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2): 자족함에 감사 

6:7


 

어릴 적 읽었던 이솝 우화가운데 기억 나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고기를 물고 다리를 건너던 개가 있었습니다. 다리를 지나다가 물 속에 보인 다른 개를 보게 됩니다. 그 개의 입에 물린 먹이를 빼앗으려고 입을 벌립니다. 그러자 자기 것을 물속에 빠뜨리는 욕심 많은 개 이야기입니다. 동물은 그렇다 치고 인간은 어떨까요?

 

인간의 욕심을 나타내는 속담 중에는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경말씀 전 6:7절 상반절은 사람의 수고는 다 자기의 입을 위함이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수고는 먹고 살기 위해 진저리 나게 일하는 노고를 의미입니다. 그런데 바로 6:7절 하반부를 보면, 그런 고역에도 불구하고 식욕은 채울 수 없다고 합니다.

 

공동번역을 보면, ‘식욕대신 욕망으로 번역합니다. 원어적 의미는 영혼’(네페쉬)을 뜻합니다. 해 아래에서 인간의 수고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욕망이 너무 크기에 영혼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뜻입니다. 또 영혼은 인간 스스로가 채우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누군가가 채우고 만족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왜 만족함이 없을까요? 인간의 모든 만족을 흡수해 버리는 블랙홀이 우리 영혼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3:5절을 보면, 이것은 사탄이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는 거짓된 유혹으로 생겨난 인간의 욕망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욕망 가운데 살아온 타락한 인간은 만족함이 없게 된 것입니다

 

사람은 영, , 육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육체는 적당히 먹고 운동하고 가꾸면 어느 정도 만족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더 자극적인 감각과 쾌락을 추구하는 술이나 오락과 마약까지 찾게 됩니다. 1: 26-27절은, 하나님이 만드신 남녀의 경계를 넘어 성적 욕망을 채우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인간의 지적 영역도 어느 경지에 오르면 만족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습니다. 창조가 아닌 진화를 인간 사고 속에 자리잡게 만든 후, 성경의 진리를 계속 흔들고 있습니다. 게다가 복제기술의 개발로 더욱 신의 영역까지도 넘보고 있는 현실입니다. 하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의 부분입니다.

 

의 진정한 주인은 인간에게 호흡을 불어 넣어준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께로 너무나 멀리 떨어진 체로 살았습니다. 문제는 문명이 발달된 도시나, 여전히 원시적으로 사는 밀림이나, 또 고대나 현대나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이 아닌 다른 영적 존재를 찾는 행위가 계속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아담이 숲에 숨은 이후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영은 죽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영이 사는 방법은 오직 우리 속으로 하나님의 영이 다시 들어오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죄인으로 계속 남아 있는 이상, 하나님의 영은 우리 속으로 들어올 수 없고 거할 수도 없습니다.

 

이 모든 문제를 풀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온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지고 십자가에서 죽고 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을 마음으로 믿고 입술로 고백하는 사람들을 더 이상 죄인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믿고 죄 용서함 받은 모든 의인들에게 성령을 주어 그들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게 하셨습니다.  

 

우리 속에 내재하는 성령은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게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내가 섬겨 왔던 우상이나 다른 세상 가치관들을 배설물처럼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세상 부귀와 명예가 삶의 목적이 더 이상 될 수 없습니다. 단지 그것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수단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새롭게 만들었고, 새로운 생각을 자라나게 해 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 4:11절에서 이것을 우리에게 소개해 줍니다. 자신은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말합니다. 자족함이란 너무 가난해서 절약하는 법이 아닙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함을 누리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세상을 만드시고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이 나의 아버지라는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도 나는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지금 누리는 것을 주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가장 적합한 것이고, 내가 쓰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더 필요하면 주시기에 현재의 것으로 최선을 다하는 삶입니다. 이제는 자족함으로 생기는 성도의 감사를 살펴 보려고 합니다

 

첫째, 자족함이 있으면 주의 일을 할 수 있는 마음과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기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지금 내게 주신 것을 만족하지 못한다면, 예수를 위한 헌신의 삶은 시작될 수 없습니다. 늘 채워지지 않은 내 욕망을 채우는데 시간을 전부 투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 뜻 이루는 삶은 물 건너 가고 말겠지요.

 

둘째, 자족함은 불평과 원망을 떠나게 만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늘 불평만 한다면 하나님은 무엇을 더 복으로 주시겠습니까? 자족은 우리 인간의 욕구를 다 버리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부족한 것에 대한 불만과 원망을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신 것에 만족하며 기쁘게 사는 것을 택하는 것입니다.

 

이 훈련이 된 사람은 1) 이것으로 만족하기에 더 갖기를 원하는 욕망을 멈추어 세울 수 있게 합니다. 2)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다는 확신을 경험했기에, 주신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도 않습니다, 3)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나중에 얻거나, 더 많은 것을 가져도, 내 힘으로 얻었다고 자만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자족함은 우리를 죄와 사망의 비참한 비극에서 벗어나게 만들기에 감사합니다. 1:14-15절에 의하면, 인간은 자기 욕심에 끌려 사탄에게 시험을 받고 죄를 짓게 됩니다. 죄가 커지면 사망에 이릅니다. 하지만 더 이상 욕심에 메이지 않고, 사탄의 미끼가 되지 않는 좋은 처방이 바로 자족함입니다.

 

예수 안에서 자족함은 세상 종교에서 말하는 인간 자신의 지혜와 능력으로 힘든 환경을 버티는 전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철저히 의존하기에 환경이나 상황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자족은 우리의 힘과 의지가 아닌 오직 하나님을 통해서만, 예수 안에서, 성령에 의해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가 없고 믿음 밖의 자족은 허세일 뿐입니다. 속은 비었는데 겉으로만 척하는 것이 허세입니다. 성도가 누리는 자족은 감사와 기쁨으로 우리를 채우는 것이며하나님 나라를 위해 섬기는 여유를 허락해 줍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닮아가는 삶에 나를 더 투자하게 만들어 줍니다. 온 성도가 자족함으로 감사가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