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3): 위로 받으며 삽니다 

4:1, 9-12

 


살다 보면 억울한 일을 당해 마음이 아플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더 가슴 아픈 것은 내 모든 사정을 들어주고, 이해하고, 위로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가족이 있고 친구들도 있지 않느냐? 고 반문 합니다. 심지어 사회에는 약자들을 돕는 단체들도 있습니다. 정치도 있고 법도 있습니다.

 

인권을 다루는 유엔기구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더 억울해 하고 위로 받기를 원합니다. 이런 모습은 지금이나 옛날이나 마찬가진 것 같습니다. 4:1절을 보면, 해 아래에서 힘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자행되는 학대가 너무나 심하고, 학대 받는 사람들의 눈물이 많다는 것을 전도자는 보게 됩니다.

 

‘학대’는 자기 이익을 위해 남의 권리나 인격을 무시하고 짓밟는 행위입니다. 권력자들이 약자들을 보호하며 더불어 살지 않고, 자신의 힘을 휘둘러서 압제하고 괴롭히는 악한 모습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 주신 지혜로 태평성대를 이루어 내었습니다. 그에게 이런 현실은 상당한 실망과 좌절을 가져다 주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통치와 능력을 뛰어넘는 악과 부조리를 해 아래에서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부의 축적과 과학을 기반으로 삶은 더 나아져 갔습니다. 또 자신들의 시대

에 낙원이 이루어질 것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늘 인류가 경험한 것은, 지속적으로 자행되는 

억압과 폭력과 전쟁으로 인한 절망감입니다.

 

더욱 위로자가 없는 난감한 상황에 살아야 한다는 것은, 큰 고통이며 사람들을 허무하게 만듭니다. 어둠의 중세를 지나 지금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세기 별로 인간이 품었던 희망과 기대가 헛된 것이 되어 버립니다. 인간의 노력조차도 악한 인간의 본성을 바꾸지 못하고, 뒤집어진 세상을 바로 세우지 못한다는 한계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서로 상대를 보고 가해자라고 주장합니다. 서로에게 더 큰 타격과 되돌려주기 보복을 가합니다. 내가 흘린 피보다 더 많은 피를 보려는 것이 세상입니다. 가해자는 있는데 위로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구에게 억울함을 말하며, 마음의 상처는 또 어디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스스로 위안을 찾는 사람들은 스포츠와 오락에 빠지고, 그것도 안되면 온갖 중독에 빠집니다. 더 힘들면 허락된 삶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게다가 폭력적 수단으로 상대의 생명까지도 위협하는 보복도 답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답이 없을 때 하나님께 나가, 무릎을 한번 끓어보기 바랍니다(항복, 겸손, 간절함).

 

전도서를 처음 시작할 때 해 아래에서 허무하다는 말만 나오면, 해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말씀을 성도님들께 드렸습니다. 우리 가운데 세상이 알 수도 없고 고칠 수도 없는 병을 가진 분이 계시는지요? 하나님은 인간의 불치병인 죽음까지도, 부활과 생명으로 치유하는 여호와 라파가 되십니다.

 

내 앞 길이 너무 막막해서 한 치도 볼 수 없는 답답함이 있으신지요? 주님은 나를 위해 사막에서도, 바다 한 가운데도 길을 만드십니다. 나를 위해 새 일을 준비해 주시는 여호와 이레 하나님입니다. 나를 돕는 사람이 없고 내 편에 서 있는 사람이 없을지라도, 우리를 승리로 이끄시는 여호와 닛시의 하나님입니다

 

입학으로 처음으로 부모를 떠나 낯선 이곳에 오신 분들이 많습니다. 졸업 후 직장을 얻어 새로운 곳에서 아는 사람 없이 낯설기만 한 이곳 이타카에 혼자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어디를 가든 하나님은 그곳에 계시는 여호와 삼마되십니다. 비록 홀로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가 진정한 예배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어려운 공부를 마치고 학위를 받았지만 어디를 가야 할지 잘 모르는 미래의 불확실함으로 막막하고 불안하기만 하십니까? 주위에 잘 풀리는 사람들과 비교되어 마음만 무겁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두렵고 떨게 만들지 않으십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마음의 평강을 허락하시는 여호와 샬롬 되신 하나님입니다.

 

직장과 실험실에서 좋지 않은 결과 때문에, 또는 사람 때문에 실망하고 넘어져 있는 나에게 하나님은 찾아 오십니다. 떠나지 않으시고 내 곁에 늘 함께 해 주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고 능력 있는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이 하나님만 붙잡기만 하면 뒤집힌 것을 다시 역전시키는 하나님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놀랍게도 전도자는 성도가 위로 받을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하나 더 소개합니다. 9절을 보면, 혼자 보다는 둘이 더 낫다고 말씀합니다. 두 사람이 함께 일할 때에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이런 협력하는 모습을 삼위일체 되는 하나님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는 가장 먼저 가정을 통해 보여 주었습니다.

 

예수님 역시 마 18:19절에서 기도할 때도,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그들을 위해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합심해서 기도하며 풀어가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이 머리 되시고 각 지체들로 연합된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연합이란 지체들이 힘들고 아플 때 챙기고 위로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10절은 이 연합을 통해 우리는 더욱 위로 받을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내가 완벽하다면 위로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서로 의지하고 도움을 받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떤 누구에게도 기댈 곳이 없습니다. 이때 넘어지면 붙잡아 일으킬 사람이 없어 큰 화를 입게 될 것이라고 전도자는 말합니다.

 

우리 자녀들에게는 좋은 친구들 많이 사귀라고 합니다. 교회에는 이렇게 좋은 성도들이 많은데도 사귐이 없다면,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11절에서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듯한데,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겠느냐고 반문합니다. 성도의 연합은 서로 위로도 되지만, 내 신앙을 건강하게 유지시키는 힘이 된다는 뜻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함께 하고 성도들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나를 힘들게 할 때, 하늘의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위로를 받을 줄 믿습니다. 또 해 아래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교회에서도 용서와 위로가 넘쳐 났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과 성도들의 참된 위로를 통해, 이 땅에서 낙망하고 힘을 잃은 많은 사람들이, 다시 일어 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