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영성(6): 을의 자리에 선 자 

삼상 24:1-7

 

요즘 한국에서 사용하고 있는 ,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힘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관계를 나타내 줍니다. 이런 관계가 시대를 불문하고 있었다면 이 관계 속에서 바른 모습도 말씀에서 발견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첫째, 나 스스로 갑의 자리에 있는 자도 어느 날 을의 자리에 설 수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생명을 빼앗으려 하던 사울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이 발생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갑의 자리에서 을인 다윗을 추격하고 있었습니다. 2절을 보면 3천 명의 사울의 군사가 겨우 600명의 다윗을 추격합니다. 거의3배나 많은 수적 우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윗의 군대는 여기 저기에서 모인 사람들로 정규 군대가 아닙니다. 그러나 사울의 군대는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자들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들은 보통 군인이 아니라 특수부대를 뜻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긴 추격을 끝내려는 사울의 의도로 보입니다. 그래서 강하고 산지에 익숙한 군사들을 뽑은 것이 분명합니다. 분명히 갑은 사울입니다.

 

그런데 3절에서는 사울이 우연히 을이 되는 순간이 발생하게 됩니다. 다윗을 추격하던 사울이 갑자기 뒤를 볼 일이(“발을 가리려”) 생깁니다. 매일 쌓이는 스트레스와 그 날 먹은 것이 소화가 안 되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갑 역시 을의 자리에 설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찾아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늘 갑의 자리에 설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인생이라고 부릅니다. 기업도 국가도 무너지고 기세 등등한 권력자도 무너지는 것입니다.     

 

사울은 왕이지만 갑자기 볼일이 생기면 그도 할 수 없이 신하들이 보지 않는 곳으로 가서 볼일을 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체면 꾸기지 않기 위해 신하들을 뒤로하고 혼자 동굴로 들어가게 됩니다. 1절에서 소개되는 엔게디 광야는 성경에서 두 가지로 유명합니다. 하나는 폭포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수 많은 동굴입니다. 이 지역은 석회암 지역으로 땅으로 스며든 물이 석회암을 녹여 만들어진 동굴들이 산재해 있는 곳입니다.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니는 다윗에게는 정말로 좋은 도피처를 제공해 주는 장소였습니다.

 

이곳에서 갑과 을의 위치가 바뀔 것이라고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나 자신이 갑일지라도 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항상 주 앞에서 겸손히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둘째, 을의 자리에 선 자가 갑을 누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올 때 을 역시 스스로 심판자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사람을 심판하는 분은 따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는 하나님이 택하고 임명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이 맞는다는 것이 다윗이 보인 태도입니다.    

 

사울이 들어온 굴은 다윗이 자신의 목숨을 피해 을의 자리에 있던 바로 그 장소였습니다. 3절에 의하면 양의 우리가 있었기에 사람들의 관심을 돌릴 수 있는 장소였습니다. 동굴에 사는 사람들의 소음을 줄이고 사람들이 출입하는 발자국들을 양들이 다 지워주기에 자신들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정말 좋은 은신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울 왕이 그곳으로 들어 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도 호위병도 둘 수 없는 처지에서 무장 해제한 가운데 홀로 있게 됩니다. .

 

긴 세월을 왕의 자리에 오르기를 기다리던 다윗에게는 하늘이 준 기회였습니다. 누구에게 이런 기회가 오겠습니까? 4절에 보니 다윗을 따르는 사람들도 기회라고 다윗을 부추기기 시작합니다. 사울이 죽게 되면 자신들도 도망 다니는 삶을 마무리 지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정착하여 모두가 안정을 취할 수 있는 기회가 올 것입니다. 더구나 다윗이 왕이 되면 함께 고생을 한 사람들 가운데 한 자리 앉을 수 있을 것을 기대합니다.  

 

그런데 정녕 기뻐해야 할 사람인 다윗은 주변의 사람들을 실망 시킵니다. 사울의 목을 들고 나올 줄 알았던 다윗은 겨우 옷 자락만 살짝 베어 나옵니다. 이것은 다윗이 장군이 아니라 겁쟁이라는 이미지를 사람들에게 심어줄 수도 있습니다. 따르는 군사들의 배신을 만들어 낼 수도 있습니다. 사울을 제거하는 자가 왕이 될 수 있기에 다윗에게 그 기회를 사람들은 주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5절에서 보면 그것조차도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그의 손에는 사울의 겉옷을 벤 조각만 들려 있었습니다.

 

다윗의 대답은 6절에서 보여집니다. 비록 사람들의 요청에 의해 왕이 된 사울입니다. 하지만 사무엘을 시켜 하나님이 사울에게 기름 붓게 함으로 하나님이 왕으로 인정했음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이 부여한 귄위를 사람들이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26:10을 보기 바랍니다. 사람의 손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친다는 것입니다. 죽을 날이 이르거나 전장에서 죽을 것이라는 믿음을 다윗은 보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심판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정면 도전이며 최고의 교만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다윗에게 놀랍게도 사람들은 모두 순응하는 모습을 7절에서 보입니다.

 

셋째, 을은 항상 을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설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8절을 보면 사울이 굴에서 나와 자신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때 다윗은 사울을 부릅니다. 이때 다윗 자신이 사울에게 무엇을 행했는지 먼저 말하지 않는 겸손을 보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얼마나 정의롭고 바른 사람임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가장 먼저 그는 사울을 향해 엎드려 절합니다. 그가 사울의 목숨을 살려 준 갑의 자리에서 서지 않고 을의 자리에 여전히 서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다윗을 높여주십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갑의 자리에 앉아야 높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가장 낮은 겸손의 자리에 설 때 가장 높은 자리에 서게 됨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은 하나님의 자리를 버리시고 낮고 낮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기에 만물이 그분을 주로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 마지막 때에 심판이 있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을 주로 인정하지 않고 살아가는 세상을 무릎 꿇리고 스스로 그들의 입술을 통해 인정하는 순간이 마지막에 있게 됩니다. 2:8-11을 보시기 바랍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드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을인 사람들이 자신의 위치를 지켜 내지 못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기 때문입니다. 9절에서 다윗 자신이 사울을 죽이려고 한다는 엉뚱한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느냐고 사울에게 외칩니다. 다른 사람들의 말은 거짓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순간에 살리는 행동이 그것을 증명하였기 때문입니다. 다윗 자신도 10절에 보면 자신을 따르는 어떤 사람으로부터 사울을 죽이라는 권유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람의 소리가 아닌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 우리 모두가 가장 선한 인간의 모습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11절에서 다윗이 사울을 죽이지 않으므로 자신의 손에 악이나 죄 과가 없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사울에게 굉장한 학습 효과를 기대합니다. 사울 역시 다윗을 죽이면 기름부음 받은 다윗을 죽이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그 일로 인해 손에 악이 있고 범죄한 자가 되고 마는 결과임을 사울에게 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사람이 아닌 항상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고 행동할 때 가장 아름다운 자리에 서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을의 자리에서 갑을 선대하는 행위는 갑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 스스로 자신의 악함을 인정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진정한 승리입니다. 싸움에서 이긴 것은 싸우지 않고 적이 물러가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과 자신 사이에 판단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심을 12절에서 선포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위해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 직접 보복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최종적인 재판장인 하나님이 심판하시어 자신의 자정을 살펴 억울함을 풀어 주시고 왕의 손에서 자신을 건져 주실 것을 선포합니다

 

사실 왕이 신하를 돌보아야 하고 백성들의 아픔을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사울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상실해 버렸습니다. 사울이 아닌 다윗이 오히려 사울을 선대하는 거꾸로 된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다윗의 선대함이 사울로 하여금 자신의 악함을 보게 합니다. 왜 우리가 원수까지 사랑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악한 모습을 보게 된 사울은 먼저 16절에서 다윗이 사위이긴 하지만 아들임을 인식합니다. 어찌 아버지가 아들을 죽일 수 있고 시기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사울로 하여금 울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17절에서 다윗이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임을 스스로 인정합니다. 18절에서 다윗이 자신의 생명을 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진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19절에 드디어 하나님이 그 행위에 대해 선한 것으로 갚아 줄 것을 축복하기 시작합니다. 20절에서는 다윗이 왕이 될 것을 인정하고 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견고히 설 것을 믿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다윗을 통해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부탁을 21절에서 더하게 됩니다. 나중 왕이 될 때 자신의 후손을 멸하지 말 것을 부탁하는 을의 위치로 낮아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길로 돌아갔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사울을 자신의 자리로 돌려 주신 것입니다.

 

을인 다윗이 갑인 사울을 선대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것을 따르는 다윗의 겸손 때문입니다. 앞으로 세워질 모든 교회의 리더십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겸손을 가진 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자신의 위치를 지키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노력하고 행함을 통하여 세상이 부러워하고 세상이 인정하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 내는 성도님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