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영성(9): 감사를 배운 자 

삼상 30:1-20

 


살면서 감사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감사하기가 참 힘듭니다. 왜 그럴까요? 감사를 배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그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의 수 없는 감사 시편이 쏟아져 나오기까지 그는 철저히 감사의 삶을 배워가는 사람이었음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사를 배우게 할 때 때로는 먼저 눈물을 주십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이 블레셋으로 망명하자 아기스왕은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게 됩니다. 다윗은 어쩔 수 없이 동족과 전쟁을 할 뻔했습니다. 하지만 블레셋 지휘부의 반대에 몰려(29:4) 결국 시글락으로 돌아오게 됩니다(1).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며 다들 즐겁게 집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진영에 도착했을 때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듭니다. 전혀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가족들이 남아 있던 시글락이 불타고 있었던 것입니다(3).

 

누가 이런 짧은 시간에 쳐들어와서 이렇게 쑥대밭을 만들 수 있는지 당황하게 됩니다. 이곳에 남아있던 자들 중 어느 누구도 상황을 전할 수 없을 정도로 기습을 당한 것입니다. 다윗이 성을 비우자 누군가 빈틈을 타서 공격을 가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기회를 엿보며 노려오던 적들의 의도적인 계산에서 일어난 사건임이 틀림없습니다.

 

자신에 대한 원한을 가진 자들의 보복으로 판단 되었습니다. 다윗이 블레셋에 정착을 시작하면서 주변 민족들을 침입하여 아기스에게 신임을 얻어가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침입한 주변 민족들은 삼상 27: 8절에서 언급 되었습니다. 그들 중 보복을 감행해 온 민족은 다름아닌 아말렉족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전쟁에 나간 것으로 추정됩니다. 왜냐하면 2절에 의하면 남자들을 제외한 모든 젊거나 늙은 여인 모두를 죽이지 않고 사로 잡아갔다는 소식만 전하기 때문입니다. 돌아온 사람들은 이 사실을 확인하고 울 기운이 없을 정도로 소리 높여 울기 시작합니다(4). 은 병사들의 약혼녀를 포함해 아내, 어머니 그리고 자녀들이 다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5).  

 

이 상황에서 울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분통해 하고 낙망하지 않을 심장을 가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가 감사에 이르기 전에 먼저 삶에서 아픔과 슬픔 외로움과 시련 등을 경험하게 합니다. 결국 감사는 우리 인생의 깊은 아픔과 시련을 통해서도 배우게 되는 것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께 감사를 배워 나갈 때 우리는 먼저 사람들로부터 실망을 배웁니다. 6절에 보면 자신들의 사랑하는 자들을 잃은 병사들은 분노하기 시작합니다. 그 방향은 다윗에게로 쏠리기 시작합니다. 그 어떤 것들 보다 자식을 잃은 것이 가장 이들을 아프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윗을 돌로 쳐서 자신들의 슬픔을 억누르고 싶었을 것입니다. 사실 다윗도 5절에 의하면 그의 두 아내를 빼앗겼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지도자인 이유로 백성들의 분노를 책임져야 하는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다윗을 돌로 치려 한 자들은 아마도 22절에 의하면 악한 자와 불량배들로 추정됩니다. 이들은 자신들도 뭔가를 잘못하여 사울 왕으로 쫓기는 입장에서 자식들에게 미칠 화근을 없애기 위해 다윗에게로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자신들의 희망이 될 자식들마저 사로 잡혀갔기에 이들은 더욱 절망에 빠졌던 것입니다. 비록 이들은 다윗을 돕는 자로 있지만 자신들의 희망을 읽은 슬픔이 너무 커서 분노로 변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을 돌로 치고자 했던 무리들 가운데 다른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아마 다윗이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살려 주었을 때 불만을 품었던 자들일 수 있습니다. 진작 사울을 죽였더라면 다윗은 왕이 되었을 것이고 자신들은 이곳으로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다윗에 대한 원망이 그들로 하여금 돌을 들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전장에서도 목숨을 함께 한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돌을 쳐 들었을 때 다윗은 너무 당황해 합니다(6절 중). 하극상을 본 것입니다. 그의 지도력은 사라졌습니다. 끓어 오르는 분노와 원망 앞에 모든 질서는 파괴 되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감사를 배우기 전에 사람들로부터 배신과 실망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이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서로 이익이 있을 때에는 서로 함께 갈 수 있습니다. 함께 나눌 수 있지만 이익이 사라지고 내게 손해가 주어지면 깨어지는 관계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배신과 실망을 인간들로부터 당해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랑으로 다가오십니다. 주님도 이 땅에서 가장 사랑하는 제자들의 배신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주님 지신 십자가는 인간을 향하신 최고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주님을 멀리하고, 돌을 들어 치고, 심지어 죽일지라도 그분은 우리를 감싸 안으십니다. 배신을 품어주십니다. 그 사랑 잊은 분 있다면 다시 그 사랑에 대한 감사를 회복하실 줄로 믿습니다.

 

셋째, 성도가 감사를 배워 나갈 때 하나님은 사건 속에 숨겨둔 은혜의 조각을 찾는 연습을 철저히 시키십니다.  6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여(새번역) 힘을 얻게 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모두가 슬픔 가운데서 분노로 자신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순간에 어떻게 다윗이 여호와로 인하여 힘을 얻고 용기를 얻게 되었는지 궁금해 집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숨은 그림 찾기처럼 숨겨두고 침묵합니다.

 

성도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사건을 조금만 주의해서 보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늘 우리에게 먼저 은혜를 베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사건이 터지면 하나님이 남겨두신 은혜의 조각을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입술로 고백 되면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돌을 쳐 들고 다가올 때 그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만약 조금만 시간이 늦어도 다윗은 돌 무더기 속에 누워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디서 그런 힌트를 찾았을까요? 바로 그것은 아말렉이 여인들을 한 사람도 죽이지 않고 모두 살려 데리고 간 사실입니다. 14절에 의하면 아말렉은 주변 사람들을 치면서 시글락을 침공했습니다. 전에 자신들의 민족을 멸절시킨 것에 대한 보복임에도 불구하고 아말렉은 시글락을 침공하면서 한 사람도 죽이지 않고 데려갔느냐는 것입니다.

 

아말렉이 모두를 살려둔다는 것은 뭔가 하나님의 은혜가 흐르는 것을 다윗은 직감한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도착했을 때 성이 타는 것과 동시에 그들 가족의 시체를 발견했다면 어찌 되었을 가를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의 관여하심이 있지 않고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다윗은 모두가 절망과 눈물 가운데 있을 때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소망을 가진 것입니다.

 

아말렉은 가나안 정복시대에는 진멸의 대상이었습니다( 18:14-16). 그래서 늘 두 사이에는 원한 관계가 유지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중 바벨론 포로가 끝나고 페르시아에 남아있던 이스라엘 사람 전체를 죽이려 시도했던 하만 역시 아멜렉 족속이라는 사실입니다( 2:1, 삼상 15:33)). 기적과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다윗만 본 것입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티 나게 드러내지 않는 겸손한 분이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 그분 앞에 감사로 나아오기 바라시고 기다리십니다. 2015년도 감사절에 내 삶에 베푸신 은혜를 발견하고 나의 온전한 감사를 드리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 앞에서 완전해 짐으로 빼앗긴 것을 다 찾는 충만한 감사를 배우게 합니다. 은혜를 체험한 다윗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해지기 시작합니다. 23장 이후 사라졌던 묻는 자로서의 모습이 다시 8절에서 나타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묻고 응답 받습니다. 그리고 주저 않은 자리에서 과감히 일어나는 자가 됩니다. 그에게 힘든 일이 있었고 주저 앉게 만들었던 일이 있었다면 충분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제는 더 큰 감사를 바라보며 믿음으로 달려 가는 다윗이 됩니다. 이것이 성도의 신앙생활입니다. 실망과 낙담의 자리에 주저 앉아 있기만 하면 더 큰 감사를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다윗의 완전한 모습은 인간과의 관계에서 남을 돕는 모습을 통해 한번 더 나타납니다. 다윗은 달려가는 도중에 들에서 애굽 사람 하나를 돕게 됩니다(11). 거의 죽어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사흘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그에게 떡과 물, 무화과 덩이와 건포도를 주어 힘이 나게 도와 주었습니다(12). 사실 다윗의 군대는 여기서 시간을 낭비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냅니다. 그들은 한시라도 빨리 적들을 따라잡기 위해 9절을 보면 브솔 시내를 건널 때 뒤떨어지는 사람조차도 그곳에 머물게 했던 다윗입니다. 그런데 들에서 죽어가는 사람 하나에 정성을 들이는 것은 시간을 소비하는 것입니다. 물론 정보를 얻으려고 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보를 얻으려면 심하게 다루어서 다윗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 버리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사람들은 바쁘고 자신들도 힘들어 죽겠는데 그에게 지극 정성을 다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런데 뜻밖에 그에게서 의도하지 않았던 정보를 얻게 됩니다. 이 모습은 얼마나 사랑의 공동체로 훈련 받고 있느냐에 따라 복을 받느냐 아니면 걷어차 버리느냐가 우리에게 달려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제 이타카에 겨울이 다가옵니다. 저는 지난 주 토요일 김창길 목사님 저녁식사에 함께 나갔다 이타카 커먼스에 보이기 시작하는 홈리스들을 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도 조용히 소리 없이 그들에게 다가가 따뜻한 음료를 대접하는 구제팀이 생겨날 줄로 믿습니다(추운 주말 저녁, $1.00, 따듯한 차, 1시간 투자).  

 

앞에서 본 것처럼 다윗과 함께 한 사람들은 모두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돌보고 그냥 지나쳐 버리는 일이 없는 것에 훈련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병들고 굶주린 애굽 사람을 데려 온 것은 11절에 의하면 다윗과 함께하는 무리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랑 받은 이 사람의 도움으로 다윗은 기습공격에 성공하게 되고 모든 가족들과 소유물을 전부 다 되돌려 받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일대일 관계와 이웃과의 관계에서 성도가 완전한 모습을 갖출 때 모든 것을 되찾는 감사를 넘치게 하십니다. 이 복이 추수감사절에 모든 성도님들의 삶 가운데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