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2): 왜 선교해야 하는가? 

3:8-12, 14-21

 


선교 시리즈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땅에 선교가 왜 필요한 지에 대해 창세기를 통해 근원적인 답들부터 시작하고자 합니다.

 

첫째, 이 땅에 선교가 필요한 근원적인 이유는 우리 인간을 유혹하였던 존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존재를 잘 아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인간 창조와 타락 사이에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는지 모릅니다. 이 시간은 인간을 죄 가운데 빠뜨리기 위한 준비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모든 나무의 실과는 허락되면서 왜 선악과는 안 되는 지에 대한 거짓 답을 가지고 사람에게 접근하였습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궁금증이었습니다. 이는 뱀이 사람보다 한 수 위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이 좀 안 되는 것을 하나 발견합니다. 2: 19에 보면 사람이 뱀의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나중 3장에서는 어찌 뱀이 사람 위에서 인간을 조정할 수 있습니까? 이는 무엇인가 뱀의 정체를 다시 살펴야 하는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뱀이 다가와 갑자기 말을 한다면 인간은 이상함을 눈치채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한번도 동물이 말을 하지 못함을 알고 있던 사람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뱀에게 호기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더 자연스럽게 이들의 대화가 시작 되었겠지요. 그러나 한번쯤 그 동물의 정체에 대해서 물었어야 마땅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지금까지 하나님 이외의 대화의 대상자가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유혹한 뱀이 나중 저주를 받아 기어 다니게 되는 모습을 보면 여자에게 나타날 때는 걷는 모습임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원래 기어 다녔던 동물이면 걷는 동물로 둔갑 시킨 사탄의 능력이 대단합니다. 뱀이 처음부터 걸었는지 아니면 사탄의 능력으로 걷게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사탄이 아무리 능력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창조물의 모습을 변형 시키는 것은 성경에서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이 인간을 유혹할 때 원래 걷는 뱀을 이용하여 접근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이 있은 후 아담과 여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을 때 공통적인 특징은 없던 것이 새로 생겼다는 것입니다. 뱀에게도 같이 적용된다면 원래 뱀은 걸었던 동물로 보여집니다. 이것이 다는 아니지만 에덴에서의 인간을 타락으로 몰아넣었던 사탄의 모습입니다.     

 

둘째 이유는, 여전히 인간을 유혹할 수 있는 악의 힘을 가진 사탄이 아직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의 간교함은 뱀을 이용한데 있음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상상이긴 하지만 걷는 뱀을 왜 이용하였을까요? 하나님의 흉내를 내기 위해서 일 것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말씀도 나누고 함께 거닐기도 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도 인간을 유혹할 계획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뱀을 이용해서 말하는 배후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은 아직 한번도 하나님 이외의 영적 존재와의 접촉을 가져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단지 하나님만이 그들의 필요를 공급해 주는 공급자였습니다. 늘 삶의 친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 보다 먼저 지음을 받고 자신들과는 다른 영적 존재들이 있음을 모른 것입니다. 게다가 영적 존재가 인간 피조물이 사는 공간으로 들어오면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인간과 함께 대화까지 가능하며 인간이 궁금해 오던 것에 대한 답을 제시하는 존재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피조물을 이용해서 하나님처럼 나타나 대화를 할 수 있는 존재는 누구일까요? 창세기는 영적 존재들의 창조에 대해서 침묵 하고 있고 그들의 배반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창세기는 이 모든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 계시록(20:2)에서는 그의 정체를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고 한 마디로 밝히고 있습니다.

 

에덴 동산의 인간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지으신 창조주로 믿었기에 절대 순종으로 그 자리를 지켜왔습니다. 그러나 배반한 영적 존재의 유혹은 인간의 생각을 다르게 유도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과 차원이 다른 영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미 인간 피조물보다 먼저 배반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나타날 사탄의 정체도 비슷할 것입니다. 말세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미혹될 정도로 아름답고, 거룩을 가장하고 자신에게만 진실이 있는 듯 속이고, 기적과 이적을 일으킬 능력을 소유하며 다가올 것을 요한계시록은 경고하고 있습니다(13:13-14). 궁중권세 잡은 자로서 사탄은 인류를 사망으로 몰고 갔습니다. 자신에게 유혹되게 해서 그리고 유혹 받지 않고 강하게 버티는 자들에게는 위협하며 자신의 발 앞에 사람들을 무릎 꿇게 만들 것입니다. 사실 사탄의 궁극적 목표는 변함이 없습니다. 여전히 사탄의 속삭임이 이 땅에서 사라지고 있지 않기에 진리를 아는 자들은 선교를 멈추지 말아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세 번째 선교가 필요한 이유는, 인류는 늘 자신이 왜 죽어야 되는가에 대한 궁금점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답은 인간이 사탄의 유혹으로 선악과를 먹어 불순종하는 순간 거룩을 상실합니다. 가장 먼저 육신의 죽음이라는 것이 인류 모두에게 주어졌습니다. 세상이 이 사실을 거부하지만 이것이 진실입니다. 육신의 죽음을 경험하는 순간 사람들은 처음으로 두려움과 공포를 갖기 시작하였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그 이후의 세계는 어떤 것인가? 성경은 그것을 사망으로 소개합니다. 하나님과의 영원한 단절이며 영원한 고통이며 장소적 개념으로 지옥으로 성경은 말합니다.

 

타락 후 하나님이 피조물들에게 내린 벌의 차이가 있다면 인간 피조물에게 내린 벌은 용서와 영원한 형벌로부터 구원을 전제한 벌이었습니다. 하지만 배반한 영적 존재에 내린 벌은 용서의 대상이 아닌 점이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묻는 하나님의 질문은 그들에게 책임을 묻기 위한 질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 자신들의 죽음에 이르는 상태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있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네가 어디 있느냐의 부르심이(3: 9) 먼저 책임을 묻는 질문보다(3:11) 앞선 이유입니다.

 

불순종 이후 다시 한번 하나님은 기회를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숨어있는 아담과 여자를 몰라서 그들을 부르셨겠습니까? 그러나 인간은 이 사랑마저 하나님께 아픔으로 돌려드렸습니다. 서로 비난하고 잘못을 자신에게로 돌리지 못하는 죄 된 모습을 하나님에게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잘못했어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이렇게 됐어요. 용서해 주세요라고 소리치며 간구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죄가 무엇인가를 보여줍니다.

 

얼마나 죄가 무서운 것입니까? 조금 전까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달려 나가던 그들이 이제 하나님이 무서워 숨어 버리는 그런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얼마나 죄가 인간을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이것이 선악을 아는 결과입니다. 잘못된 것이 무엇인가를 너무나 잘 알지만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은 상실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죄는 그때부터 인간을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했고, 깊은 어둠 속으로 그들을 데리고 갔습니다. 그 숨은 곳에서 인간이 누린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을 떠나 숨은 곳에서 그들은 안식이 없는 불안과 걱정으로 살아갔습니다. 죄로 인한 영원한 죽음에 대해 인류는 좌절하게 됩니다. 그 어느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절망인 영원한 사망에 머물게 되었던 것입니다. 인류의 영원한 질문인 죽음의 문제에 답을 주려는 것이 선교의 이유입니다.

 

마지막으로, 선교가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패배를 알리는 것이 아니라 승리를 알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서 3장은 사탄으로 인간 타락을 설명하는 중요한 장입니다. 하지만 그 타락으로 인하여 모든 역사와 인간의 끝이 아님을 더 강조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타락으로 끝이 나면 하나님의 무능력함과 무책임이 동시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님을 창세기 3 15절과 21절에서 나타내 보이십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3:15).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시니라”(3:21).

 

사탄이 인간을 죄에 빠뜨린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는 이 두 구절의 승리의 의미를 전해야 하는 선교의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파괴된 모든 것들에 대해 우주의 주관자로 대책을 제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지은 피조물들에 의한 파괴와 불순종으로 인해 들어온 죄와 악의 모든 것들에 대해 무방비로 있지 않았습니다. 그냥 넋을 잃으시고 가만히 주저 앉아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쉬지 않고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죄로 무너진 세상을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창 3:15절에서 들려옵니다. 죄 가운데 있는 인간에게 복음이 창 3:21절에서 보여졌습니다. 그리스도가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만드셨다. 사망으로 달려가는 인간을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다. 아담과 하와에게 지어 입힌 가죽 옷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 복음의 소리가 울려 퍼지지 않았다면 창세기는 창조로 시작하여 비극으로 끝날 것입니다. 세상을 지은 하나님이 사탄에게 패배했다고만 소개하는 책으로 영영 남게 될 것입니다. 무능한 신과 인간의 비참함만 나열될 것입니다. 그러나 창세기에서부터 복음이 울려 퍼지고 있음은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요 또한 인간을 향한 무한한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왜 땅끝까지 가야 하는 이유는 사탄이 무섭고 지옥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 사랑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죄 가운데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을 구원하시는 복음을 선포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아직도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영원한 사망으로 달려가는 내 형제 부모가 있기 때문입니다. 남아있는 2015년의 마지막 달부터 복된 소리를 코넬캠퍼스와 이타카와 코닝에서도 전할 수 있는 전도자가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