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14): 모든 것을 바랍니다 

고전 13:4-7

 


시간이 빠르게 지나 학기가 마무리되고 이제는 학교 전체가 졸업식 분위기입니다. 다음 주 예배에 참석 못하고 이타카를 떠나시는 분들이 있을 것 같아 미리 축하 인사를 드립니다. 졸업하시는 모든 분들, 수고 많이 하셨고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 드립니다.

 

오늘은 지금까지 나누었던 15가지 사랑의 속성가운데 14번째 시간입니다. 고전 13:7절을 보면 사랑은 모든 것을 바란다고 말씀합니다. 바란다의 의미는 소망하는 바를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해서 기대한다는 의미입니다. 미래에 이루어질 긍정적 결과를 계속 마음에 품고 희망으로 산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훈련 받는 올림픽 선수들의 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매일 몇 백 번씩 어름 바닥에 넘어지는 실수와, 뼈도 부러지는 아픔을 겪습니다. 고된 연습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먼 훗날 자신의 목에 매달이 걸리는 그날을 기대하고 소망합니다. 그래서 바란다를 영어 성경들은 ‘hope’로 대부분 번역합니다.

 

인간은 새처럼 나는 것을 소망하며 비행기를 만들어 냈습니다. 쉽게 계산하는 기계를 구상하다 컴퓨터 시대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코로나로 전 세계가 고생할 때도 백신이 만들어질 것을 기대했습니다. 이처럼 세상도 꿈꾸고 바라고 살 때 언젠가는 이루어지는 현실을 맞이합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고 주 안에 살면서도 소망을 갖지 못하고 낙심하고 포기하고 있다면 당장 회개가 우선입니다. 성도가 주 안에서 불확실한 미래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현재 나의 삶을 활기 있게 만들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잘 안되고 안 풀려도 소망으로 내일을 바라 보아야 지금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실망하고 좌절하지 않기 위해 매일 반복하는 것이 있습니다. 기도를 마친 후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나아가는 자에게 힘과 용기의 상을 주심을 믿습니다라고 나의 고백을 올려 드립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죽음에서 살아나신 예수를 바라보며 십자가 앞에서 소망과 용기를 다시 회복할 줄 믿습니다.

 

미래를 바라보는 삶에 대해 한 가지 더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소망을 품는 삶은 어디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는가? 입니다. 인류는 긴 시간 동안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이 알지도 못하는 병과 전쟁으로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현실 속에서 생명에 대한 사랑이 기초되어 약과 의료기술을 개발하고 평화를 위한 꿈들이 생겨났습니다.  

 

결국 사랑이 없으면 소망도 없습니다. 눈 앞에서 연속으로 사고치고 게임에 빠져있고 성적도 엉망이고 꿈도 없는 자녀가 있습니다. 그 모습만 바라 본다면 부모는 소망을 갖기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기대 이하인 내 자녀를 품고 앞으로 괜찮아질 것을 기대하며 소망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죄로 인해 멸망 당할 인간들이 사망에서 벗어날 것을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독생자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 죽이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사랑 때문에 모두가 아버지 품에 안기기를 기대하십니다. 우리를 향하신 사랑 때문에 세상 마지막 날까지 기다려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성도는 이런 사랑의 하나님을 보며 인내를 배우고 소망을 키워가는 가게 됩니다. 부모가 바라는 대로 안 커주고 기대치 이하인 자녀들을 보며 답답해 하십니까? 어쩌면 과거 우리 부모님의 눈에 보인 과거의 자신의 모습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처음 이 땅에 태어났을 때 바라보았던 그 감격으로 그들을 품고 꿈을 꾸기 바랍니다.

 

짜증이 늘어나고 다툼만 생기는 부부들이 계신지요? 주 안에서 만나 사랑에 빠졌던 두 사람들입니다. 다시 한 번 미래를 꿈꾸며 서로를 쳐다 보기 바랍니다. 직장이나 학교나 교회에서 자신이 무시당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지요?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을 묵상해 보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 침을 뱉으며 수치심을 주었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뺨까지 맞으면서도 멸시를 참으셨습니다. 살면서 누군가로부터 상처받았다고 생각하는지요?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벌거벗겨졌습니다. 얼마나 큰 모욕입니까? 그 수치까기감당하며 십자가 형의 아픔을 버티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고 희롱하는 소리에는 얼마나 큰 상처를 받으셨겠습니까?

 

저들이 하는 것을 모른다고 말씀하시며 용서해 주셨습니다. 나만 교회에서 희생하고 일하는 느낌이 드는 분이 계십니까? 열심히 일하고 따르던 제자들이 주님의 곁을 떠났을 때도 주님은 자신의 사명인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골고다를 향해 홀로 걸었습니다. 주님은 언젠가는 변하게 될 소망을 갖고 제자들을 바라본 것입니다.

 

3:1-2절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숨기려고 했던 니고데모 역시 주님은 소망 가운데 바라보았습니다. 19:38-39절을 보면 놀라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밤에 몰래 왔던 니고데모도 이제는 당당히 사람들 앞에 서게 됩니다. 아리마데 사람 부자 요셉이라는 사람도 당당히 자신이 제자임을 밝히지 못하던 사람입니다.

 

그 역시 변합니다. 아직도 부활을 체험하지 못한 시점이었지만, 이들은 주님이 바라보았던 그 믿음대로 변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당당히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무덤에 주님을 모시게 됩니다. 12제자들 중에는 나중에 주를 위해 순교까지 하는 사람이 나온 것으로 알려 집니다

 

그들을 그렇게까지 변하게 만든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께 두 가지를 배우게 됩니다. 공회원이며 사람들의 존경까지 받으면서도 당당하게 주님을 찾지 못했던 니고데모를 품고 기다려 주는 마음입니다. , 제자라고 하면서 숨어 있던 아리마데 요셉을 비난하지 않으시고 그의 약함을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배신자 중의 배신자인 베드로와 주님 앞에서 벗은 모습으로 도망갔던 제자도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다시 일어날 수 있었고 주의 품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세상은 남에 대하여 저 사람은 어때라고 쉽게 판단하려고 합니다. 게다가 자신과 생각이 다르고 마음에 안 들면 정죄합니다. 관계를 멀리 합니다. 그리고 반대편에 서게 됩니다.

 

하지만 성도는 다릅니다. 최악을 최선으로 바라보는 사랑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선하게 이루어갈 소망을 주 안에서 품습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변합니다. 멀어진 부부나 자녀들이나 친구들이나 성도와의 관계 까지도 회복될 줄 믿습니다. 이런 도전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