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1): 무엇을 해야 하는가

창세기 1:1, 누가복음 4:17-19

 


코넬한인교회가 단기 선교를 시작하면서 선교에 대한 열기가 매년 높아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선교에 대한 첫 순서로 선교에 대해 조금 잘못된 정의들을 바라보면서 선교의 내용에 무엇이 채워져야 하는 것 인가에 대해 나누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잘못된 이해는 선교는 인간의 타락 이후에 생겨난 것이므로 타락이 있기 전에 선교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틀린 것은 아닙니다. 사탄의 유혹을 받고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사실 선교의 필요성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빠뜨린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사탄이 어떻게 생겨 났는가를 창세기가 설명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탄은 인간 창조 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인간 창조를 바라보면 한 가지 실수를 하게 됩니다. 인간 타락의 가능성과 선교의 필요성이 전제 되어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없다면 인간은 타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탄의 유혹이 없다면 선악과도 사실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이 인간 창조 전에 이미 존재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교리는 이미 창조 전에 하나님은 인간 타락의 가능성을 아시고도 인간을 창조 하셨다고 가르칩니다. 어떻게 그것을 알았는가? 인간보다 먼저 만들어진 사탄이 이미 하나님을 배반 했기에 하나님은 사탄이 인간을 타락시킬 가능성을알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창조와 함께 선교의 가능성은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 타락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의 존재와 배반에 대해 성경이 먼저 이야기 하고 난 뒤 순서 상 창조 이야기가 나오면 타락과 죄, 구원, 선교 뭐 이런 개념들에 대한 이해가 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침묵합니다. 그 이유는 3장에서 사탄의 정체가 드러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모든 창조의 전부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창조는 하나님의 담대하심과 전능하심과 우리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탄을 두려웠다면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타락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믿지 못했다면 만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타락으로부터 구원할 능력이 없었다면 실패한 창조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이 인간을 타락시켰을 때 하나님은 구원의 방법인 십자가를 제시해 주셨습니다(3:15). 그리고 그 복음을 전할 선교의 첫 도구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선택하고 준비 시켰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선교는 국경을 넘어 가야하며 타문화에서만 전도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잘못입니다. 이런 편향적 생각 때문에 구약의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구원에만 집중한다고 지적합니다. 게다가 구원의 대상에서 열방은 제외 되었다고 발전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민족에 대한 구원의 계획과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원수인 니느웨에 복음의 비둘기인 요나를 보냅니다. 하지만 그 비둘기는 그곳을 향해 날기를 싫어합니다.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이 죄로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종을 보내어 회개를 선포합니다. 열방도 구원의 대상임을 알리고 계십니다.  

 

가장 일반적인 선교의 정의는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지역이나 타 문화권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경우는 대부분 국경을 넘고 언어가 다른 지역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교회를 건축하는 것 등의 복음 활동을 말합니다. 이때 한 가지 실수 하기 쉬운 것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가장 가까운 곳은 구멍이 생긴다는 사실입니다. 먼 곳에 가서는 복음을 전하지만 가장 가까운 내 가정의 아내와 남편, 자식들은 여전히 복음을 접하지 못한 타문화의 사람과 동일한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문제가 극복 되지 않는 선교는 늘 문제점으로 지적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 코넬한인교회는 내년 교회 표어를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전도하는 해로 정하게 될 것입니다. 세계 열방에서 온 타 문화권의 캠퍼스의 학생들에게 그리고 아직 예수 믿지 않는 주변의 한국인 학생, 이민자들, 교수님들을 찾아가 복음을 전할 대상들을 마음에 품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인간의 죄 문제와 개인 영혼 구원이 우선적인 선교과제가 아니라고 믿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가뭄과 기근으로 살아나는 것, 그리고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안녕 만을 도모하는 차원에서 구원을 다루는 구약 성경의 내용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창세기에서부터 이미 영혼 구원에 관심을 집중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합니다. 선악과를 에덴 중앙에 만드시고 아담에게 하나님이 명령하십니다. 이것을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실제 선악과를 먹은 그들은 육신적으로 죽음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먹기 전이나 먹은 후에 육신적으로 별 다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실제 일어났던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하고 나아가지 못하는 영적인 관계의 단절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정녕 죽으리라는 영적 의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상실하고 모든 인간의 죽음을 경험하게 되고 죽음 이후에 사망이라는 심판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최대의 관심은 처음부터 인간의 영혼 구원이었음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적 불평등과 차별이 존재하는 사회와 공동체 사이에 화해를 가져오고 인간답게 사는 사회 구조를 형성해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선교라고 정의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미종족 지역보다는 복음이 들어간 지역에 더 관심을 가지는 것도 당연한 것입니다.

 

이들은 영혼 구원이 일어나면 자연스럽게 구조적인 변화도 결과적으로 일어난다는 성화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보입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 내에 사회 참여가 부족함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사회 하부 구조의 구조적인 악에 대한 변화를 시도하는 일에 집중하는 경향을 선교 활동에서 보입니다. 그러나 이분들의 단점은 지상 낙원이 구조적인 악을 제거하는 것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또한 지적 받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지의 지상 낙원이라고 하는 나라들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악은 어떻게 해결할 것 인가를 고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여러 가지 선교에 대한 정의를 살펴보는 이유는 나름대로 각자 선교에 대한 정의가 가지고 있는 단점들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너무 선교에 참가하는 분들의 성향이 자신들의 주장이 너무 강하여서 내 것이 맞고 당신은 틀렸다라는 주장들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간과하는 실수를 막기 위함입니다. 각 주장들을 보면 일장일단 들이 있습니다. 결론은 사람들의 주장에 따라 이루어지는 선교가 아닌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루어져야 한다는 마음이 들기 시작합니다.

 

사실 선교에서 필요한 것은 사회적인 공의와 정의를 세우고 개인 영혼 구원이라는 두 가지 과제입니다. 동전의 앞 뒤와 같이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둘 다 이루어야 하는 명령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이 두 가지 일을 어떻게 이루어 내는가? 문제는 서로 자신들이 하고 싶어하는 것을 먼저 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다툼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 가지 과제를 실천하는 방법은 우선순위를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원리이며 하나님의 뜻이 담긴 해답입니다.

 

우선순위라는 말에 불편해 할 수 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영혼 구원이 우선순위입니다. 이 순위를 바꾸면 안 되느냐고 주장하면 그것은 하나님께 직접 가셔서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다면 성경이 말하는 것을 따라야 하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가지를 다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선순위는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을 부르실 때 너는 가서 이방 민족들을 위한 나의 그릇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서 사회적인 악을 뒤 엎어 버리고 혁명가가 되어 구조적인 변화를 시도하는 선교사가 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사회적인 구조적인 악을 개선하려고 하지만 그 사회의 구조적인 악을 일으키는 근본적인 악은 인간의 죄라는 것을 우리를 만드신 분이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근원적인 문제를 제거하는 일이 우선적이 되어야 함을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우선순위가 무너지면 곤란해지겠지요.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 인류 전체는 전부 복지 사회 이루어 놓고 지옥 가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누구를 위한 복지이며, 누구에게 우리가 이루어 놓은 이 복지를 줄 것입니까

 

그렇다고 우선 순위가 영혼 구원하는 일에만 치중하라는 뜻만은 또한 아닙니다. 성경은 이 땅에서 공의가 정의가 실현되는 일에도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결과가 되기 위해 투쟁하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영혼 구원에 우선 순위를 두지만 영혼 구원에만 집중하지도 않습니다. 사회가 안고 있는 가난, 그 가난이 일으키는 부차적인 사회적 범죄들, 그리고 노예제도라는 구조적인 악에 대해 저항한 것도 사실입니다.

 

오늘 읽은 누가복음도 영적 의미에서 죄에 포로된 자, 눈먼 자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복음을 전할 때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 실제적인 삶에서의 구조적인 악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부와 권력에 억눌린 자를 자유케 함을 의미합니다. 희년이 선포되지 않음으로 모든 토지와 부가 집중되어 사회적 균형을 잃어버리게 만들었던 사회적인 제도까지 개선하는 역할을 선교가 포함하고 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역사에서 나치와 파쇼 그리고 전체주의 군국주의, 공산주의와 독재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기본적인 자유를 억압하고 삶의 가치를 파괴시킬 때 기독교는 저항하였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선교는 하나님의 일관된 계획입니다. 신약에 와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창조 때부터 세워진 하나님의 뜻입니다. 영혼 구원만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서의 구조적인 악을 제거하는 것에도 선교는 반드시 관여해야 합니다. 두 가지가 다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선 순위는 있습니다. 그리고 선교의 최종 목적 역시 영혼 구원의 방향으로 이어져야 함을 성경은 가르칩니다.

 

코넬한인교회는 이 두 가지 일에 하나님의 관심이 있음을 알고 선교 현장에서 최선을 다함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