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의 때(4): 두 가지 고난이 있습니다
벧전 3:14-15
베드로전서를 통해 종말의 때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고난에 대해 많은 것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성도들이 겪게 될 두 가지 고난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먼저, 벧전 2:20(3:17)절에 의하면, ‘선을 행하다가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또 벧전 3:14은 ‘의를
위하여 받는 고난’이 있음을 알려 줍니다.
벧전 4:15절에 의하면, 당시 세상에는 살인이나 도둑질과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며 살아가는 삶이 만연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남의 일을 간섭하며 사는 자’는 단순히 남의 일에 말 참견하는 것을 넘어 ‘남의 돈을 남용하거나 착복 또는 횡령하여 실제 금전적 피해를 끼치는
것을(사기: 공동번역) 말합니다.
로마로부터
많은 세금에 시달리고 제국이 벌이는 전쟁에 끌려가서 살아야만 했던 사람들의 반사회적이고 반도덕적 생존 모습입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도 성도들은 벧전 2:1절을 보면, 모든 악한 생각(악독)과 속임수(기만)와 위선(외식)과 시기와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세상과는 구별된 삶을 살았습니다.
고발하고
사자 밥에 넘겨주는 이웃을 용서했고,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오히려 기도했습니다. 벧전 3:8-11절을 보면, 어려운
이웃을 동정하며 고난 당하는 형제의 처지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않고 복을
빌어 주며 세상과는 거꾸로 살았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성도들의 이런 모습은 정말 특별한 삶이었습니다.
주인일지라도
천한 종의 생명들을 사랑하며 악한 말을 그치고, 종일지라도 주인을 속이지 않고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서로 화평을 추구하며 이웃들에게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간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의 선행의 실천은 누군가를 감동시켰고 세상을 변화시킬 역동적인 힘이 되었습니다.
한편, 이런 모습을 보는 로마 사람들은 자신들의 종으로 사는 사람들이 더 높은 도덕적 기준을 갖고 선한 행위를 하며 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정복자로 자신들의 문화가 우위에 있다는 자존심도 상했을 것입니다. 비방거리를 찾게 되고, 미워하는 마음이 쌓여가자 재산을 몰수하고
생명을 빼앗는 박해로 이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편, 벧전3:14절은
말세에 성도들이 당할 고난을 하나 더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받게 되는 의를 위하여 당하는 고난입니다. 당시 로마는 속국의 정치와 종교에 대해 관대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한편, 벧전 2:13절을 보면, 교회는
인간의 모든 제도와 심지어 자신들을 다스리는 왕에게 순종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를 위하여”라는 조건이
붙습니다. 이로 인해 성도들은 로마 제국이 섬기는 신들을 거부합니다.
그리고 황제숭배에 대한 저항이 일어납니다. 로마 제국의 입장에서 성도들의 이런 행동들은
자신들의 신들이 가져다 준 평화와 번영을 위협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또 황제 숭배 거부는 제국에 대한 불충과 반역인 것입니다.
게다가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자유를 누리고 살아갈 수 있다는 성경적 가르침은 대단히
도발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세상 가치관을 무너뜨릴 위협적인 요소로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로마 사회의 근간을 이루고 있던 노예들과 하층민들을 미혹해서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로마제국은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을 잡아 피를 마신다(성찬). 어린 아이를 잡아 먹는다는(유아세례) 소문을 내면서 핍박으로 몰아갔습니다. 게다가 인적이 드문 장소나
밤에 모이다 보니 세상 사람들과 관계를 거부하는 반사회적 집단으로 몰았습니다. 그리고 모임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박해를 가했던 것입니다.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살았던 베드로 사도입니다. 벧전 3:14절에서 생명까지도
내 주어야 하는 고난이 왔을 때 성도는 어떤 모습으로 그 시간을 대해야 하는지를
말해 줍니다. 좀 당황스럽고 놀라운 말이 들려 옵니다. 1) ‘예수 때문에 고난을 당하면 오히려 복 있는 사람(행복한 사람)으로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고난 가운데 ‘나는 행복합니다’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당연히 겁나는 일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근심할 시간에 근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벧전 4:
14절을 보면, 예수 이름으로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의 영광의 영이 우리 위에 계시기 때문이라
말합니다. 주님이 주는 고난임을 확실히 구분할 수 있는 증거라고 믿습니다.
2) 베드로 사도는 3:15절에서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라고 당부합니다. 사람이 거룩해지는 방법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온전히 믿고 예수만이 구원자임을 입술로 고백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가 신신당부하는 것은 고난 가운데서도 믿음을 견고히 해서 배교하지 않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3) 우리 속에 있는 소망에 대해 묻는
사람들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라고 합니다. 예수 믿으면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이 하늘로부터 주어집니다. 바로 천국 소망입니다. 그곳에는 아픔도 눈물도 사망이나 마음 상하며
우는 일이 없습니다(계21:4). 하나님과 영원을 살아가는
소망을 세상에 전하라는 뜻입니다.
우리보다
앞선 믿음의 선배들은 고난 가운데도 선한 행실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예수로 핍박당하는 그 시간을 전도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이런 성도의 삶은 억압 당하고 노예로 살아가던 사람들과, 사회에서 천대받던 여성들에게 예수가 주인 되어 사는 공동체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삶의 전환이 일어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우리 안에서 서로 챙기고 나누는 사랑을 넘어 울타리 밖으로 나가는 선행이 더 있으면 좋겠습니다. 벧전 2:21절에 의하면,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먼저 고난 가운데도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주의 발 자취를 따라 오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결국 하나님
뜻대로 삶지 못하면 이 세상은 전혀 그리스도인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이 땅에서 천국을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는데 죽음 이후에 가게 될 천국을 우리가 말해도 이해하겠습니까? 결국 성도가 세상에서
선행을 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 땅의 사람들이하나님의 사랑과 천국의 기쁨을 맛보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마무리를
하려 합니다. 마지막 때에 우리를 연단하기 위해 잠깐 오는(1:6) 시련은
이상한 일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4:12). 오히려 예수의 고난에 참가하는 축복입니다(4:13). 주님 다시 오실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로 우리에게 되돌아 올 것입니다(1:7). 세상에서 선한 일을 하며 예수
때문에 고난 받을지라도, 예수 때문에 다시 기뻐하기를(1:6,
4:13)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