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을 받고 나아가라 
창 11:26-32

창세기 11:10-26절은 노아의 아들 중 셈의 후손이 열거됩니다. 이 족보의 끝부분에 ‘데라’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성경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기로 작정한 사람이 아브라함이 아니라 데라였음을 밝힙니다. 그런데 그 이유를 밝히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한 가지는 가정의 가장인 데라가 우르를 떠나자고 식구들에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대열에 참가하지 못하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하란은 일찍 아버지 데라 보다 우르에서 죽었다고 전합니다. ‘하란’이란 이름이 의미가 ‘산 사람’ 또는 ‘산이 많은’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산에서 어떤 변을 당해서 일찍 사망하지 않았나 상상해 봅니다. 

나홀 역시 이 대열에 동참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의 의미가 ‘화가 난 사람’ 뜻으로 미루어 보아 아버지 의견에 반대를 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더 가능한 이유는 당시 상당한 부를 우르에서 축적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니면 그런 부를 차지할 기회가 그때 그에게 주어졌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많은 세월이 지난 후 창세기 24장에 가서 하란으로 가는 야곱이 ‘나홀의 성’에(창24: 10) 도착하게 됨을 발견합니다. 아마도 이것으로 보아 그는 가족들의 대열에서 이탈하였다가 나중에 우르를 떠나 하란으로 옮겨가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곳에 나홀의 성이라 불리는 곳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나홀이 성을 소유할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창세기31장에서는 야곱이 삼촌 라반의 집에서 몰래 나오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때 한 가지 에피소드가 소개됩니다. 야곱의 아내인 라헬이 그 아비 라반의 드라빔을 훔치는 사건입니다(창31: 19). 그런데 이 드라빔을 가지고 있는 라반이 누구입니까? 성경은 그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나홀의 손자며, 브두엘의 아들로 소개합니다. 라반의 할아버지가 나홀이며, 나홀이 하란에 거주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또한 드라빔이 가정의 수호신이라면 상당히 오랫동안 그 가문에서 귀하게 여겼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리고 드라빔이 라반에게 있었지만 ‘누구로부터 전수되어 내려왔을까?’라는 질문을 던져 보면 재미있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정확히 답은 할 수 없습니다. 라반 자신의 대에서 그런 믿음을 가질 수도 있지만 그보다 훨씬 윗대부터 드라빔을 소유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위의 모든 정황들을 보면 나홀이 이 드라빔과 연관이 있습니다. 드라빔을 우상으로 간주한다면 우상과 관련된 뭔가를 통하여 부를 축적하였다는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 세 아들 중 아브람만이 아버지의 결정을 따르게 됩니다. 그의 아내 사래는 남편의 결정에 따를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조카 롯은 일찍 아버지를 잃은 이유로 인해 의지할 곳이 없는 상황에서 아브람을 따라 함께 떠났을 것입니다. 아니면 어린 롯에게 아브람의 설득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들이 없는 상황에서 후계자로서의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나홀을 제외한 가족들이 고향을 떠나지만 70년 이상 살아오고 자녀들이 태어나고 자라고 자신들의 삶의 터전이 있는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떠나가게 한 진정한 동기가 궁금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침묵하기에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분명 ‘지금 보다’ 그리고 ‘여기 보다’ 좀 더 희망적이고,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면 그곳에서 뭔가 새로운 일이 생길 거야’ 라는 기대감이 그들 모두들 자극 시켰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인간적인 결정에 의해서 데라는 가족을 데리고 가나안을 향해 떠났습니다. 그러나 하란에서 멈추고 그곳에서 정착하게 되고 그곳에서 일생을 마치게 됩니다(11:31). 왜 그가 목적지인 가나안을 향해 가지 못하고 중간에 머물게 되었을까요? 인간적인 생각으로 비록 떠나기는 했지만 그 인간적인 생각은 더 큰 도전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르는 메소포타미아에 속합니다. 가나안은 그 당시 다른 지역, 언어, 문화, 다른 사람들의 영역인 것입니다. 유프라테스강을 건너 가야만 자신이 살던 우르를 벗어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데라는 어느 정도 옮겨 갔을 때 너무나 먼 곳을 가기에는 그에게는 큰 도전이었습니다. 그래서 메소포타미아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중간 지역인 하란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곳에서 강을 건널지 아닐지를 계속 저울질만 하다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는 뒤를 돌아 보았습니다. 아직 우르에 남아있는 나홀을 생각하며 강을 건너가지 못했습니다. 이제 강을 훌쩍 건너 버리면 죽은 아들 하나와 살아있지만 보지 못하는 아들, 두 아들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란에서 머물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움직이지 않는데 어찌 아브람이 움직일 수 있습니까? 그래서 하란에서 하나님이 아브람을 다시 부르게 되는 이유입니다.  

데라가 머물렀던 하란은 고대근동의 교통의 요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바벨론, 지중해와 팔레스틴, 애굽 등으로 통하는 교차로였습니다(‘하란’이라는 지명의 뜻도 ‘교차로’이다). 차들이 교차하는 그곳은 오래 머물수록 위험한 곳입니다. 길을 가는 사람은 빨리 방향을 잡아 떠나야만 안전하게 됩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까지 상당히 먼 길인 반면, 가나안은 온 길에 비하면 절반도 안 되는 매우 가까운 거리입니다. 데라는 비록 가나안을 목적지로 우르를 떠났지만 도전이 없는 안전 지대에 머무르고 말았습니다. 

데라에게는 강 건너 가나안은 자신이 경험한 문화와는 전혀 다른 문화를 가진 곳입니다. 두려움이 그를 이곳 하란에 정착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란은 시간이 지나면 안주하고 싶은 곳입니다. 우리는 이런 곳에 들어설 때 두렵지만 도전이 있는 곳을 향해 멈추지 말고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데라와 아브라함의 차이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결정을 위해 기도하는 분이 계십니까? 결정은 안전한 곳이 아니라 도전이 있는 곳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곳이 더 도전이 있다면 이곳에 머무셔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곳에 더 도전이 있다면 그곳을 향해 떠나십시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무조건 도전이 있다고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약속을 하나님께로 받고 도전이 있는 곳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이 두 가지를 충족시켜야 합니다. 데라는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지 못함으로 인해 하란이라는 편한 곳에 안주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말씀이 주어질 때 그것을 붙잡고 도전이 있는 곳을(갈 바를 알지 못하고) 향해 나아가는 삶을 살아간 것이 차이입니다. 말씀이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비록 개인의 판단과 개인의 사정, 형편에 의해 떠나야 할 충분한 이유는 있지만 떠나지 마십시오. 데라처럼 도착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도전이 있어 보여서 가려고 마음을 먹는 곳이 있다면 떠나기 전에 약속을 받아 가시기 바랍니다. 약속 없이 가서는 안됩니다. 약속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금식하십시오. 분명히 성경에 쓰여진 말씀으로 약속을 주실 것입니다. 그냥 시간이 가기에 새해를 맞이하지 마시고, 새해이기에 새것을 해야겠다고 결단하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먼저 약속을 달라고 간구 하시기 바랍니다. 안 주시면 성경을 일독 하시기 바랍니다. 밤을 새워 읽어 가십시오. 그리고 허락하시면 새해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비전의 사람의 삶입니다. 믿음의 사람의 모습입니다.  약속을 붙잡는 사람은 미래를 붙잡는 사람입니다. 한 사람의 순종으로 인해 한 민족이 잉태하는 웅장한 파노라마를 창세기는 열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2015년을 조금 뒤에 보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다가오는 2016년은 말씀에서 주시는 약속으로 나아가는 복이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