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1): 사랑이 중요합니다    

고전 13:1-3

 


2024년 우리교회 표어가 사랑을 더하는 해입니다. 그래서 상반기 주일 말씀도 사랑에 관해서 나누려고 합니다. 다음 주에는 개강 예배가 있고 마지막 주에는 제직 임명이 있습니다. 제직은 물론 모든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더 나누어주고 더 사랑을 심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교회가 가진 사랑이 참 많습니다. 그 중에 하나 기억 되는 것이 있습니다. 아나벨 테일러 홀에서 친교할 때, 코닝에서부터 이타카 성도님들이 가져온 모양도 색깔도 사이즈도 다른 밥통들이 줄을 서 있는 모습입니다. 그렇다고 예전과 같은 친교를 하자는 말이 아니라 섬겨주시고 수고한 분들에 감사하다는 뜻입니다.

 

늘 성도님들께 고마운 것은 미국 교회를 사용하는 어려운 형편에서도 초대교회와 같은 사랑이 넘치는 친교가 우리 가운데 이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주님도 기뻐하실 줄 믿습니다. 오늘은 눈 때문에 한 주 늦었지만, 많은 분들이 준비해서 떡국을 먹게 되어 한 해가 든든할 것 같습니다. 섬겨 주시는 사랑에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신앙생활에서 사랑이 왜 필요한가에 대한 사랑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고린도교회는 은사가 풍성한 교회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문제 역시 많았던 교회이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서 바울 사도는 신앙생활의 중심에 사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첫째, 고전13:1절을 보면 방언에 관해 말합니다. 여기서 언급된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은 둘 다 방언을 말합니다. 사람의 방언은 행 2:5,7,8절을 보면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유대말을 합니다. 그런데 다른 나라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언어로 알아듣는 것을 말합니다. 한편, 천사의 말은 방언 통역이 없으면 알 수 없는 방언을 말합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는 이런 방언의 은사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이것들은 이방 신전에서 제물을 드릴 때 신들의 관심을 끌거나 귀신을 쫓는데 사용된 악기들입니다. 아무리 다양한 방언을 할지라도 사랑이 결여되면 생명력이 없는 무의미한 소리에 불과하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실체가 규명 되야 할 것 같습니다. 요일 4:7-8절을 보면,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하나님 그 자체가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사람에 대한 애정과 애착 이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관련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에게 가장 바라고 원하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들이 독생자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결국 사랑은 생명 구원입니다(3:16).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에 복종으로 이어지는 것이 사랑입니다. 아무리 방언을 해서 신령한 사람처럼 보일지라도, 영혼 구원을 위한 복음을 한마디도 전하지 못한다면(사랑이 없다면), 내 방언은(신앙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방언을 해도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생명력 없는 소리만 내는 신앙에 불과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방언은 필요 없다는 것인가요? 다음 장에 방언의 유익에 대해 말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남들이 못하는 것을 나는 한다는 자기 자랑과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하게 살아가는 고린도교인들에 대한 바울 사도의 경고입니다

 

사랑이 필요한 신앙생할의 영역 한 가지만 더 살펴 보려고 합니다. 3절을 보면, 내가 가진 전 재산으로 남을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순교자가 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희생하는 분들이 있다면 우리 시대의 영웅으로 간주됩니다. 어떻게 사랑 없이 이런 엄청난 일들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행동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 사람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은 잘한다 귀감이 된다고 칭찬합니다. 본인 스스로도 의미 있는 일을 해서 너무 기쁘고 만족스럽습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인간은 사람의 속을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마음을 살피십니다.

 

그분 앞에 판단을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성도님들은 내 시간과 물질을 다 드리고 몸까지 희생하는 봉사와 섬김, 과연 하나님이 인정해주신다고 확신할 수 있으십니까? 힘을 다해 희생하고 헌신까지 했는데 정작 자신에게는 유익이 없다면 왜 합니까? 남을 위해서요. 그게 진정한 희생과 사랑 아닙니까? 라고 반문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니라고 하네요. 혼돈스럽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사랑 없이도 그런 일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1) 의무감입니다. 제직으로 맡은 직분이라는 의무 때문에 헌신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일수록 사람과의 관계나 다른 어떤 이유로 불편한 상황이 생기면 재미가 없다는 소리가 나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교회는 섬기기 쉬운 곳이 아닙니다. 잘해도 불평이고 못해도 꼬투리 잡히는 곳입니다. 간혹 일 많이 하시네요라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의무감으로 하고 있는지 자신들을 점검해야 합니다. 그때는 잠시 쉬면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회복되어야, 사랑이 있는 희생과 헌신으로 다시 그리고 평생 헌신하며 나아갈 수 있습니다.

 

목장지기들도 3년 이상을 하면 내려 놓고 잠시 쉬라고 말씀 드리는 이유입니다. 다른 부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주의적 의무감을 철저히 버리기를 원합니다. 모든 일에 자원하기를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2) 자기 만족입니다. 교회 일을 하면 내가 즐겁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듣기에는 좋게 들리지만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주의 일은 내가 좋아서가 아니라 감사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 같은 죄인에게 사랑을 베푸시고 구원을 허락하신 은혜에 감사가 생기면, 내 몸, 물질, 시간까지 던져 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가장 기본적으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세례 받은 분들을 제직, 성가대원, 교사 등으로 섬기게 하는 이유입니다.

 

3) ‘어쩔 수 없이봉사하고 섬길 수 있습니다. 교회는 사람이 늘 부족해서 어쩔 수 없이 섬기기도 합니다. 위의 경우와 달리 이 경우는 너무 멋진 이야기를 성경은 들려 주고 있습니다. 15:21절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갈 때 힘이 없어 넘어지고 쓰러집니다. 그때 길 가는 구레네 사람(리비아) 루포의 아버지 시몬을 잡아 억지로 죄인도 아닌데 십자가를 메게 합니다.

 

16:13절을 보면, 훗날 시몬의 아들 루포와 아내가 예수를 믿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맡겨 주는 그 자리를 억지라도 맡다 보면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될 줄 믿습니다언제, 어떤 경우에 주의 몸된 교회를 섬길지라도, 십자가 구원의 은혜를 체험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그 사랑을 가지고 생명 다하기까지 나아 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