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의 때(2):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벧전 1:15-22


 

초대교회가 품고 있었던 종말에 관한 신앙을 베드로 사도를 통해 살펴 보고 있습니다. 벧전 4:12절은 당시 교회가 처한 모습을 ‘불시험’이라 말합니다. 로마에서 일어난 대화재로 인해 닥쳐왔던 그리스도인들의 박해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지난 주는 이런 시련이 왜 예수 믿는 성도에게 오는가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답은 지금이 말세이고 마지막 때에 성도가 고난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말합니다. 말세에 있을 시련은 하나님이 계획한 시간에 나타나는 것이고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학생이 학기말에 기말 시험을 치고, 박사과정 마무리를 위해 마지막 디펜스를 통과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입학 전부터 이런 규정은 이미 정해진 것들이고 학생들은 입학 시에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세를 사는 성도들은 앞으로 있을 고난에 대해 산 소망을 가지고 장차 받을 유업인 구원을 바라보라고 합니다(3-5). 잠시 근심하지만 장차 받을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생각하며 크게 기뻐하십시오’(6-7) 라고 시련을 이기는 비결도 제시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베드로 사도는 불안과 걱정 속에 있는 성도들을 향해 3가지를 하나님이 주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로 외우면 좋습니다. 힘든 시간을 단축시켜 주시는 은혜를 주실 것이다. 불안하고 흔들리는 마음에 평강을 허락하실 것이다(1:2). 하나님은 성도의 구원을 보장해 주신다(1:5)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편지 서두가 마무리 되고 난 다음, 베드로 사도는 고난 받는 성도들을 향해 본론적인 주제를 다루기 시작합니다. 이미 예정된 시간을 살고 고난이 다가온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구체적인 지침을 들려 주기 시작합니다. 벧전 1:15절을 보면,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명령합니다.  

 

우리가 거룩한 자가 되야 하는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합니다. 16절을 보면 첫째 이유는, 성도를 부르신 하나님이 거룩하니 따르는 우리 역시 거룩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들리지만 현실적인 문제가 생깁니다. 인간은 거룩하지 않고 거룩해 질 수 없다는 너무 충격적이고 비극적인 사실입니다. 이미 타락했고 죄는 더해 가는데 정작 해결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벧전1:18-20절에서 인간이 상실한 거룩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준비한 계획(복음) 소개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창세전부터 흠 없는 어린양을 준비하셨고, 말세가 되어 그리스도를 대속물로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십자가 예수 보혈로 아담으로부터 인간에게 이어지는 죄를 용서 받게 하셨습니다.

 

이 믿음만 있으면 예수 안에서 성령으로 거듭나고, 내 속에 거룩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예수 믿으면 죄 용서함을 받고 더 이상 죄인이 아닌 의인이라는 신분으로 변화가 일어납니다. 죄인이 아니기에 당연히 감옥/지옥에 가지 않는 법적 상태가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거룩은 죄 없는 신분이나 상태를 말합니다(칭의).

 

한편, 거룩을 상태가 아닌 관계적으로도 설명이 가능합니다. 예수를 나의 구원자로 주님으로 고백하고 사는 사람은 예수를 닮기 원합니다(성화). 그리고 매일 일대일의 관계를 맺고 말씀에 순종하며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집중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거룩은 다른 어떤 것에도 눈을 돌리지 않고 오직 예수만 바라보는 관계입니다.

 

예수를 따라가다 보면 거룩을 방해하는 죄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를 따르는 성도는 자신의 죄된 모습을 합리화하지 말고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와 찬양으로 매일 주님과 관계 속에 있으면 너무 자연스럽게 성도의 착한 행실로 세상과 구분된 주와 동행하는 삶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확실히 해 두어야 할 3가지가 있습니다. 1) 세상 사람들은 죄를 용서해 주신 예수 십자가 대속의 구원을 믿지 않기 때문에 거룩 자체를 소유할 수 없습니다. 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불신자들 역시 자신들의 종교로부터 착한 행실을 배우고 선한 일들을 크리스천들보다 더 많이 실천하고 있지 않느냐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이 질문으로부터 2) 두 번째로 확실히 할 것이 있습니다. 세상도 사람들을 돕고, 법을 집행하고, 윤리와 도덕적 가치를 세우는 선한 행위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이 허락하는 은혜(일반)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없다면 세상은 평화롭게 유지될 수 없고 급속하게 멸망으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일반은혜로 구원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확실히 할 것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 중에는 다른 의도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착하게 보이는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좋은 의도로 선한 일을 하는 동안만은 죄를 짓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착한 행위 그 자체가 자신들의 죄가 없어지고 용서받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앞에서 다루었던 주제인 성도가 거룩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로 돌아갑니다. 17절을 보면,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는 두려운 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말과 외모에 속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행위를 보고 판단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거룩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마지막으로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어떤 기준으로 우리 행위가 거룩한지를 판단하실까요? 22절에 형제를 거짓 없이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거짓 없이는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 배우처럼 연기하듯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다른 의도가 아닌 사랑 그 자체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뜨겁게 사랑하는 것’(공동: 충심으로 열렬히)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말로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고 고난의 십자가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시간이든 물질이든 내가 남을 위해 할 수 있는 최고의 정성과 온 힘을 다하는 모습이 되어야 하겠지요.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거룩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의 피가 죄 없는 상태의 거룩을 맛보게 합니다. 주님과의 관계만이 우상이 아닌 예수만 바라보는 거룩한 삶을 살게 만듭니다. 사람을 판단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세상과 구별된 거룩이 모든 행실에서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