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6): 기도의 본질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8:9-14

 


기도에 관한 말씀을 몇 주 동안 나누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기도가 무엇인가? 라는 기도의 본질에 대해서는 조금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주제에 집중해 보려고 합니다. 18:10절에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으로 올라갑니다.

이어서 11-12 절에서 먼저 바리새인의 기도를 들을 수 있습니다.

 

이웃들에게 토색과 불의와 간음을 하지 않고, 금식과 십일조를 행하는 것이 나타납니다. 이것으로 보아 하나님 말씀을 철저히 지키려는 신앙 자세가 드러납니다. 비록 바리새인일지라 해도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고 말씀에 순종하려는 이런 모습은 모두에게 칭찬 받을 만 합니다.

 

지금까지 본 그의 기도 내용으로 보아, 첫째, 기도는 하나님과 세상 사람들 앞에서 나 자신이 어떻게 살아 가고 있는가를 살피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나를 바라보는 기준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내가 만든 것이나,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이 만든 전통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말씀이어야만 합니다.  

 

여기서 성도님들이 기도 시간에 자신의 삶을 점검할 수 있는 좋은 방법 하나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개인 기도를 할 때 마지막 정도에 말씀을 읽으면서 그 말씀을 내 기도로 바꾸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라는 경우에 주님 자기 주장만을 내세우는 형제자매가 불편합니다. 이것이 죄임을 고백합니다.

 

나를 용서하시고 주의 사랑으로 그들을 품을 수 있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에게 부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이지요. 특별히 시편을 매일 읽고 이렇게 기도하다 보면, 하나님이 성도에게 원하는 기도가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이 기도 방법을 소개해 드리자, 자신의 기도에 적용하고 좋은 간증을 남긴 분이 계셨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13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바리새인과는 달리, 세리는 멀리 서서 하늘을 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기도합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당시 세리들은 일정 수입을 로마로부터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은 로마에 받치는 세금 외에 자신의 삶을 위해 세금을 몇 배나 더 거두었다고 합니다.

 

이런 그의 삶 때문인지 본문의 세리는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기도를 드립니다. 세리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사람들 앞에서는 자존심 상해가며 심지어 남의 것 착복하며 살아갔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결코 숨길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일대일로 만나는 개인 기도가 좋은 이유는 나의 죄와 허물과 가식과 위선을 보게 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가릴 수 없는 나를 볼 때, 우리는 세리와 같이 가슴을 치며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기도는 나를 바라보며 자신이 정말 어떤 사람임을 인정하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우리는 내가 갖고 있는 건강, 학식, 재산, 지금 누리는 명예 어느 정도는 자랑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내 심령의 갈급함과 허무함, 조그마한 죄 하나 벗어나지 못하는 연약한 나, 교만한 나, 하나님 앞에서 구역질 나는 내 모습을, 하나님과 만나는 개인 기도에는 인정하고 사시는지요?

 

또한 바리새인처럼 남들을 비교하며, 나는 하지 않기에 스스로 의인인척 교만해 하는 내 모습을 바라보는지요? 기도하는 순간 우리는 빛 된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갑니다. 그래서 기도가 깊어지면 질수록 추한 내 모습이 보인다고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이때까지 잘 살았다고 생각하는데 아무것도 아닌 나에게 좌절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는 우리의 약점만 보여주면서 마음껏 부려먹으려고 만든 도구일까요? 아닙니다. 기도는 셋째로, 자신이 죄인임을 시인하는 사람을 향해 네 죄가 용서 받았다는 행복한 음성을 듣는 즐거운 시간입니다. 세리와 같이 자신이 죄인임을 발견하고 절망 가운데 놓인 사람이, 기도 가운데 하늘로부터 받는 선물이 있습니다.

 

은혜입니다. 은혜는 어떤 행위로도 받을 수 없는 인간에게 베푸는 무조전적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은혜가 죄인임을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졌기에, 비록 세상에서는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할지라도, 세리는 성전에서 멀리 떨어진 이방인들이 서 있는 뜰에서나마 기도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세리는 모순된 자신의 삶을 스스로 해결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바리새인처럼 스스로 의인이라고 하나님을 기만 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있는 모습 그대로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할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의 문제를 풀어 줄 것을 가슴을 치며 호소합니다. 이런 세리의 믿음과 태도가 하나님의 눈에 옳은 것입니다.

 

18:14절을 보면, 놀랍게도 주님은 세리를 더 이상 죄인이라 하지 않고 의인이라 부릅니다. 기도는 이처럼 놀라운 하나님의 긍휼을 체험하는 복된 시간입니다. 더 감사한 것이 있습니다. 기도는 죄된 나를 보게만 하고, 죄용서함의 은혜만을 체험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기도는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저는 큰 변화를 기도 가운데 체험했습니다. 그렇다고 말씀을 읽는 것과 설교를 듣는 것이 영향이 없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오셔서 한치의 주저함도 없이 우리의 죄를 적나라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정확히 주님이 우리에게서 변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들려 주십니다.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도 의지가 있어 변합니다. 믿는 성도는 성령이 내제하기에 더 변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고 이미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도 변하지 않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정확히 내가 무엇이 변해야 하는지를 잘 모를 경우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교회에서 직책을 가지고 섬겨도 변하지 않은 체로 살아가며 손가락질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기도 가운데 우리는 주님을 만납니다. 그때 주님은 내게서 허물과 죄는 물론, 털어내어야 하는 습관과 삐뚤어진 생각과 태도, 쓸데없이 갖고 있는 시기와 질투, 비교하는 마음을 정확히 말씀합니다. 주님의 정확한 명령이 있는데 그 어는 누가 거부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기도는 성도를 변화시킵니다.

 

오래 믿어도 변화가 없다면, 하나님이 나에게서 바꾸기를 원하는 것을 듣는 기도가 없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기도 가운데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반드시 내가 새로워져야 할 목록을 명확히 말씀해 주십니다. 기도의 자리에 나가, 이 음성을 듣고 나 자신이 변화는 체험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