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복(8): 돌보시는 복
시 8:1,
3-6, 9
누군가로부터
돌봄을 받아 본 적이 있는지요?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아파트에
같이 사는 이웃 사람입니다. 어느 날 고장 난 차를 토잉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정을 알고 기저귀를 사러 가야 하는 이웃에게 라이더를 제공합니다. 누군가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보상 없이 실제적 도움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4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돌보는 분’으로 소개합니다, 이
말을 들을 때 도대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무슨 돌보심을 받는지 궁금합니다. 일단 3절을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손가락으로 모든 만물을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이 땅에 존재하게 하신 창조주라는 시적 표현입니다.
먼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돌보심은 이 세상에
인간으로 존재하게 하신 것입니다. 저는 인간을 만물 가운데 존재하게 했다는 것이 하나님의
첫 돌봄이라 믿습니다. ‘내가 만약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런
생각을 해 본적이 있습니다. 사실 ‘나’ 라는 존재가 있기에 자식들도 낳고 키우고 주신 것들 느끼고 다스리고 누리고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살다가
조금만 힘들고 어려우면 왜 태어나게 했는지 원망 합니다. 실제로 한번 따져보면 과연 원망하는 시간이
기쁜 날보다 더 많을까요? 물론 그런 분이 없다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4절을 보면 다윗도 어느 날 만물 속에 존재하는 초라한 자신을 봅니다. 동물도 밤이면 집으로
돌아가는데 늘 두려움과 긴장 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런 자신을
생각해서인지 다윗은 ‘사람’과 ‘인자’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사람이란
‘에노쉬’는 인간이 가진 힘이나 능력보다는 허약성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또 인자는 ‘흙의 자식(벤아담)’이라는 뜻입니다. 먼지에서
만들어져서 다시 먼지로 돌아갈 하찮은 존재임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관심을 갖기에는 너무 초라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거기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우주에 비해 지극히 작은
존재인 사람이
하나님의 관심과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합니다. 내가 존재하기에 눈물도 아픔도 상처도 슬픔도
죽음도 있습니다. 하지만 또 하나님으로부터 치유 받고, 위로
받고, 사랑 받고, 구원 받는 기쁨의 감격을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배신한 인간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돌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보살핌이 있습니다. 서로 사랑해서 결혼해서 사는 부부도 서운해 하고 화내고
짜증 내고 싸우다 서로 남남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언약을 어기고 죄 가운데 빠져 완전히
돌아선 인간에게 관심을 끊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으로 돌보십니다.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고 힘들고 괴로워할 때 주님의 돌봄을 생각하기 바랍니다. 주님의 보살핌을 믿어야 끝장 내고 싶은
순간을 넘길 수 있습니다. 정말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 완전히 망하지 않고 죽지 않게 하십니다. 그래도 견디게 하시고, 지치고 피곤해도 눈을 뜨게 하고, 힘을 다시 주시어 일어나게 하시고 새 날의 소망을 허락하십니다.
다윗처럼 외롭고 힘든 시간을 보낸 사람도 없습니다. 어릴
때는 홀로 양을 치며 곰과 사자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장성해서 전장에서 적과 싸웠습니다. 사울에게 쫓기며 생명까지 위협받습니다. 그러나 매 순간마다 구원하는
하나님을 인지합니다. 자신을 생각하고 돌보아 주시는 것에 감격합니다.
다윗은 구약의 사람이라 삶에서 실제적인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십자가를 묵상하는 시간을 매일 갖는 것이 너무 중요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게 되는 구원의 격을 통해서만 삼위일체 하나님의 돌보심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1) 나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실 계획을 세우시고 엄마 배 속에 생명을 주신 성부 하나님의 돌보심을고백하게 됩니다.
2) 이렇게 창조된 인생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죄로 인해
영원한 사망에 던져지는 것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주어 살리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돌보심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3) 주 안에서 새 생명을 얻고 본향에 갈 때까지 내 속에 내주하며 함께 하는 성령의 돌보심을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5절을 보면,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만드셨지만, 인간에게 영화와 존귀를
허락하신 것이 하나님의 돌보심입니다. 하나님보다 못하게 만들어진 천사들 중 일부는 창조주를
배반합니다.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는 구원을 허락하지 않고 구원자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오직 나중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인간만은 예외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죄 가운데 빠진 인간을 구원하고 하나님께로 인도할
길을 만든 것입니다. 오직
구원 받을 방법이 하나뿐이기에 진리라고 부릅니다.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믿을 때 영원한 사망이 아닌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요 14:6).
얼마나 인간이
귀한 존재이면 불 구덩이에 던져 모두 죽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살리려 하겠습니까? 얼마나 사랑하시면 자신의
아들을 대신 죽여서라도 구원하시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허락한 영광입니다. 또 얼마나 인간을
존귀하게 생각했으면 6절에서처럼
만물들을 다스리게 했겠습니까? 원래 만드신 이가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에게 지은 만물의 통치권을 위임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습니다. 바빠서도, 귀찮아서도, 더구나 능력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보다 힘센 동물이 먹을 것 빼앗고 우리를 지배할 것입니다.
인간을 존귀케 만들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돌보심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하나님이 인간을 돌보지 않아 죄와 악이 들어 왔다’고 원망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죄 가운데 사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을 베푸시고, 아픈 자를 치유하시며, 친 영혼들을 위로하시고 보살피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아쉬운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보살핌을 날마다 인정하며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 시의 1절과 9절에서 “여호와
우리 주여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시고 우리를 끝까지 보살피는) 주의
이름이 온 땅에서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라고 찬양합니다. 이
시의 처음과 마지막에서 반복하는 것은 우리를 보살피는 하나님을 잊지 말고 마지막 때까지 감사하며 살라는 의미로 받아들였으면 좋겠습니다.
성도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존귀하게 만드시고 순간마다 하나님의 보살핌을 고백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를 지으신 분이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아시고 죄를 용서하시고 고난의 인생 여정을 함께 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세밀한 보살핌을 기억하며 괴로울 때 흔들리지 말고, 어려울
때 원망하지 말고, 믿음의 길 걸어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