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의 때(3):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벧전 2:11-12

 

 

성도는 힘들고 어려운 고난이 다가올 때 조심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과관계를 상실하지 않는 것입니다. 불쑥 힘든 일이 생기면 나도 모르게 원망도 생깁니다. 또 힘든 일에 집중하다 보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질 수 있습니다. 이 틈새를 타고 사탄은 믿는 성도의 거룩을 무너뜨리기 위해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해 본 경험이 있는 베드로 사도는 고난이 닥쳐올 때 거룩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 하나를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벧전2:11절을 보면,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는 것입니다. ‘제어한다는 멀리하고(, ), 이기십시오(), abstain(NIV, KJV, NASB) 등으로 번역하는데 조심하고 그만 두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육체라는 말은 육체로부터 만들어진, 인간적인, 세속적인이라는 뜻입니다. 마음의 안정이든 즐거움이든 하나님 밖에서 얻으려고 하는 모든 것들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정욕은 복수형입니다. ‘욕구, 바라는 것, 욕망등입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정욕 1) 하나님 밖에서 만족을 얻으려는 인간의 욕망들을 의미합니다,

 

같은 절에서는 2)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것이라 말합니다. 거듭난 성도가 새로운 의지를 가지고 싸워야 하는 과거의 나의 죄된 모습들입니다. 단지 육체적인 성적 쾌락뿐만 아니라 나를 지배하는 세상 가치관과, 지금 따르고 있는 시대사조 등입니다. “하나님 자리를 훔치고 인간 스스로 만들어낸우상() 들입니다(팀 켈러).

 

3) 영적 의미로는 직접 계시를 받는다는 주장으로 진리를 왜곡하고 말씀을 부인하려는 이단세력들의 불순종하는 악한 마음입니다. 4) 하나님이 허락해 주시는 평강보다 사주를 보고 점쟁이를 찾아가 만족함과 복을 추구하려는 미신적인 신앙입니다. 5) 말씀에 어긋난 삶임을 알고도 고집하는 성도의 교만한 자아 등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왜 육신의 정욕을 제어해야 합니까?

첫째, 1:15절에 의하면, 욕심이 자라 죄가 되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속에서 욕심을 유발시키는 미끼는 우리에게 절대 나쁘거나 해가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유혹은 늘 재미있다, 몸에 좋다, 마음이 편해진다는 말로 다가옵니다.

 

둘째, 벧전 5:8절에 의하면,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돌아다니며 삼킬 자를 찾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좋아하는 먹이 감은 바로 육신의 정욕으로 가득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개인적 관계에서 이탈한 먹이 감은 가장 먼저 사탄의 타켓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벧전 2:12절을 깊이 묵상해보면, 성도가 육신의 정욕대로 살면, 세상의 비난거리만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생각에 옳은 대로 살려고 하는 모습이 정욕에 따라 사는 삶입니다. 말세에는 말씀에 순종하기 보다 개인의 신앙해석이 더 힘을 얻고, 함께 하는 공동체생활 보다 개인 중심적 신앙생활이 강해질 것입니다.

 

지금 교회들은 사람 마음에 안 들면 하나님도 멈추어야 하는 형편에 있습니다. 말씀대로 살라는 소리는 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삶이 대립되고 있습니다. 온전한 순종보다 선택적 순종이 늘고 있습니다. 말씀을 따르지 못하는 자신의 이유와 내 형편을 이해해 달라는 요구가 더 많아 지는 것은 말세를 살아가고 있는 증거입니다. 이렇게 살고 싶습니까? 이렇게 사는 것이 맞습니까?

 

지금 보다 조금만 더 잘 살고, 지금 가진 것 보다 조금만 더 있으면 될 것 같습니다. 그것이 지위든 돈이든 명예든 쾌락이든 지금 보다 더라는 생각이 들면 다음은 그것을 추구하기 위해 바쁘다는 말을 많이 듣게 됩니다. 그 다음은 서로의 바쁜 삶을 이해하는 시간을 지나 자녀 부모 하나님과의 모든 관계에서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사탄은 너무 지혜로워 이 때를 노리는 것입니다. .

 

열심으로 살고 바쁜 가운데도 섬기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근본적인 것입니다. 잠자는 것을 포함해 사용하는 모든 시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 맞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나아가 반드시 그분 앞에 드러내어 말씀을 듣고 배우고 기도하고 찬양하는 시간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시간이 점점 줄고 있다면 자기 중심적으로 살고 있는 표시가 될 수 있습니다

 

좋은 소식은 베드로 사도가 육체의 정욕을 제거하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멸망으로 이끄는 욕심을 제어하는 방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 역시 결혼해서 아내와 같이 순회전도자로 살았습니다. 커 가는 아이들 때문에 정착하고 싶고 좀 더 편히 살기 위해 믿음 버리고 살고 싶었지만 베드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11절은 나그네의 삶이라고 합니다. 나그네는 이 땅보다 본향을 사모하는 마음이 더 큽니다. 그래서 지금 보는 것들과 비교하고 더 누리고 싶은 욕심이 우리 발목을 족쇄로 묶어 두지 않게 합니다. 선교지에 가면 유혹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당도 자녀들 교육관도 없는데 여기 신경 써는 것 맞아? 이 생각입니다.

 

하지만 늘 이 욕심을 물리치고 때로는 있는 불평을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은 다 하늘로부터 받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손을 펴서 내게 주신 것을 이웃을 위해 나누고 더 줄 때 하나님께로 받을 복이 더 예비되어 있다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나그네는 시간과 재능 물질과 건강을 사용하여 땅의 어카운트가 아닌 하늘에 보화를 쌓는 투자법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 내 것도 아니라면, 주인 되신 주님이 기뻐하는 곳에 사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그네로 사는 성도가 잊지 말아야 할 축복의 원리입니다. 세상 정욕을 이기는 비법이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는 잠시 살다가 영원한 내 집으로 돌아가야 할 나그네입니다. 나그네로 사는 것은 나의 옛 자아가 추구하던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고 진정한 기쁨을 주안에서 누릴 수 있는 이 땅에서의 유일한 삶입니다. 예수 안에서 거듭나서 새로운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나그네의 삶을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