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표어: 사랑을 더하는 해 

3:10-14

 


늘 새해 첫 주는 교회표어를 가지고 말씀을 나눕니다. 3:14절에 사랑을 더하라는 말씀에 근거해서 올해 교회표어는 사랑을 더하는 해로 정했습니다. 올 상반기 설교주제도 사랑입니다. 사실 세상에도 사랑이라는 숭고한 정신이 존재하고 실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바울 사도는 세상에 사랑을 더하라고 말하는지 살펴 보려고 합니다

 

첫째, 우리가 사는 세상은 심한 차별로 인해 늘 사랑이 절실하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11절을 보면, 당시 세상에는 차별이 오늘날 보다 더 심했습니다. 헬라인들은 세계를 지배한 민족으로 대단한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변 나라들이 우수한 문화를 가지고 있어도 헬라어를 사용하지 못하면 전부 야만인으로 취급했다고 합니다.

 

이런 헬라인들은 자신들의 땅에 흩어져 살고 있는 유대인들을 차별했습니다. 특별히 흑해 북쪽 지역의 스구디아(스키타이)인들은 그들의 잔인함과 열악한 문화수준으로 모든 사람들에 의해 최하등 야만인 취급을 당했습니다. 심지어 유대인들 사이에도 할례 받은 사람만이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할례파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믿음으로만 구원받는 것을 따르는 무할례파를 차별했습니다.

 

한편, 노예제도가 인정되던 때라 종과 자유인의 차별이 있는 그런 세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이런 모든 차별이 복음 안에서는 무효함을 세상에 선포하고 있습니다. 노예이든 이방인이든 야만인이든 누구든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 안에서는 어떤 인종적, 문화적, 지식적 차별도, 무시도, 우월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상식처럼 들리지만 당시에는 혁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런 사실들을 보면서도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는 단지 영혼 구원에만 관심이 있다고 말합니다. 사회개혁에는 무관심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역사는 말합니다.

 

하나님 말씀이 인간의 존엄과 자유와 평등이 있는 세상으로 만들었습니다. 인권을 박탈하는 인종차별, 노예제도 등 모든 차별을 몰아내는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갑질이라는 이상한 계급의식과 점점 커져가는 계층간의 격차와 차별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여전히 세상에 더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 의문은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어떻게 더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10절을 보면, 예수를 믿으면 죄로 인해 파괴되었던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가운데서 회복됩니다. 이것을 바울 사도는 새 사람을 입었다고 합니다. 새롭게 거듭난 성도들은 전에 없던 하나님의 성품들을 드러내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12절을 보면, 이 성품들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긍휼), 베푸는 삶(자비), 나를 낮추는 모습(겸손), 부드러움(온유), 참고 견디는 능력(인내)입니다. 13절은 누구에게 불만스러운 것이 있어도 서로 이해하고 용서해 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성품들이 성도를 통해 세상에 더해질 때 그나마 사랑이 있는 세상이 될 줄 믿습니다.  

 

요즘은 아무 상관도 없는 선량한 사람들의 생명까지 해하는 막가파식 범죄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너무 차갑고 독하고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성품으로 남을 더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이 사랑을 세상에 더하는 첫 방법입니다

 

기혼목장은 개강 후 날씨가 풀리면 다시 모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기혼은 물론 청년들도 지난 학기 동안 주변에서 알아오던 분들을 있을 줄 압니다. 가능하면 모임이 있기 전에 미리 초대해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대화도 나누어 보기 바랍니다. 듣다 보면 도울 수 있는 일들이 생기면 실제로 함께 도와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전에 힘든 일이 생겨 어린 아이를 돌아가며 돌본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이타카를 떠났지만 감사하는 마음을 전해 들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우리교회 성도들도 생각하겠지만, 힘들고 어려울 때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섬김과 사랑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하는 둘째 방법입니다.

 

마지막으로, 세상에 사랑을 더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이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16절에 의하면,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 죄를 대신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고 살아난 것을 믿는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예수가 구원자임에 관심을 갖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했습니다. 자신들의 필요를 위해 예수를 찾았습니다. 예수가 자신들을 해방시켜줄 정치적인 영웅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배고픈 사람들은 빵을, 병든 자는 치유만을 원합니다. 10명의 나병환자 중 오직 한 명만 돌아와 감사하며 진정한 구원을 허락 받은 것이 그 예입니다( 17:19).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은 현재가 중요하지 죽음 이후 지옥은 관심 없습니다. 당연히 하나님 앞에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사망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예수는 외면됩니다. 세상은 인간의 노력으로 분명 변했습니다. 하지만 인간 속에 있는 죄가 주인 노릇 하는 세상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평화와 정의, 자유를 위해 싸운 역사가 많습니다. 그 사건들 속에는 개혁가들, 혁명가들, 신학자들의 역할이 있었습니다. 한가지 아쉬운 것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사회적으로 소외된 세리와 창기를 찾는 것만 강조합니다. 계급의 벽을 무너뜨리는 예수의 혁명적 모습만 부각시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웃을 돕고 사랑하되 그들이 구원을 얻기까지 두 가지가 병행된 십자가 사랑을 세상에 전하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혁명적인 일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을 보낸 하나님의 목적에는 소홀 했습니다. 죽음 이후 심판과 영원한 사망 가운데서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왜면 해 버렸습니다. 10절을 보면, 그 이유는 복음을 듣고도 지식에까지 새롭게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아닌 세상 지식이 너무 많이 우리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가장 악한 지식은 인간이 죄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음이 전하는 진리를 믿고 이 쓰레기를 버려야 합니다(회개). 깨끗해진 심령 가운데 거룩한 영이 임재하고, 나를 위해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온전한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더하라는 명령은 이렇게 정리됩니다. 1) 세상에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성품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2) 그 방법에 있어서는 실제적 도움과 함께 구원의 은혜를 반드시 전하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맛본 사람들입니다. 세상은 차별이 심해가고 사랑이 식어갑니다. 이런 세상에 인간이 만든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온 영원하고 온전한 사랑(예수 그리스도)을 더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