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복(5): 첫 단추 아침 기도
시 5:1-3
개강 후
2주가 지났습니다. 이타카에 오신 분들은 마음도 안정되고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해 가기를 바랍니다. 지난 주에 전교인 가족 수련회도 은혜 가운데 잘 마무리 되었습니다. 서로 알게 된 관계들을 이어가시고 형편을 살피고 관심과 기도로 남은 2024년을
달려 가기를 바랍니다. 오늘부터
다시 시편의 말씀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시 5:3절을 보면, 기도하는 사람에게 응답해 주신다는 말은 부담이 없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도에 ‘아침’이라는 말이 들어가면 조금은 부담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아침에 기도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이것을 보면서 한가지 배우는 것은 성도는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확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 5:1절 상반부를 보면 다윗은 하나님께 ‘내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라고 호소합니다. 그를 이렇게 아침부터 부르짖게 만들었던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정확하게 그가 어떤 상황에 처했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응답해 주지 않으면 안 되는 정말로 긴박하고 절망스런 상황이 기도의 자리를 찾게 만드는 첫째 이유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형편은
심각했습니다. 주변을 둘러 볼 때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 속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시 5:5절에는 오만한 자들과 악을 행하는 자들에 들러 싸여 있습니다. 시 5:6절을 보면 거짓말하고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서로
합작하여 자신을 속이고 생명까지 빼앗으려 합니다. 답도 없고 아무도 도울 수 없는 상황에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는 기도합니다.
성도님들
삶은 어떠신지요? 문제 없는 분은 없을 것 같습니다. 상한
마음이 있습니다. 눈만 뜨면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몰려 옵니다.
왜 그렇게 안 풀리고 절박한 것들은 또 많습니까? 내 삶에 힘들고, 마음 상하고, 지치고 아파하는 것들이 있다면 함께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왜
함께냐? 묻는다면 마 18:19절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신의 형편 때문에만 기도하러 나온 것이 아닙니다. 둘째, 시 5:1절 후반부를 보면 ‘하나님은 ‘내
심정을 헤아려 주시는 분’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신에게 있는 고통스런 문제들을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
이해 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사람은 말해도 못 알아 듣지만, 오직
하나님만은 알아 주신다는 확신입니다.
시 5: 2절을
보면 다윗은 이런 ‘하나님을 나의 왕’이라 부릅니다. 고대 왕들은 백성을 보살피고 아픔을 헤아리는 사람입니다. ‘헤아린다’는 말은 한국 사극을 보면 신하들이 왕 앞에서 가장 많이 하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하나님만이 예리한
통찰력으로 내 사정을 분별하시고 해결할 분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기도의 자리에 설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8절에 의하면 그가 기도했던 이유는 험한 세상에서 의롭게
살기 위해서 입니다. 9절처럼 세상은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서 진실을 빼앗아가고, 심중에는
악을 품게 하고, 먹고 살아야 하는 현실 앞에 무릎 꿇게 만듭니다. 그래서
악을 이기고 거룩하게 살기 위해 7절을 보면 아침부터 주의 집을 찾아 기도하는 예배자가 됩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풍성한 사랑’을 허락합니다. 남들 가지 않은 길을 선택하고 조금 손해 보더라도
주께 피하는 자들에게 11절처럼 하나님은 세상이 누릴 수 없는 기쁨을 주십니다. 먹고 입고 누리는 것을 빼앗는 자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다윗에게
아침 기도는 이런 하나님과 관계를 이어가며 하루를 여는 첫 단추였습니다.
늘 주와 동행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 수련회 때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첫 단추를 끼는 기도의 시간도 없이 하루를 사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과 무관하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내 힘 믿고 내 돈 의지하고 내 능력으로 사는 세상과 무엇이 다릅니까? 기도 없는 개인은 이미 사탄의 밥입니다. 가정은 문제는 있지만 주께
맡기지 못해 불평하고 싸우고 문제를 안고 끙끙거리며 가는 것입니다.
부흥회나
수련회 같은 집회를 통해 많은 은혜와 감동을 받습니다. 하지만 삶이 잘 따라 주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아시는지요? 일상에서 기도입니다. 기도 없이는 받은 은혜를 살릴 수 없습니다.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기도해도 해결 안 되는데요?” 반문하실 것입니다. 알 것이 하나 있습니다. 기도는 문제를 해결 받기 위해서 아니라 주께 맡기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나의 삶을
통째로 기도 가운데 맡길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을 소개하려 합니다. 첫째로 저는 내 감정이 만족함으로 채워질 때까지 일단 소리 내어 간구합니다. 소리 내는 이유는 하나님이 못 들어서가 아닙니다. 무엇을 구하고
있는가를 내 귀로 확인하다 보면, 속에 임재하는 성령을 신뢰하게 되고 감정에 안정을 찾게 됩니다.
둘째로 방언으로 기도합니다. 깊고 은밀한 대화를 길게 주님과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개인적인 죄를 고백하거나 사람과의 관계에서 마음 상하고 힘들 때는 반드시
방언을 사용합니다. 이때 주의 영이 다가와 상한 마음을 만져 주십니다.
‘더 이해하라’ 아니면 ‘손을 내밀고 안아 주라’는 구체적인 행동의 의지를 일으켜 주십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기도해도 주님이 꼼짝도 안 하는 때가 있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셋째는, 입에서 모든 소리를 저는 멈춥니다. 그리고 주님이 내게 찾아오실 때까지
기다립니다. 제 이름을 부르며 찾아오는 주님과의 만남이 상당한 시간 동안 없을 때가 있습니다. 이 경우는 너무 한쪽으로 치우친 기도 패턴을 회복시키는 시간입니다.
감사하게도 가족수련회 첫 날 아침 기도회를 인도하고 기도하는 개인기도 시간 가운데 주님이 찾아 주셨습니다. 이 만남을 위해 가족수련회 전에 준비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기도생활
가운데 중요한 것인데 잠시 멈추었던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주님이 만족하는 양만큼의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계 5:8을 보면, 우리 기도의 양이 차면 주님은 그때 움직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기도 가운데 내 모든 것을 맡겼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개인적인
적용입니다. 늘 기도하고 나면 누군가를 통해 내게 들려 주신 주님의 음성과 반대되는 소리를 듣게 하십니다. 요 14:26절을 보면, 이때
나를 지켜주는 말씀이 반드시 생각나야 합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이기에 주께 짐을 맡겼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마무리를 하려 합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기도의 정의를 하나 더 추가하기 바랍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원하는 믿음을 내 안에서 만드는 시간’ 입니다. 그러면 기도 응답은 언제 올까요? 주님이 만족할 믿음이 내 속에서 생길 때입니다. 주님이 원하는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할 수 있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믿는 분만
‘아멘’ 하기 바랍니다.
하루가 시작하기 전에 함께하는 아침 기도를 강추합니다. 다른
이유 없습니다. 험한 세상에서 받은 상처 어떻게 치유하시렵니까? 모든
것에 앞서 먼저 하나님께로 가서 주님의 풍성한 사랑 흠뻑 받으시라는 것입니다. 온 성도가 하루의 첫
단추인 아침 기도의 자리에서 내 짐을 맡기고 응답 받는 복을 누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