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3): 온유합니다   

고전 13:4

 


고린도전서 13장을 중심으로 15가지의 사랑의 속성에 대해 하나씩 나누고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두 가지를 구별하기 힘들긴 합니다. 하지만 오래 참음은 겉으로 잘 나타나지 않는 내면적인 측면이 강조 됩니다. 한편 오늘 나누게 될 온유함은 겉으로 드러나는 특성이 강하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성경이 말하는 온유가 무엇인가에 대해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첫째, 구약의 민12: 3절을 보면, 하나님은 모세를 향해 온유하다고 부릅니다. 히브리어: ‘아노이고 개역개정은 온유, 공동번역, 새번역, 현대인의 성경은 모두 겸손으로, KJV: meek, NIV NASB: humble로 번역합니다(부드러워졌다).   

 

둘째, 5: 5절에도 온유’(: 프라에이스, 현대인: 유순한, NIV KJV: meek)가 언급됩니다. 시대와 언어는 다르지만 두 곳의 온유는 겸손한 사람의 태도를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말씀을 잘 듣고 길들여진 유순함을 의미합니다. 게다가 둘 다 받는 복의 결과도 같습니다. 5:5절에서 온유한 자의 복은 땅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온유함이 뛰어난 모세 역시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먼 훗날 모세가 유대 땅 변화산에서 예수님과 함께 나타납니다. 바로 그 장소가 구약 시대의 가나안 땅입니다. 시대와 사람들이 달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복은 땅을 기업으로 받는 것을 공통으로 보게 됩니다.  

 

온유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실제적으로 땅이 주어졌습니다. 하지만 기업이라는 땅의 영적 의미는 영원한 생명을 허락 받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언약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온유한 성도들에게 허락되는 땅은 구원받는 그 순간부터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하는 천국을 의미합니다.  

 

셋째로, 오늘 읽은 고전 13:4절에도 온유가 나옵니다. 8복에서 언급된온유와는 다른 헬라어(크레스튜에타이)를 사용합니다. 개역개정을 제외한 새번역 공동번역 현대인의 성경은 친절, NIV, KJV, NASB ‘kind’ 로 번역합니다. 여기 온유는 어떤 의미일까요? 1) 다른 사람을 부드럽게 대하는 친절을 의미합니다.

 

2) 상대를 편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우리가 상대하는 대상이 사람도 있지만 하나님도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을 편하게 하기 위해 무조건 친절만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친절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을 위해 신중하게 책망하는 것 역시 친절이며 온유함입니다.

 

예를 눅 13:14-17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자를 치유합니다. 이 모습을 보고 회당장이 잘못 되었다고 분을 냅니다15절에서, 예수님은 그때 정말 듣기 싫어하는 외식하는 자들이라는 말까지 단호히 사용합니다. 17절에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반대하는 사람이라고 예수님은 밝히고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태도는 그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주님의 태도만 보면 친절하다고 말하기 힘듭니다. 그렇다면 온유함이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불편해도 하나님 말씀에서 벗어난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잘못을 알려주고, 신중하게 책망하는 것까지 포함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측면이 내포된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아이가 위험한 것을 손에 들고 있습니다. 아이의 마음 상하지 않도록 그냥 방관할 수 없습니다. 처음에는 부드럽게 말할 것입니다. 계속 이해하지 못하면 무서운 일이 벌어질 것을 설명해 줄 것입니다. 그래도 고집부리면 마음이 상해 울지라도 빼앗는 것이 그 아이에게 친절입니다

 

온유는 친절을 의미합니다. 친절은 상대를 편하게 해야 합니다. 편하게 하는 상대는 하나님이 더 우선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다면, 사람과의 불편한 관계는 감수해야 합니다. 사람 보다는 하나님의 마음이 불편하지 않도록 책망도 할 수 있는 것이 온유함의 본질입니다.  

 

남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사람에게 친절하고 하나님도 기뻐하는 온유를 어떻게 실천 하느냐입니다. 상대를 편하게 하려면 마음이 상하지 않아야 합니다. 쉽지 않습니다. 누가 칭찬도 아닌 지적이나 책망을 들으려 하겠습니까? 당신이나 챙기시오! 당신이 바울이야 예수님이냐? 따질 것입니다.

 

관계가 불편해 질 것을 알고도 그렇게 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권위를 부여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대개 부모나 리더가 그 일을 담당하게 됩니다. 진정 사랑하면 또 권위를 부여 받으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의견 권고 책망을 할 때 먼저 나를 살피는 것이 필요하겠지요.     

 

또 나와 다른 것을 보고 의견을 제시하거나 지적할 때 이왕이면 상대가 하고 있는 일을 함께 하는 사람이 하면 더 좋겠지요. 한번도 참여도 안 해본 사람이 실타래처럼 얽힌 상황을 어떻게 잘 알 수 있겠습니까? 이럴 경우 상대는 남이 잘 하고 있는 것을 시기하거나 질투하거나 반대 한다고 생각하기 쉬울 것입니다.

 

가정에서 부부도 보면 내 생각대로 하면 잘 될 것인데 왜 안 하느냐가 다툼의 원인입니다. 교회에서도 주의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분들이 실수를 할 때 위로와 격려는 겉치레로 하고, 잘못을 지적하고 실수를 따진다면 친절에서 먼 행동입니다. 주님이 원하는 온유는 아닙니다.    

 

나도 그 자리에 서게 되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칭찬만 듣지 못할 수 있어라고 한번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세상과 교회는 다릅니다. 우리를 불러 일을 하게 하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입니다. 성도는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 사랑에 감사하고, 주님의 흘린 보혈에 보답하기 위해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를 향해 나아가는 방향은 같지만, 예배 교육 선교 친교의 영역에서 다르게 섬길 수 있습니다. 생각과 역량과 환경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섬김의 자리에 설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 때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내 허물을 보고, 아버지의 마음으로 기다려주는 친절한 모습을 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성도는 이웃을 친절히 대하고, 신중하게 상대를 배려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편하게 해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마음을 최우선으로 품고,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을 친절하게 대하셨습니다. 온 성도가, 특별히 오늘 임명 받은 제직들이 예수님의 온유한 사랑을 닮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