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3): 왜 선교가 지속 되어야 하는가?
창 3: 1-6
선교 시리즈를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은 창세기 3장의 인간을 살피면서 왜 선교가 지속되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인간에 의한 진리의 왜곡과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 지금도 지속되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창조 된 후 하나님으로부터 한 가지 명령을 받습니다(창2: 16-17,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그러나 하나님 말씀에 대한 왜곡은 사탄의 질문에서 먼저 일어납니다(3:1,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더냐?”). 이어서 대답하는 여자에 의해서 말씀에 대한 혼돈이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여자의 대답이 하나님의 명령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결국 진리의 왜곡도 사탄에 의해 주도 되고(생각이 주어진다) 인간이 그 주역이 되어 진행됨을 보여줍니다.
여자의 말에 “먹지도 말고”와 “만지지도 말라”는 추가된 뭔가를 발견합니다. 아담이 더한 것일까요? 아니면 여자가 나중 추가한 것일까요? 만약 아담이 추가했다면 아담에게 일차적 책임이 주어질 것입니다. 반면 여자가 더한 해석이라면 책임이 여자에게 있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것에 대해 침묵합니다.
사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추가된
말 중에, “만지지도 말라”는 말 앞에 “먹지도 말라”는 말을 여자가 분명히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은 바로 이 대목입니다. ‘먹지 말라는 것’을 그녀도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먹지 말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것과 ‘먹지 말아야 한다’는 명령을 어긴 것입니다.
그래서 11절의 하나님의 질문의 요점은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라 이들에게 구원을 허락하셔야
하는 이유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질문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지 못하는 인간의 불순종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생각을 더해서 진리를 왜곡 시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이 세상에 생겨난 철학, 인간의 논리, 이단과 사이비들이 있습니다. 진리를 선포하기보다 진리를 왜곡 시키는데
사용 되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불순종과 진리의 왜곡이 있는 한 선교는 지속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이유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인간 타락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지 않다고 말하는 분들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아담이 타락의 현장에 실제 있었느냐는 질문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만약 아담이 여자와 함께 있었다면 왜 선악과를 먹도록 했느냐는 것입니다. 그곳에 없었기에 잘못을 지적하지도 못했고 먹는 것을 못 말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아담은 책임에서 면제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담이 없었다 할지라도 나중에 그녀가 먹게 할 바로 그 때에는 왜 멈추지 않았는가? 결국 책임을 면할 수 없는 입장이 되고 맙니다.
이쯤에서 사건의 현장을 다시 한번 점검해 보고자 합니다. 6절을 보면, “여자가 그 열매를 따서 먹고,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니, 그도 그것을 먹었다”(새번역);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개역개정); “She also gave some to
her husband, who was with her, and he ate it"(NIV). “자기와 함께한”(who was with her)이라는 문구를 보면 선악과를 여자가 먼저 먹지만 분명 아담도 그녀와 함께 있음을
발견합니다.
아직도 믿기 어렵다면, 뱀이 여자에게
말할 때 일관성 있게 어떤 인칭 대명사를 사용하고 있는가에 집중해 보시기 바랍니다. 2인칭 복수 대명사 ‘너희’(1, 4, 5절)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으로 보아 뱀이 여자를 유혹하고 있는 동안 남자는 줄곧 함께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자료입니다. 따라서 본문은 여자가 선악과의 실과를 먹을 당시부터 남자는 그 현장에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책임은 1)하나님 명령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여자를 바로 잡아 주지 못한 것, 2)먹으려는 순간 즉각적으로 저지 하지 않은 방종
죄, 3)그 역시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유혹이 올 때
욕심이 생겨 순종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침묵함으로 없는 것처럼 보이는 악함이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비록
아담의 후손이지만 아담이 죄를 지은 것이지 나는 그곳에 없었다. 너무 먼 시간의 이야기이다. 뭐 이런 변명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육신적으로 아담의 후손이기에
그 죄가 이어집니다. 그 자리에 내가 있다 하더라도 동일한 결과를 만들어 내는 그 책임 때문에 또한
회피할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이 죽는다는 사실이 모두에게 죄가 있음을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아담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하나님이 그렇다고 말하는 것에 대해
인간은 여전히 인정하지 않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죄가 얼마나 무서운 힘을 가지는 가를 인간은 여전히 모르기 때문에 선교는 지속되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두 사람이
사탄을 이기지 못하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죄의 힘이 얼마나 강한 가를 충분히 보여줍니다. 거짓은 참되고
선한 것을 묵살시켜 버렸습니다. 함께 한 아담은 거짓이 말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욕심으로 인해 죄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가 거짓에 진 것이 아니라
사람이 유혹에 진 것임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유혹이 올 때 아담과 여자는 선악과를 보며 하나님 말씀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저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만약 그들이 선악과를 볼
때 하나님의 명령을 기억했더라면, 다른 선택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결국 선악과는 기록이 없던 시절, 성경 말씀과 같은 역할을 해 주던 것입니다. 해서는 안 되는 것을 기억나게 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존재로 늘 모시고 사는 피조물의 삶을 선악과를 보면서
알게 했던 것입니다(선악과의 존재이유).
그러므로 성경을 읽는 것으로 다 된다고 생각하면 유혹이 오면 이겨낼 수 없습니다. 유혹이 올 때 말씀이 기억나고 말씀대로 따르려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사탄으로 세 가지 유혹을 이겨 내었던 동일한 방법입니다. 결국 내 속에서 암기되지 않을 정도로 읽혀지지
않은 말씀은 사실 유혹의 때에 생각나지 않습니다. 유혹에 넘어지는 분이 있다면 이제 성경 말씀을 철저히
암송하는 단계로 나아가기 바랍니다. 엄청난 약효를 보시게 될 것입니다.
죄는 인간을 깊은 어둠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인류는
타락 이후 하나님 앞을 떠나 숨은 곳에서 줄곧 빛을 찾지만 죄와 악이라는 어둠만이 주위에 있습니다.
살 길을 찾지만 혼돈만이 놓여 있습니다. 안식을 누리려고 자신만의 공간으로
숨지만 그곳에는 공허만이 사람들에게 다가옵니다.
인간의 불순종으로 하나님과의 영원히 단절된 사망이 있기에 우리는 십자가를 들고 가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외쳐야 합니다. 어둠에 있는 자들에게 빛으로 나아오도록 인도해주어야 합니다. 아직도 이 근원적인 악의 힘이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사탄이 아직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거듭나지 못한 인간에게 다가가서 불안하게 만들고, 우울하게 만들어, 질서 속에 살지 못하고 혼돈 가운데서 늘 괴로워하게 만듭니다.
주님이
다시 올 때 까지는 사탄이 세상에 있기에, 우리는 그때까지만 최선을 다해, 선교에 불림을 받은 자로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