복 받는 비결을 을 알고도 안 한다면 우리는 바보이거나 정말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제부터 우리 코넬한인교회 소그룹 모임들에서 드리는 기도가 응답의 간증들로 채워질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