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영성(7): 성숙으로 나아가는 자
삼상25:1-13
크리스천이면 누구나 신앙의 성숙을 느낍니다. 그러나
진정 궁금한 것은 무엇이 우리를 성숙되게 하는가 입니다.
첫째, 사방으로 장애물이 막아 설 때, 포기하지 않고 내면으로 익어가는
시간을 가질 때 성숙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본문이 시작되는 1절에서 큰 사건이 일어납니다. 사무엘이 죽은 것입니다. 지금까지 온 이스라엘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준 사람이 바로 사무엘입니다. 다윗에게는
사무엘 선지자는 특별한 사람입니다. 그가 다윗에게 기름을 부은 때부터 다윗의 삶은 변화가 왔습니다. 일개 목동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사무엘로
인해 사람들에게 소개되고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도피 시절 비록 오래 머물지는 못했지만 사무엘의 고향 라마에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배웠습니다. 다윗의 스승이 이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다윗에게는 지지목이 무너져
내린 날이었습니다. 왕이 되려는 사람에게 강력한 바람막이의 상실은 엄청난 장벽이 새롭게 만들어 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당시 모든 사람이 사울에게 아부하고 그를 따르는 상황입니다. 심적으로
그를 격려해주며 정치적인 기반을 지켜 주던 사람을 잃은 것입니다. 온 이스라엘이 모여 슬퍼하며 그를
장사 지내는 곳에도 다윗은 나타나지 못합니다. 모든 것이 다윗을 막아 선 날임을 확인 한 것입니다.
앞장 24장에서 사울의 목숨을 살려준 사건으로 사울은
잠시 어리석음을 깨닫고 다윗을 인정하는 모습까지 보였습니다. 하지만 사울의 장례에 다윗의 사람들이
출몰하는 것을 금했던것 같습니다. 다윗은 그 날 이후 새로운 도피처로 옮기는 장면이 1절 하반절에서 소개됩니다. 사울이 활동하던 북쪽의 기브아에서 멀리
떨어진 이스라엘의 최 남단인 바란 광야로 옮기게 됩니다. 이곳은 정치적 중심지에서 멀어지는 곳이며 다윗을
지지하고 아는 사람들로부터 더 멀어지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성숙은 겉이 익어가는 것이 아니라 속이 영글어 가는 것입니다.
모든 장애물이 막아 우리를 성장시키지 못하게 할 때 더욱 성숙되게 하는 시간과 장소로 하나님은 몰고 가십니다. 다윗이 처음 도망쳐 살던 유대광야보다 더 깊숙이 바란광야로 내몰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간은 그를 더욱 성숙되게 만들고 왕위에 오르게 하는 시간에 더 근접시키고 있었습니다.
둘째, 성숙으로 나아가는 자도 삶속에서 실수하는 과오를 범합니다. 다윗은 바란광야 근처에 거주하면서 한 사람을 알게 됩니다(2절). 그는 엄청난 양과 염소를 소유하고 있는 부자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부하들로부터 그 부자가 양털을 깎는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됩니다(4절). 목축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양털을 깍는 날은 축제일이며 주위
사람들과 고기들을 나누어 먹는 전통이 있습니다. 그런 분위기를 안 다윗은 광야 생활에서 지친 병사들의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사람들을 그 부자에게 보냅니다.
3절에서 그의 이름이 나발이고, 성격은 완고하고, 악을 행하는 자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그에게
가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가장 도움을 줄 수 있는 근접한 곳에 살았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다윗 자신과 같은 유다지파 출신인 갈렙의 후손이었기 때문입니다(8절: 네 아들 다윗에게). 그래서
다윗은 그가 어느 정도 도움을 줄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5-6절을 보면 다윗은 그의 신복들에게 매우 예의 바른 태도를 취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다윗의 비장의 무기는 7절에서 소개됩니다. 나발이 광야에서 양을 기를 때 다윗의 사람들이 양들을 해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의 소유를 잃지 않도록 다윗이 잘 지켜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뒤 마지막으로 다윗의 요구인 먹을 것과 쓸 것을 청하는 정중한
모습을 8절에서 보입니다.
그런데 나발의 반응은 다윗의 기대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10절을
보면, “다윗이 누구이며 이새의 아들이 누구냐.” 나발은
전혀 다윗을 모르는 사람으로 취급합니다. 그리고 “요즈음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라고 말합니다. 이
의미는 다윗이 사울로부터 도망쳐 나온 것처럼 모욕을 주는 말입니다. 만약 다윗이 나발을 조금이라도 의심하고
사람을 보냈다면 거절의 순간에 신복들에게 뭔가 조치를 취하는 것을 분명 지시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신복들은 12절에 의하면 즉각 돌아와 다윗에게 모든 것을 고하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으로 보아 나발에 대한 다윗의 믿음이 확실했음을 증명합니다.
하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나발에게도 이유가 있었습니다. 아무리 같은 유다 지파 사람일지라도 일국의 왕으로부터 도망치는 사람을 무작정 도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나발의 소유를 안전히 지켜준 것도 사실 나발이 직접 요구한 적도 없습니다. 다윗 스스로 아량을 베풀었다면 다른 요구는 정당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나발의 생각입니다. 분명 다윗은 지금 뭔가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다는 것이 그로 하여금 직접 나발을
죽이려는 실수를 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셋째, 성숙으로 나아가는 자는 지혜로운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되는 은혜가 주어집니다. 13절에 의하면
신복들의 보고를 받은 다윗이 격분하여 즉각 무장하여 나발을 치러 나가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것도 다윗
자신이 직접 칼을 찹니다. 유일하게 다윗이 사람을 죽이려는 분노가 표출되는 장면입니다. 앞 장 24절에는 사울을 죽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죽이지
않던 그가 이제 이상하게 변한 것입니다. 무엇인가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자신이 힘써 지켜주고 보호해 준 결과에 대해 응당한 대가를 못 받은 것에 화가 난 것입니다.
그러나 정확히 보면, 자신의 성숙되지 못한 부분이
찔린 것입니다. 남들은 나를 다 알아주어 노래까지 지어 부르는 형편인데 시골 촌부가 자신을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자존심이 건드려진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약한
부분이 드러날 때 약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숙되지 못한 다윗의 약점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이곳으로 데리고 온 것입니다.
매우 공손하게 상대를 대하면 상대도 자신을 정중하게 대해 줄 것이라 기대했던 다윗의 인간 이해에
대한 부족한 면이 드러납니다. 우리도 살다 보면 이럴 때가 많습니다.
나는 상대를 높여 주는데 상대는 자신이 많은 재산을 가졌다는 이유로 아니면 조금 유명세를 타는 사람이라고 상대를 낮게 대해 올 때도
있습니다. 자존심 구길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다윗처럼
미성숙한 모습으로 자신의 분노를 들어 내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나를 돕는 자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때 지혜로운 사람을 다윗에게 보냅니다. 아비가일이라는
나발의 아내였습니다. 모든 상황을 알아차린 그녀는 급하게 음식을 준비하여 다윗에게 나아갑니다. 그리고 그녀의 지혜로운 대처가 나발의 가족 모두가 죽게 되는 일을 막아줍니다.
한편, 다윗의 순간적인 실수로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하는 범죄를 막는 역할을 이 여인이 해
내었던 것입니다. 만약 다윗이 나발 가족을 죽였다면 지금까지 쌓아둔 그의 명성은 하루 아침에 거품이
되어 날라갔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왕위에 나중 오를 때 자신의 지파 사람들을 죽인 사람이 어찌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를 수가 있겠습니까?
내게 때로는 나를 화나게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나를 성숙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수업료도 없이 주님이 허락한 수업을 잘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앞으로 세상에 나가 지도자로 설 때 국회 청문회에서 ‘인격이
부족하다’ 아니면 ‘덕망이 없다’는 그런 소리는 일찍 훈련을 통해 벗어 버리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성숙으로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자신의 성숙을 완성시키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고 찬송하는 사람입니다. 아비가일의
지혜로운 말은 다윗의 분노를 가라 앉힙니다. 그녀의 논리적이고 차분한 말은 다윗으로 하여금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 가를 스스로 인정하게 만듭니다. 다윗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무력으로 자신과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해하려고 까지 하는 죄성을 발견합니다.
다윗은 이 순간에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성숙된 영역에 도달하게 됩니다. ‘인정한다’는 것은 자신의 잘못을 아는 것 다음 단계인 자신의 실수를
타인에게 공개적으로 나타내는 것을 말합니다. 다윗은 비록 600명의
지도자에 불과하지만 그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어리석음과 실수를 인정하는 모습을 드러냅니다. 나약한
한 여인 앞에 다윗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인정하는 겸손을 보여줍니다.
저는 사역자로 있었던 한 교회에서 배운 겸손의 모습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부터 코넬한인교회 성도님 모든 분들은 누구든지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도 존대말을 사용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어떤 분이 오시든지 나이를 불구하고 직위를 불구하고 겸손하게 대하는 교회로 세워져
나가기 바랍니다. 우리교회는 좀 더 나아가 주일학교 아이들에게도 어른들이 존대말을 사용해 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저부터 시작 하겠습니다. 온 성도님들도 동참해
주셔서 서로가 서로를 귀하게 여기는 믿음의 공동체가 될 줄로 믿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부족을 사람 앞에서 시인하는 것으로 성숙을 마감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성숙은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만드셨다’는 감사의 찬송으로 마쳐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한 여인이
자신 앞에 나선 것은 그녀의 용기와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3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다윗이 말합니다. “오늘날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케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하나님은 다윗 자신이 직접 보복하여 무고한 자들을 죽이는 죄를 범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왕이 될 다윗을 위해 피를 흘리지 않도록 하여 먼 미래를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다스리심을 다윗은 찬송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성숙입니다. 나를 성숙시키기 위해
때로는 나를 힘들게 만드는 사람도 내 앞에 있습니다. 그 사람을 보내준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으로 인하여 우리를 훈련 받게 하여 존귀함의 자리에 앉을 때 흠 없는 자가 되게 하는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격의 성숙을 뛰어넘어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리까지 가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