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6): 교만하지 않습니다
고전 13:4
사랑의 속성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고전 13:4절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는 것이라 말합니다. 오늘은 교만에 대해 나누려고 합니다. 교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이나 재산 지식이나 외모 등을 바탕으로, 남들 보다 낫고 그들 위에 있다고 스스로
자신을 높이는 것입니다.
이런 교만이 개인이나 공동체에 있을 때 빨리 뿌리째 뽑아야 합니다. 첫째 이유는 결국 자신에게 피해가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그 대가는 외로움입니다. 교만한 사람 옆에 사람들이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동서고금을 물론하고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귀히 여기는 사람들 주위에 사람들이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금욕과 거룩한 삶을 자랑했던 바리새인들, 서기관, 제사장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창녀와 세리들을 죄인이라고 부르며 멀리했습니다. 마 11:19절을
보면,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주님을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예수님을
더 따르고 존경했습니다.
본인 스스로 받는 상처의 차원을 넘어 성도가 교만하면
전도가 이루어지겠습니까? 나를 무시하는 거만한 사람이 전하는 복음이 어떤 가치를 발휘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세상 사람이 교회에 발이라도 들여 놓으려 하겠습니까? 예수
믿는 성도가 세상 사람들보다 더 겸손하면 믿지 않은 분들에게 복음 전하기가 훨씬 수월해질 줄 확신합니다.
둘째, 교만은 나신뿐 아니라 많은 사람을 죽음과 멸망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잠 16:18절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던 날이 1912년 4월 14일입니다. 4만 톤이 넘는 무게와 길이가 269미터 폭 28미터에 달하는 초호화 여객선이 영국을 떠나 첫 항해에서
침몰한 날입니다.
침몰 이유는 여러 가지일 것입니다. 글을 읽다 눈에 들어온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항해 5일째 되는 날 ‘빙산이 내려오고 있으니 방향을 바꾸라’는 무전을 6회 정도는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항해사와 선장은 자신들이 탄 거대한 배를 너무 신뢰하고 이를 무시해 버립니다. 결과는 수많은 인명을 앗아간 참혹한 죽음과 침몰이었습니다.
셋째, 교만이 내게 없어야 하는 이유는 가장 큰 악이기 때문입니다. 시기와 자랑은 부정과 긍정의 양면성을
가집니다. 나에게는 없다는 것에서 생겨난 것이 시기입니다. 비록
시기로 시작할지라도 더 자신을 개발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습니다. 자랑 역시 자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자존감을 높여줄 수 있고, 남들을 기쁘고 즐겁게 하는 활력소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만은 어떤 긍정적인 면을 찾을 수 없습니다. 교만의 극치를 보여주는 사14:13-14절을 보면,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같아지리라 하는 도다.” 하나님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최악인 것입니다.
‘나는 이 정도는 아니지 그러므로 안전해’ 라고 생각하는지요? 히틀러나 뭇솔리니 스탈린 같은 사람들이지. 아니면 저 북한에 있는
김정은 같은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하는지요? 아닙니다. 아주
가까운 우리 공동체 내에도 있을 수 있고, 그 주인공이 바로 나 자신일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내가 교만한 사람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1) 타인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대상이 부모든 자식이든 친구이든 목회자이든 성도이든 지금 내 눈에 누군가가 부족한 사람으로 보인다면 교만한 마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내가 무시하고 말도 안 하려고 하는 그 사람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긴다는 사실입니다.
2) 교만한지 알기 위해서는 위로와 격려가 내 입술에 있는지
확인해 보기 바랍니다.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원래 말이 적은 분들이 오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격이 내성적이거나, 실수 안 하려고 하든 또 다른 이유로 말은
적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말을 적게 하더라도 늘 긍정적이고 칭찬하는 말은 많이 할 수 있습니다.
말도 많이 안 하는데 그 적은 말 가운데에서도 위로와 격려와 칭찬을 찾아 볼 수 없다면, 스스로를 한 번 살펴 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겉 모습만 보고
또는 말이 많고 적고에 따라 교만한지를 평가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외모나 말의 양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사람의 말에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느냐를 더 보시는 분입니다.
교만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직시하지 못하게 합니다. 주위의
상황을 판단하는 것까지도 무디게 만듭니다. 결국 파멸에 이르게 합니다.
스스로 교만한지 말씀에 비추어 점검해 보고 교만이 내 삶에 자리잡지 않도록 늘 경계해야 합니다. 이제
이런 교만으로부터 탈출해야 할 시간입니다. 어떻게 교만을 털어 버릴 수 있을까요?
먼저, 교만이
가져다 줄 파멸을 좀 두려워하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사 14:15절을 현대인의 성경으로 보면, “너는 지옥의 가장 깊은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교만을 싫어하는
가를 알 수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을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는 지옥의
맨 밑바닥까지 낮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른 방법은, 나를 너무 과대 평가해서 과신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이런 마음의 자세로 살아 가시기 바랍니다. 한 번 저를 따라 해 주기 바랍니다. ‘나는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입니다. 나는 작은 항아리 같이 한계가 있습니다.’ 나의 연약함을 알고 나의
한계를 인정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겸손을 쏙 닮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은 일생을
통해 높은 자리에 앉은 적이 없습니다. 이 땅에서 죄인들을 섬기다 저와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그 섬김을 아는 성도라면, 우월감을 가지고 타인을 대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닮기를 원하는 성도라면, 늘 십자가 앞에서 나를 바라보고 스스로 높아지려는 교만을 꺾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싫어하는 교만은 자기 스스로를 높이는 자기숭배이기에 철저히 버려야 할 죄입니다. 교만이 쏙 빠져 넘어짐과
패망이 아닌, 생명과 형통함이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