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복(6): 내가 변하는 것  

6:1-10


 

하나님의 복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하나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는 복은 참 많기도 하지만 별 희한한 것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개강 주일에 다루었던 평안히 눕고 자는 복입니다. ‘잠 못 자면 의사 처방 받아 수면제 먹고 잠자리에 들면 되지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인간이 조절 할 수 있는 수준을 뛰어 넘는 분노와 실망과 좌절 등이 스트레스로 다가 옵니다. 살면서 기대 이하의 모습을 직장이나 가정에서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보게 됩니다. ‘당신 그런 사람이었어라는 소리는 하지만, 헤어지지도 못하고 직장을 떠날 수도 없고 참 난감합니다.

 

속 썩이는 자녀를 보면서 내 자식 아니야라고 말하고 싶지만, 품어야 합니다. 직장에서도 과중한 업무나 관계로 그만두고 싶습니다. 하지만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으로서 버티어야 하는 사정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들을 만나면 시 6:2절처럼 감당할 수 없는 삶의 무게로 건강까지 위협 받을 정도입니다.

 

3절의 경우도 일상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교우나 동료를 가족처럼 친구처럼 대하며 생활합니다. 그런데 뒤로 들려 오는 소리를 들으면 배신감을 느낍니다. 그런 사람들로 인해 영혼까지 탈탈 털릴 때가 있습니다. 6절은 이런 아프고 힘든 삶의 현실 가운데 탄식하며 눈물로 밤을 세우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잘 알듯이 다윗은 사울의 신하이기도 하지만 사위로 가족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시기를 받고 제거 대상이 되는 것은 너무나 슬픈 일입니다. 목숨까지 함께 했던 군대장관 요압은 다윗을 무시하며 뛰어난 장수들을 살해하며 왕의 명예를 실추시켰습니다. 또 왕의 자리를 빼앗고 아버지의 후궁들과 관계를 가졌던 압살롬의 패륜을 경험합니다.

 

서글픔, 분노와 좌절로 결국 다윗은 눈까지 침침하게 된 것을 7절은 말해 줍니다. 이정도 되면 분노 근심 걱정 마음의 상처 두려움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며, 이런 것들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감당할 수 없는 외부적인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첫째, 어떤 일이 발생하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면, ‘바르게 살려는 나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분노와 원망이 큽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어떤 일도 나에게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이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연인이, 또 아내가 남편이 나의 실망의 대상이 됩니다.

 

절친이 배신하는 것 나에게는 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흔한 일일 수 있습니다. 자식도 내 마음에 못을 박고 떠나갈 수 있습니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나를 힘들게 할 수 있는 것이 교회 내 성도일 수 있습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은 내가 원하지 않는 일들이 일어나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인정하든 않든 인간은 이미 죄로 타락한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남에게 상처를 주고, 심지어 나도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남이 나를 화나게 하지만, 나도 남에게 실망과 좌절과 스트레스의 원인이 됩니다. 내가 당하면 화가 나지만, 나로 인해 상대를 고민하게 만들고, 좌절시키고 병에 걸리게 하기도 한다는 것이지요.

 

둘째, 문제 해결을 위해 가능한 것부터 찾는 것입니다. 그게 뭘까요? 살면서 깨달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세상에서 어리석은 것이 있다면 나부터 안 변하고 남을 변화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실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고 아프게 하는 직장 상사, 부부, 자식, 형제나 성도를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내 범위 밖입니다.  

 

단지 내 속에서 힘든 상대를 이해하고 그들을 수용하면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을 피 흘리게 만들고 싶지, 내 자신이 상처 받아 피 흘리는 것은 싫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나에게 조금이라도 실수하고 피해를 주고 아픔을 준 사람에 대해서는 더 세게 비판하고 비난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남을 탓하는 것 소용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안 변하기 때문입니다. 안 변하기에 나를 괴롭힐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먼저 나를 변화시켜 보는 과감한 도전은 지혜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나는 노력 하는데 상대는 전혀 변할 기미조차도 없다는 괘씸한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이러다 내가 먼저 병 나면 어떡하지?”불안이 생깁니다. 그러면 큰일 나지요. 병까지 나라고 참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왕 시작했다면 한 단계 더 나아가 보기 바랍니다. 얼마나 힘들면 저렇게 하는 이유가 있겠지. 얼마나 아프면 이렇게 밖에 나에게 대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까? 그들 역시 상처 받은 일과 그렇게 되기까지 스토리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그들도 누군가에게 아니면 나 때문에 상처받았기에, 그 아픔이 나에게 전달된 것이야라는 마음을 품어 보기 바랍니다. 이것만으로도 그들이 나에게 어떤 말을 하고, 행동을 여전히 한다 해도 나의 사랑의 대상이 되기 시작합니다. 여기까지 도달하기만 하면 내 의지와 능력을 넘어 도우시는 분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면 역사가 일어 납니다.

 

마지막으로, 실제로 내가 변하는 것입니다. 8절을 보면 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10절에서는 내 모든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갑자기 부끄러워 물러 가리로다라고 말합니다. 물론 다윗의 대적들 사람을 말합니다. 하지만 자신 속에 남을 이해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한 자신의 죄를 말하는 것입니다.  

 

나의 적은 입니다. 변하지 않는 남을 변화시키기 위한 기도보다, 사랑과 용서를 삶에서 실천하지 못하는 내 눈물의 기도가 더 있으면 좋겠습니다. 나를 위로해 주시라는 기도보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다른 사람들에게 더 흘러 넘치기를 원하는 간구가 더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런 우리의 기도를 9절처럼 하나님은 받아 주실 줄 믿습니다.

 

정말 안 변하고 힘들게 만들고 스트레스를 주는 상대가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의 상처를 이해하지 못하고 나만 괴롭힌다고 소리치고 죽겠다는 나 자신 역시 문제라는 인식을 가져 보기 바랍니다. 주님은 나를 더 변화 시키기를 원하십니다. 1절을 보면 다윗은 주의 분노로 자신을 징계하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우리 자신들에게 진노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웃을 사랑한다고 말은 합니다. 그런데 정작 이웃 사랑의 출발점인 상대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안 하려는 위선과 교만 아닐까요? 남을 바꾸기 보다 내가 먼저 주 안에서 변하는 것이 더 쉽습니다. 한번 다 같이 따라 해 주시기 바랍니다. "남을 바꾸기 보다 내가 변하는 것이 더 쉽다." 기도 가운데 내가 변하는 복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