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1): 주님이 찾아 온 사람들
창 4: 9-26
하나님은
사람을 찾아 오시기를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창조한 인간을 만나러 에덴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면 타락한 이후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인간을 찾아오시기를 좋아 하셨을까요?
첫째, 하나님은 아담 이후에도
죄로 멀어지는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찾아오셨습니다. 창세기 4장의 가인과 아벨 이야기는 인류의 처음 살인 사건입니다. 죄가 얼마나
극악 한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장 사랑하는 형제를 죽인다는 것이 인간 된 죄 된 모습입니다.
살인사건 이후 바로 접하게 되는 내용은 가인의 자녀들이 이 땅에서 번성하는 이야기들입니다. 이들은 도시를 만들며 인류의 문명을 만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여전히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모습으로 드러남을 보게 됩니다. 가인이 ‘성을 쌓고’(창4:17)라는
말은 창4: 12의 하나님의 말씀에 “너는 집 없이 떠돌아
다니는 방랑자가 되어” 라는 명령과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입니다.
동생을 살인하여 그 피가 땅에 뿌려졌으므로 하나님은 가인에게 땅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창4:11). 땅을 경작해도 아담보다 더 땅이 효력을 내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땅이 그에게 수고로움의 대가를 내어주지 않는다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떠도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 그의 삶의 모습을 16절의 ‘놋’이라는 단어가 설명합니다. ‘유리함의
땅’이라는 의미입니다.
방랑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하지만
살인자라는 표를 가지고 있는 가인에게는 매우 힘든 일이었습니다. 특히 남들로부터의 자신이 해 당하는
것을 두려워 하게 됩니다. 그래서 가인이 고안해 낸 것은 다시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었습니다. 돌아다니는 것을 피하기 위해 도시를 건설하였던 것입니다. 도시 건설은
유랑이 아닌 정착할 수 있는 매력 있는 고안물이었지만 또 한번의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류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계속 찾아오셔서 만나주시고 관계를 이어가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둘째, 자신들이 가진 힘과 능력으로만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다가오셨습니다. 가인에
이어 그의 후손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소개됩니다. 가장 먼저 19절부터 라멕이 소개됩니다. 그에게서 주목할 것은 23절에서 ‘상처(창상)’라는 말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전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드디어 사람을 죽이는 것이 가정을 넘어 국가의 범위로 확대되어 가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라멕은 성경에서 처음으로 아내를 두 사람이나 얻은 최초의 사람으로 기록 됩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은 전쟁이었습니다. 남들에게서 빼앗아
넘쳐나는 재물과 명성은 라멕을 점점 공동체에서 확고한 위치에 올라가도록 만들어 주었을 것입니다. 재물을
이용하여 자신이 원하는 것을 더 취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 역시 하나님이 다스리는 가정의
원리를 처음으로 파괴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21절에서 유발이 소개됩니다. 그는 악기를
고안하였다기 보다 오히려 이들의 직업이 오락을 제공하는 사람들의 시조로 보는 것이 무난합니다(‘잡는 모든
자’). 자신들의 재능을 보여주며 사는 방식이 고대 사회에서 나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편, 이런 사람들이 생겨 났다는 것은 문화나 오락에 대한 수요가
대단한 수준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과 소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만들어 내고 제공하는 것에 더 즐거움과 안정을 추구하는
세상이 만들어져 가고 있음을 반영합니다. 점점 세상은 필요한 것 이상으로 가질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인간에 의해 마련 되어 갔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환경을 극복하고 문명을 이루어 나가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러나 이루어내는 문화 속에서 하나님을 배제하는 것은 분명한 범죄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은 겸손을 잃어버리고
극도의 교만으로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이룬 업적을 보며 자랑합니다. 자신이 소유한 힘을 보며 교만을 키워갔습니다. 그 예가 바로 라멕입니다. 그의 이름 자체가 ‘strong youth’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영웅으로 불사조처럼
살 것이라 장담하였지만 그도 역시 땅에 묻히는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17-18절의 가인의 자손들 중 ‘엘’이라는 suffix를 가진 몇 사람을 봅니다.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므후야엘의 경우, ‘하나님에 의해 죽임을 당하다’(blotted out by God)는
그런 의미이다. 그리고 그의 아들 므드사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미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마트’라는 사람의 의미와 스올이라는 지옥의 의미가 합쳐진 이름으로
‘지옥의 자식’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이들이 얼마나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는 것을 그 이름들이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욕망만을 추구함으로 하나님의 사람이
더 이상 아님을 스스로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벗어나 자신들이 세운 나라에 주인이 되어 다스리려는
교만이 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죽임을 당할 지경까지 맞서 보겠다는 인간의 악한 의지가 아들들의
이름 속에 베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인을
계획한 가인의 후손들의 살아가는 모습이며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문화가 나쁜 것임을 말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죄 가운데 놓여진 사람들이 문화라는 수단을 통해 만들어내는 결과를 보는 것입니다. 사람의 도덕적인 상태는 문화의 위대한 발전과 함께 개선되지 않았음을 성경은 말해줍니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타락한 수준이며 앞으로 주님이 다시 오시기 전에 얼마나 인류가 타락 할
것 인가를 미리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로 3:18은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고 결론짓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만 들으면 성탄절이 너무 우울해 집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를 구원자로 이
땅에 보내시기 전에는 아무 대책도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악이 성행하는 세상을 향해 카운터 펀치를
줄기차게 날리시며 찾아와 주셨습니다. 창세기에서 가인이 소개된다면 가인에 버금가는 하나님의 자녀 셋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의 씨를 통해 가인의 후손이 차지해 가고 있는 땅의 다른 곳을 다스리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가인의 자녀들이 소개된 다음 바로 이어서 창4: 25-5:32에서 셋의 후손들이 이어져 가고 있음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인의 후손 중에 뛰어난 영웅이며 가장
유명한 반역자인 라멕이 있었다면 성경은 그에 버금가는 동시대의 하나님의 자녀들 중에 에녹을 자랑하고 있습니다(창5:21-24).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에 무방비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대책들을 제시하시며 우리에게 다가오고 계셨던
것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배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망이 죽음 이후에 존재하기에 영을 가진 인간은 늘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생을 마감해야 했을 것입니다. 죽음 너머 사망에 끌려가 영원한 지옥에 던져져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절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계속적으로 인간에게
찾아오셔서 그분의 사랑을 전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때가 차매 직접 이 땅에 구원자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너무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친히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바로
성탄입니다.
오늘 예배자로 모인 모든 분들이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찾아 오신 주님을 찬양하기 원합니다. 예수를 믿는 모든 자에게 죄
사함을 허락하시는 구세주가 되시고, 인생의 주인이 되셔서 힘든 삶을 인도해 주시는 주님을 경배하는 복된
성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