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9): 성내지 않습니다  

고전 13:4-5

 


삶에서 알고는 있지만 잘 실천되지 않는 것 중 하나가 성내는 것입니다. 화가 날 때를 살펴보면 자신의 중요한 것들이 침해 받는다고 생각될 경우입니다. 나의 권리가 박탈 당하거나, 누가 내 자존심을 건드릴 때, 내 물건에 남이 손을 데는 경우나, 시간 약속을 잘 안 지킬때, 내 뜻대로 안될 때 화를 냅니다.

 

특별히 공동체 생활에서 구성원 간에 생각이 서로의 기준에 맞지 않을 때를 좀 살펴 보려 합니다. 어느 공동체나 있는 일입니다. 문제는 누구든지 생각이 자기 중심적이면 상대가 잘못된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보가 없습니다. 좀 더 심한 경우는 의견을 제안하는 쪽과 제안을 수용하기 힘든 두 상대가 서로 화가 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공동체이든 원활한 운영을 위해 구성원간의 최소한의 약속들을 세우고 시작합니다. 이 경우에 리더는 전체 공동체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구성원들 개인 생각들이 작동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곤 합니다. 또 리더가 책임을 잘 수행하도록 세상은 물론 교회도 권위를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먼저 고전 13:5절에서 사용된 성내다’(파록쉬노)의 의미부터 보려 합니다.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이 의미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어떤 자극에 의해서 생겨난 내면의 감정이 외부로 격분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 단어에서 발작이나 감정의 폭발을 의미하는 파록시즘이 파생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랑은 성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분한 감정이 내 속에 있긴 하지만 그것을 말이나 행동으로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이기에 화나는 감정이 있습니다. 하지만 내 속에서 일어나는 화와 그것을 밖으로 표현하며 성내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라는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분이 있는데요. 바로 바울 사도입니다. 그는 유대인으로 태어나 유대교를 추종했습니다. 그런데 어는 날 예수를 만나 주를 따르는 사람이 됩니다. 이때부터 배교자라는 타이틀과 함께 유대인들로부터 메를 맞기도 하고 돌에 맞아 거의 죽을 뻔 하고 살해 위협까지 받게 됩니다. 이쯤 되면 화가 날 만합니다.

 

하지만 그는 성내지 않았습니다. 12:14절을 보면, 오히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까지 말합니다. 그들을 향해 성내기 보다 축복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그렇게까지 화를 참는 이유가 궁금해 집니다. 통제되지 않는 분노는 우리를 범죄하게 만들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 예가 바로 가인입니다.

 

동생의 제물은 하나님이 받아주고 자신의 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자 몹시 격분하게 됩니다. 그는 결국 사랑하는 형제를 실제로 돌로 쳐 죽이는 살인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예수님을 3년이나 따라 다녔던 베드로 역시 예수님이 잡히는 순간에 화가 통제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제사장의 종의 귀를 칼로 잘라 버리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런 이야기는 나와 상관 없어요라고 말하는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일서 3:15절을 보면 좀 달라집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계신 우리 성도님들과는 무관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한가지 주의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입술로는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말은 한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자신들을 살펴 보기 바랍니다. 얼마나 교묘하게 남을 미워하는 감정을 드러냅니까? 인사는 물론 말도 될 수 있으면 안 하려 합니다. 가능하면 부딪히는 것 피합니다. 미워하는 사람을 그림자처럼 냉대합니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추진해 가는 일에 여러 이유로 아주 소극적으로 대합니다. 이런 것들은 또 다른 미워함이 아닐까요?  

 

이제는 화내는 것을 어떻게 제어하느냐를 나누어보려고 합니다. 1:19-20을 보면, “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20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첫째, 19절을 보면 성내기를 더디 하라고 합니다. 화내는 것을 한 템포 늦추라는 뜻입니다. 화가 나면 늘 내가 왜 화를 내고 있는지를 알고는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잘못된 동기로 화를 내고 있느냐를 반드시 따져 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나 보다 더 못한 사람이 칭찬을 받는 경우 자존심이 상해서 화가 올라오는 경우입니다.

 

또 회사에서 동료들에게 인사를 했는데 그 사람은 다른 사람과 인사를 나누고 있습니다. 나는 지나가면서 인사를 했는데 안 받아준다고 나를 무시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화 내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이런 경우처럼 내 중심의 생각에 사로잡혀 화를 내고 있다면, 스스로 조금만 생각해 보면 순간적으로도 멈출 수 있는 화라는 것입니다.

 

20절을 보면, 성내기를 더디 해야 하는 이유를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NIV“the righteous life that God desires”하나님이 원하는 의로운 삶으로 번역합니다. 현대인의 성경은 더 쉽게 하나님의 의로운 뜻이라 합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뜻은 믿지 않는 사람들의 영혼 구원입니다.

 

심하게 화를 내는 내 모습이 하나님의 크고 위대한 구원 계획을 망가뜨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에 대해 잘 아는 친구나, 특히 가족 전도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쉽게 성내지 않는 두 번째 방법은 내가 화를 내면 예수를 믿지 않는 분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방해가 된다는 것을 인식하며 사는 것입니다.

 

제 이야기를 하나 하려 합니다. 작년 여름에 두 여집사님이 교회에서 성도님들을 위해 2주간 의료 봉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첫 주에 저도 혈압을 체크했는데 너무 높은 치수가 나왔습니다. 그 다음 주에 한번 더 했습니다. 역시 너무 높다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놀랍게도 혈압이 정상입니다.

 

혈압을 낮추기 위해서 먼저 약부터 먹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혈압이 높은 이유를 나름대로 가만히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내 속에 화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화를 어떻게 콘트롤 할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으로, 화내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참 좋은 방법은 내 마음 밭을 갈아 엎는 것입니다.  

 

창조 시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감정마저도 타락으로 부패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마음 밭에 자라는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갈아 엎어 부드럽게 해야 합니다. 밭은 삽이나 트랙터로 뒤집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 밭은 어떻게 갈아 엎느냐는 것입니다. ‘기도입니다. 그냥 기도가 아니라 소리 내어 부르짖는 탄식 기도입니다.  

 

저를 가만히 보니 기도는 하지만 특히 팬데믹 동안 소리 내어 회개와 간구하는 것을 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작년 여름 이후 변한 것은 없습니다. 변한 것이 있다면 탄식의 기도를 다시 시작한 것뿐입니다. 이 기도를 회복한 후 마음이 새로워지고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 주셔서 화나는 것이 없어지고 저도 모르게 혈압이 정상입니다.

 

화 내지 않는 방법들을 세상도 많이 알려 줍니다. 하지만 내 심령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섞고 오래 동안 묵은 분노의 감정을 파내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부르짖는 탄식 기도는 다릅니다. 다른 것을 받아들이기에 조금도 여유 없는 내 마음을 새롭게 해 줍니다. 남은 사순절에 온 성도가 기도의 사람이 되어, 성내지 않는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