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복(7): 의로운 재판장이 계십니다
시 7:1-6, 9-11
살면서 억울한 일을 당해본 적이 있으신지요?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다윗은 많이 당했던 것 같습니다. 3절과 4절에서
“내가 이런 일을 행하였거나 내
손에 죄악이 있거나 화친한 자를 악으로 같았거나 내 대적에게 까닭 없이 빼앗았거든” 문장을 보면 전부 가정법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억울함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또 5절에서는 다윗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들이 사실이라면, “원수가 나의
영혼을 쫓아 내 생명을 땅에 짓밟게 하고 내가 누리는 영광을 먼지 속에 살게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공동번역을 보면, “원수들이 이 몸을 따라잡아 밟아 죽여도 좋사옵니다. 창자가 터져 흙범벅이 되어도 좋사옵니다”라고 번역합니다. 자신이 실제로 그런 죄를 저질렀다면 합당한 처벌을 받을 것을 맹세합니다.
이는 자기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그런 죄를 저지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습니다. 2절을 보면 실제
그는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자신이
고통 당하고 있는 모습을 사자에게 잡혀 찢기는 먹이감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당하는 고통은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는 극한 수준임을 짐작하게 만듭니다.
한편 다윗에게
고통을 주는 적들은 그를 파멸에 빠뜨려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게 만들려는 강한 의도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참 난감했을 것입니다. 아무도 자신의 이런 억울한 상황을 이해해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다윗을 가까이 하면 피해를 당할 것 같아 다들 멀어지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
이런 것을 당하는 사람의 반응은 다양합니다.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고 적극적으로 부인하며 분노 할 수 있습니다. 억울함을 호소하며 자신의 무죄를 밝히려 노력할 것입니다. 그래도
안되면 변호사를 사서 더 적극적인 방어책을 마련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잘못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진 이유를 생각해야 됩니다. 억울함을
푸는 방식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는 성경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최우선으로 적용해야 합니다. 성경 말씀은 그렇게 우리 삶에 다가와야 하고 실천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윗이 취한 반응을 살펴 보면서 어떻게 우리는 적용할 것인가를 말씀에서 배우려고 합니다.
첫째, 하나님께 일단 피해야 합니다. 1절에서 다윗이 주께로 달려가는
이유는 자기를 이해하고 구원할 분은 오직 하나님뿐임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9절에서처럼 심장(마음)과
콩팥(양심)까지도 살피는 분으로 고백합니다. 사람의 생각과 일의 동기까지도 속속들이 아십니다. 사람은 거짓으로
자신을 억울하게 만들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 보시기 바랍니다.
10절에서 다윗은 그런 하나님을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는 방패로 믿습니다. 11절에서는 하나님은 세상의 악을 끊어 버리기 위해 매일 악에 대해 분노하시는 의로우신 재판장으로 선포합니다. 비록 다윗은 모함을
받았지만, 하나님은 늘 그를 구했고 그를 따르는 무리도 400명에서
큰 수가 되도록 더 축복했습니다(삼상22:2).
그를 사랑하고 무리가 모였던 것은 자신은 남에게 억울함을 당하지만, 이웃을
힘들게 하는 적들을 향해 용기 있게 나가 대신 싸워 주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더욱 신뢰하고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먼저 피하여 의로움과 풍성한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그런 다음 약하고 힘든 분들을 돕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둘째로, 아이와 같이 순진해야 됩니다. 1절에서 이런 순진한 다윗의 믿음을 엿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피하면서‘나를 구원하여 내소서’라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듣기에는 청유형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구하라’와 건지라’는 두
개의 명령형 동사가 따로 사용(NASB: save me and deliver me) 되었습니다.
아니 불경스럽게 우주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엘로힘)께 이런 명령을 다윗이 감이 할 수 있어? 이런 불손한 사람 같으니? 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이런 투의 말이 가능합니다. 누가 가능하고 언제일까요? 건방져 보이고 철없어 보이지만 너무 귀엽고
해 맑은 미소를 띤 사랑스런 아이 때입니다.
인생 가운데 매우 짧은 시간에 이런 것을 자식을 놓으면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걷기 시작하면서 말도 좀 하는 어린 아이가 아빠에게 ‘이것 해’ 라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체면 눈치 이런 것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이입니다. 그 때 아이는 아빠가 영웅입니다. 조그마한 것
하나 고쳐 주어도 ‘awesome’을 연발합니다.
아이들의 순진함에 놀랍니다. 논리 문법 윤리 도덕 예의범절
완전 무시합니다. 그냥 힘들면 아빠에게 부탁도 아닌 명령까지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요구를 들어준다는 허무맹랑한 태도로 달려 옵니다. 아이들의 눈에 비친 아빠의
모습처럼 우리들도 하나님을 대하는 어린 아이와 같은 순진함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진짜 따지는 것을 만족시켜야 합니다.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보기 바랍니다. 막 5:34절에서 열두 해를 혈루병을 앓은 여인에게, 또 막 10:52절에서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외치며 보기를 원했던 맹인 바디메오에게 동일하게 말합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당당히
요구하는 담대함’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머리에 생각으로
저장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늘 내 입술을 통해 고백 되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움직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가진 다윗을 위해 움직이는 모습을 보기 바랍니다. 6절을 보면, 하나님은 먼저 악인들을 향해 진노하며 일어나십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불의와 죄에 대한 공의로운 성품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나를 위해 깨십니다. ‘깬다’는 의미는 ‘억울함을
잘 알아 죄 없음을 판단한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은 나를
억울하게 만든 사람들을 향해 공의의 심판을 행하십니다. 그러니 내가 옳다 네가 틀리다 성도간에도 심지어
부부간에도 너무 다투지 말고 살기 바랍니다.
마무리 하겠습니다. 억울하면 하나님께 달려오기 바랍니다. 내 억울한 사정을 알고 해결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순진한 믿음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우리의 심장을 보고 그분의 공의로움에 따라 심판하십니다. 살면서 억울한 일 없으면 좋겠지만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억울해 하고 분노하고 좌절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억울함을 당해도 결국 일어서기 때문입니다. 내 능력이 아니라 불의를 보고 날마다 일어나서 악을 심판하는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십니다. 우리에게는 의로운 재판장이 계십니다. 이 확실한 복을 믿고 더 이웃을 사랑하며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