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3): 이 때에 기도해야 합니다  

6:12-16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기도들이 있습니다. 통성기도, 산기도, 새벽기도, 그리고 철야기도 등 입니다. 빌리 그래엄 목사님이 새벽을 깨우는 3 나라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먼저 아름다운 새 소리로 새벽을 깨우는 캐나다. 그리고 아침부터 공장 소리로 시작하는 일본입니다.

 

마지막으로 새벽기도 종소리로 새벽을 깨우는 대한민국을 소개한바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한국 교회의 아름다운 기도의 전통들이 사라지지 시작했습니다. 부르짖어 기도 할 만 큼 간절함이 사라진 것이 교회의 모습입니다. 경제 성장으로 생활이 바빠지고 기도 제목이었던 배고픔과 가난에서 벗어난 것이 가장 큰 원인입니다.

 

관심 있는 통계가 있습니다. 예배와 식사 기도시간을 제외한 개신교인 하루 평균 기도 시간입니다. 통계 기관 이름은 생략합니다. 200527(갤럽). 2007년은 2 35초가 줄어든 24 25. 2012 23 7, 201721 5초였습니다.

팬데믹 기간인 2022년에는 24분 대로 나왔습니다.

 

우리가 올려 드리는 기도의 내용을 보면 주로 회개와 감사와 간구로 이루어집니다. 회개를 강조하다 보면 다들 바쁘고 늘 죄짓는 사람도 아닌데 20분이면 충분한 것이 아니냐고 질문하는 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도할 때 우리 자신이 지은 죄만 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면 갈수록 주님의 빛에 의해 드러나는 내면의 내 모습에 놀라고 회개하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면 비추는 빛 때문에 내가 이런 사람이었구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가진 지위와 재물, 그리고 남들 보다 조금 나은 인격 뒤에 감추인나를 반드시 보게 하십니다.

 

앞에서는 웃지만 뒤에서 비난하고 사랑의 폭을 더 키워가지 못하는 모습이 드러납니다. 우리의 기도생활 가운데 이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수 믿고 변화되기란 어렵습니다. 성도는 기도하면 할수록 회개는 더 많아지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 더 닮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눅6:12절을 보면, 철야기도를 주님이 하고 계십니다. 날이 세도록 기도했는데 한 가지 이해가 안 됩니다. 6:7절에서 주님은 이방인들처럼 중언부언 하지 않고 말을 많이 하지 말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친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도에 대해 잘 아시는 분이 왜 그렇게 길게 기도해야 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밤새 기도했다는 말은 하나님께 묻고 답을 듣는 긴 대화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6:13절은 왜 주님이 밤을 꼬박 새며 기도했는지 이유를 말씀해 줍니다. 12제자들을 부르시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누가만 말해줍니다. 제자들을 한번 보기 바랍니다.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제자를 뽑아야 하는 고민이 있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로부터 손가락질 당하며 세금을 거두는 마태 역시 의논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도마는 어떻습니까? 늘 회의적이고 의심하는 그에게 무엇을 진리라고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부모의 영향아래 아직 어리고 사랑 받기만을 원하는 두 형제 야고보와 요한은 어떻습니까?

 

6: 8-9절을 보면, 어린아이 하나가 다섯 떡 덩어리와 두 마리 물고기를 가져옵니다. 그때 어떻게 이것으로 많은 사람을 먹일 수 있겠느냐?’ 고 예리하게 현실을 바라보고 계산하는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도 골치입니다. 예수님을 팔아 넘길 배신자 가롯 유다는 주님의 기도제목에 들어가지 않았겠습니까?

 

제자의 선택을 놓고 밤새 기도했다는 것은 그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암시해 줍니다. 이들은 앞으로 주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십자가 사건의 증인들로 기독교의 초석을 놓는 역할을 감당할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이런 밤샘 기도 모습은 첫째로, 중요한 일이 있을 때 밤을 세울만큼 상세하게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함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일만 밤을 샐 정도로 기도해야 할까요? 6:12절을 보면 이때라는 말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기도하러 산에 가던 때가 어떤 처지에 주님이 있었느냐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5:21절과 6:7절을 보면 바리세인들과 서기관들로부터 신성 모독 죄와 안식일을 범하는 자라는 낙인과 의심을 받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눅 6:11절에서는 생명의 위협까지 받고 있던 때임을 말해줍니다. 주님은 이때 사람들과 타협하여 신변을 보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뒤로하고 기도의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우리 역시 마음이 무겁고 걱정과 불안으로 가득할 때, 기도의 사람이 되야 합니다. 기도는 이 때에도해야 합니다.

 

살면서 사람과의 관계나 상황이 어려워지면 불안과 실망과 좌절이라는 불청객이 찾아옵니다. 불안과 문제보다 더 큰 하나님을 만나고, 나를 떨게 만드는 사람보다 더 큰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는 기도의 삶이 반드시 성도에게 있어야 합니다. 기도는 문제 때문이 아니라 해결 때문에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때는 하나 더 있습니다. 5: 19절을 보면, 주님은 모든 일을 자의대로 하지 않고 언제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를 뽑기 위해 기도할 때도 예수님은 내가 주는 명단대로 했으면 좋겠다는 아버지의 음성을 분명히 들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주님은 너무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벌써 주님의 눈과 마음에서 제외된 사람들이 상당했기 때문입니다. 이때 주님은 평소보다 더 시간을 내어 밤을 세며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를 마친 주님을 보기 바랍니다. 자신의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따라 제자들을 택하시고 그들과 삶을 같이 하셨습니다. 기도는 이런 것입니다.

 

기도는 내 생각과 요구만 외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음성을 듣는 시간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내 것과 다름을 인지하는 순간 성도는 더 구체적으로 따지고 묻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또 하나님의 뜻은 항상 옳은 것이기에 순종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요청해야 합니다. 기도는 아버지의 뜻과 분리된 삶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 뜻에 나를 일치시키는 과정입니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우리에게 중요한 일이 많습니까? 또 상황은 녹녹하지 않아 불안과 걱정은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게다가 내 뜻대로 하고 싶은 것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께 나아가서 부르짖어 기도해야만 하는 때입니다. 기도하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