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영성(8): 잠시 인간적 생각에 잡힌 자
삼상 27:1-12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아쉬운 점이 있다면 믿음의
사람이 넘어지고 실수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우리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다윗에게도 나타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의 실수를 통해 오늘은 배우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잠시 인간적인 생각에 사로 잡힐 때 누구나 잘못된 선택을
하는 실수를 하게 됩니다. 1절에 보면,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자신이 나중
사울에게 잡힐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땅이 아닌 블레셋으로 가게 되면 추격을 멈출 것이라는
결정을 하게 됩니다. 이런 결심을 하게 된 이유는 24장에서
사울이 다윗에게 목숨을 구원 받고도 추격을 중단하지 않는 사건이 26장에서 다시 일어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울이 만든 환경의 덫에 걸린 것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이 다윗을 사로잡을 때 사울이 26:25절에서 하는 축복의 말들도 자신을 사로잡기 위한 미끼처럼
들리기 시작합니다. 더 안심시켜 다윗을 포위하려는 사울의 간계로 해석하였던 것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은 이처럼 무서운 것입니다. 불안을 우리 속에서 계속
일어나게 만들어 문제를 확대 시킵니다. 결국 다윗이 이방 나라로 망명 하는 잘못된 선택을 하게 만듭니다.
바른
선택이 아님이 곧 그가 이주하면서부터 28-29장에서 연속되는 사건이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계속 환경만 보면 우리는 시간을 멈추어 세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더 조급해지고 빨리 결정하지 않으면 끝장날 것 같아 보입니다. ‘왜 환경을 바라보지 마십시오’ 라는 소리를 듣게 되는 이유입니다. 환경은 늘 하나님께 나아가 묻고
결정하는 예배자의 자세를 빼앗아 가버리게 만듭니다. 그래서 27장
전체에서 다윗이 하나님께 물었다는 말씀을 전혀 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시기에 그분에게 나아가면 우리는 시간을 멈추게 할 수 있고 환경을 느긋하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만약 하나님께 나아가 묻고 행동했다면 다른 답을 들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26장 이후 사울은 다윗에 대한 추격을 전면으로 멈추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불안한 환경이 우리를 둘러 쌀 때 인간적인 생각을 하는 대신 그 시간에 예배자가 되어 주께 나아가는 사람이 되셔야 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잘못된 첫 단추를 끼우지 않게 됩니다.
둘째, 인간적인 생각으로 만들어진 잘못된 선택은 모든 것을 꼬이게
만듭니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지는 실수를 범할 때 계속적으로 일들이 꼬여 가는 사건이 바로 이어지는 28장에서 소개됩니다. 다윗이 인간적인 생각으로 블레셋으로 정치적 망명을
합니다. 그런데 지난 번(21:10) 도망가서 간신히 미친
짓을 하여 살아나온 가드의 아기스에게로 다시 간 것입니다. 이번에는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받아줍니다.
아마도 이제는 다윗이 사울의 확실한 적이라는 것이
적국에게도 소문이 났기 때문에 그를 이용할 수 있다는 계산에서 수용했을 것입니다. 만약 다윗이 이스라엘
땅에 있으면 다윗은 어쩔 수 없이 블레셋을 대항해서 싸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망명해 온 이상
다윗이 없는 이스라엘과 한번 전쟁을 해 볼 수 있다는 판단이 생겼을 것입니다. 다윗이 인간적인 잘못된
결정을 하게 되자 블레셋과 멈추었던 전쟁이 다시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인간적인 생각으로 인해
그 다음 계속적으로 일들이 꼬여가는 첫 모습입니다.
블레셋이라는 적과의 동침은 이스라엘을 매우 위험에
빠뜨리게 만들었습니다. 다윗의 망명이 일어나자 바로 블레셋은 군대를 정비하여 이스라엘을 바로 치러 달려
갑니다(28:1). 31장에 보면 그 전쟁의 결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31:1절에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치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여 길보아 산에서 엎드려져 죽으니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고한 생명들이 한 순간의 인간적인 생각으로 전장에서 이슬로 죽어갔던 것입니다. 한 사람의 인간적인 생각으로 말미암아 이처럼 처참한 결과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더 깊숙이 잠재 된 문제가 그의 선택 뒤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미 이스라엘 왕이 될 다윗이 나중 왕으로 등극할 때 그가 적국의 용병이었다는 오명을 어떻게
벗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다윗은 다시 한번 인간적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 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아기스에게 한가지를 요청합니다. 자신이 블레셋에서 거할 땅을 아기스가 살고 있는 수도가 아닌 지방 성읍인(들판) 시글락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런 제안은 나중에 이스라엘의 왕이
될 때 자신이 블레셋의 종으로 있었다는 수치를 조금이라도 벗어버리려는 인간적인 생각이 다시 한번 번쩍인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 교회가 큰 일들을 추진해 나갈 때 사람의
인간적인 생각이 모든 것을 꼬이게 만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인간적인 생각을 하도록
자극시키는 사탄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사탄이 준 생각들을 물리치는 무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말씀의 묵상입니다. 말씀으로 우리가 묵상할 때 사탄이
준 인간적인 생각을 거두어 낼 수 있습니다. 사탄보다 강한 하나님의 말씀이 내 속에 머물기에 악한 것이
내 속에서 함께 머물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이 말씀 묵상의 능력입니다.
성도님 한 분 한 분 모두가 말씀을 묵상하는 자가 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몸된 교회를 내가 힘들게 만들 수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하나님의
일에 참가하시기를 소원합니다.
셋째, 인간적인 생각을 가질 때 자신은 잠시 곤경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나 결국 모든 사람들을 가장 비참한 상황에 빠뜨리게 만듭니다. 4절을 보면 다윗이 가드로 도망간 사실을 안 사울은
추격을 멈춥니다. 다윗은 이제 두 다리 펴고 잘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그 시간은 7절에 의하면 단지 일 년 사 개월 정도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도망은 끝났지만 더 처참한 삶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5절을
보면 다윗이 아기스에게 나아갑니다. 다윗의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온 말은 “바라건데 내가 당신께 은혜를 입었다면 지방성읍 가운데 한 곳을 내게 주어 내가 살게 하소서”라는 요청입니다. 골리앗을 죽인 대장부가 이제 자신의 목숨을 구걸하며
적에게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 하는 모습입니다.
다음은 “당신의
종”이라는 단어입니다. 다윗은 비록 도망 다녔지만 언제나
자유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스스로 아기스의 종이 됩니다. 문제는
다윗과 함께 하는 자들이 2절에 보면 600명이었습니다. 사실 3절에서 언급되는 가족들을 합하면 3천 명은 충분할 것입니다. 이들 모두가 유다 광야에 머물 때에는
자유를 만끽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된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블레셋의 종으로 모두 전락했습니다. 종은 자유의 권리를
박탈 당합니다. 수치와 모멸을 감당해야 합니다.
얼마나 처참한 신세입니까? 1년 4개월을 못 버터 이런 수치를 감당해야 했을까요? 다윗 한 사람의 수치로 마감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당해야 했습니다. 한 사람의 인간적인 생각은 그를 따르는 모두에게서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박탈
당하고 종으로 전락시켜 버린 것입니다.
이런 결과는 사울에게서 얻은 승리를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이미 두 번에 걸쳐 다윗이 자신을 살려 주는 사건을 통해 자신의 악함을 깨닫게 되고
다윗에 대한 추격을 멈추기로 결정합니다. 패배를 인정했습니다. 그것이 26:25절에 언급된 말씀처럼 “사울은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는 말씀에서 보여집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승리를
불신합니다. 현실이 남아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현실은
불신으로 받아드리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극복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십자가의 승리를 확신하지 못하면 교회에 다닐지라도 늘 사탄의 종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불안해 집니다. 삶에서 생기는 불안에서 평강을 회복하는
능력이 내게 아직 없다면 그것은 아직 예수를 믿지 못한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공중권세 잡은
자의 종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자녀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 이 자리에서
“나는 환란 가운데 평강을 누리는 놀라운 특권을 소유한 자이다”라고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잠시 인간적인 생각을 가질 때 나도 모르게 거짓을
만들어 내는 제조기가 될 수 있습니다. 8절
이하를 보면, 다윗이 블레셋에 거하며 땅을 넓혀 가는 이야기입니다. 그술사람, 기르스 사람, 아말렉 사람을 침공하여 그 땅을 치고 모든 전리품을
획득하여 돌아옵니다. 문제는 그가 그 전리품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기스에게 모두 받칩니다(9절).
아기스가 누구를 치러갔느냐고 묻습니다(10절). 유다 네겝과 여라무엘 사람의 네겝과 겐 사람의 네겝을 침공하여
모두들 죽였다고 보고합니다. 아기스는 다윗이 스스로 종이 되어 블레셋 주변의 잠재적 적들을 제거해 주는
모습이 너무 좋았을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아기스를 만족시킨 것은 유다 네겝(남방)을 침공하였기에 이제 다윗은 확실히 이스라엘의 미움의 대상이
된 것을 흡족해 하고 있습니다(12절).
그러나 다윗의 말에는 두 가지 진실이 상실되어 있었습니다. 먼저 그가 치러 올라간 곳이 유다 변방과(유다 네겝) 그의 주변 동맹 족속인 여라무라와 겐 족속을 쳤다고 보고한 것은(10절) 거짓입니다. 8절에 보면 다윗이 실제 올라간 지역은 유다 사람들이
아닌 유다의 적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거짓말을 하게 된 것은 아기스에게 신임을 얻고 안전하게 블레셋에
거주하고 싶은 인간적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거짓이 하나 더 발견됩니다. 9절을 보면 다윗이 전리품을 다 빼앗고 그 지역 사람들을 남녀를 막론하고 모두 죽여 버립니다. 그것은 먼 훗날 자신의 행동이 유다 백성들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술책이었습니다. 아기스의 종이 되어 노략질을 하던 다윗이라는 흔적을 남기기 않기 위해 증거들을 다 없애 버렸던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적인 생각에 사로잡힐 때 일어나는 악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는 두려움에 있었고 거짓을 따라갔고 세상 방식으로
모든 일을 처리해 나갑니다. 결과는 사람의 종이라는 신분이었습니다.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다시 내 인생의 주인을 주님으로 모시는 삶입니다. 내 속에 성령으로 오셔서
함께 거하는 그분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이십니다. 오직 주께만 순종하고 따르는 종임을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이 관계가
회복될 때 인간적인 생각에 지배 당하지 않는 복된 성도가 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