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복(9): 원망과 교만이 사라지는 복
시 10:1, 4-6, 14-15
내가 하는 일들이 잘 풀립니다. 연구도 실험도 별 탈 없이
진행됩니다. 가족들도 아프지 않고 건강합니다. 이런 때 어떤
생각이 드는 지요? 먼저 ‘행복하다’는 말이 나올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섬겨 복을 주셔서 모든 것이
잘 풀리고 어려움이 없다.’ 뭐 이런 생각들이 들것 같습니다. 이
때는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나와 함께 하시고 선하시고 의로운 하나님으로 느껴집니다.
문제는 상황이 변할 때 입니다. 하던 일이 좀 힘들어지고
잘 풀리지 않을 때 입니다. 큰 사고가 나거나 예상하지 못한 질병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이 때 상황을 바라보는 성도의 태도는 좀 달라지고 믿음조차 흔들리기도 합니다.
1) 처음에는 내가 하나님 앞에서 뭘 잘못하는 것이 있는가 하는 마음을 품고 낮은 자세로 나아갑니다.
2) 좀 더 상황이
힘들어지면 ‘하나님이 나에게 시련을 주시는구나’라고 받아들입니다. 그러다 3) 정말 사업이 망하고 병이 악화되고 일 마다 실패로 돌아가면, 마음도
생각도 돌아섭니다. 하나님 어디 계세요? 정말 살아있는 것
맞아? 내가 지금까지 존재하지도
않은 신을 믿고 있었던 것 아니야?
그러다 ‘하나님은 없어’ 까지 가게 됩니다.
여기서부터 질문들이 생깁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가 그런
말 해도 되는 거야? 해서는 안 되는 것 아냐? 하나님 화
내지 않으실까? 벌 받지는 않을까? 여기 계신 우리 성도님들은
각자 경험에 의하면 어디까지 가 보셨습니까? 하나님 잘 모르고 믿지 않던 때는 무엇이든 말해도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고 믿는 순간부터는 달라야 합니다.
4절을 보기 바랍니다.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악인이 누구입니까? 시편 저자에 따르면 하나님이
자신의 행위를 감찰하지 않는다고 무시하고 마음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없다’ 라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결국 악인은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악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성도는 예수 십자가 보혈로 모든 죄가 용서함 받은 ‘의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씀 가운데서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는 확실한 한가지를 발견합니다. 악인은 ‘하나님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1절을 보면, 의인은 ‘하나님이
없다’ 라고 말하지 않는 차이점입니다.
대신에 뭐라고 말 할까요? ‘하나님은 어찌 멀리 서서 숨어
계십니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의인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것은 ‘원망’ 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여
어찌 숨어 계십니까’라고 하는 것은 ‘탄식’입니다. 원망은 하나님이 절대로 허락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탄식은 아무리 많이 해도 다 들어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원망은 바로 심판이었습니다. 하지만 처절한
탄식은 위로와 구원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지만 숨어 있는 것과 존재조차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차이가 납니다. 그러므로 내 기도에 응답이 없을 때, 하나님에
대해 화가 난다고 성도는 ‘하나님은 안 계신다’고 생각하거나
말해서는 절대 안됩니다.
말은 우리 속의 생각과 마음의 표현입니다. 또 내 마음의
생각은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라가 망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갑니다. 정든 고향을 떠나야 합니다. 집이 불타고 재산을
잃었습니다. 가족들이 죽었습니다. 70년이란 긴 시간 동안
남의 땅에 살면서 희망이라곤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 있는 포로민들에게 이사야 선지자는 45:1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존재하지 않는 분이 아니라 숨어 계시는 분입니다. 바벨론의 마르둑
신에 기가 죽은 겁쟁이가 아니라 죄로 인해 거룩을 상실한 인간에게 가까이 올 수 없기에 멀리 서 있고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숨어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는 모습을 보기 바랍니다. 어려운 일들이 생기고 그것으로 심한 고통과 고난은 사람들로 하여금 원망을 불러 옵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분도 있다는 것 말씀 드립니다. 반대로 너무 잘
되는 사람들의 경우를 보기 바랍니다. 물론 이 경우도 다 그렇지는 않지만 교만이라는 올무에 메여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5절
상반부에서 보면 자신의 길은 언제든지 실패가 없이 견고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6절에서는 하나님 없어도
잘 살고, 가지고 있는 재산과 명예를 가지고 대대로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여기서 교만한 사람과 원망하는 사람의 공통점을 발견합니다. 무엇입니까? 4절을 보면, 교만스런 사람 역시 ‘하나님이 어디 있어’ 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원망뿐만 아니라 교만 역시 ‘하나님이 없다’는 악한 생각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너무 힘들어서 ‘하나님이 없다’고 말합니다. 다른 하나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 ‘하나님이 없다’는 것입니다. 둘
다 하나님 앞에서 악인들입니다. 14절을 보면, 하나님은
악인들을 보시고 그들에게 반드시 심판으로 갚을 것을 경고합니다.
어떻게 경고하십니까?
15절에서 1)하나님은
악한 자들의 악을 더 이상 찾지 못할 정도로 들추어 냅니다. 2)그리고 그들의 팔을 꺾으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팔은 인간의 실제 재능과 부와 명예와 능력을 상징합니다. 다르게
말하면, 이 땅에서 배부르게 살면서 하나님 없다고 소리치며 휘둘렀던 그들의 돈과 명예, 자랑했던 건강까지 모두를 거두어 간다는 뜻입니다.
한편, 악인과는
다르게 의인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의인은 원망을 품지도 않고 교만스럽게 행동하지도 않습니다.
의인은 힘들 때 탄식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간절히 요청하기 때문에 원망이 사라집니다. 또
교만이 내 속에서 꿈틀거릴 때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인된 성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없어’ 라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구원 받은 백성이 아님을 스스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은 성도의 복은 무엇입니까? 원망과 교만이 지속되지 않게 원망을 (탄식)으로, 교만을 (겸손)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누가
하십니까? 우리 속에 계신 성령입니다. 그분은 우리로 하여금
원망과 교만을 즉각 깨닫게 하시고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게 만드십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내주하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 가운데 회개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성령의 부재입니다. 성령의
부재는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얼떨결에 믿는다고 말은 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온전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했고 내 입술의 진실한 고백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힘든 일이 생기면 원망보다 감사와 찬양이 있는 탄식의
사람이 되십시오. 공동체 속에서 나 외에 다른 사람이 실망스럽게 보이기 시작하면 더 사랑하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교만한 자를 심판하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하기 바랍니다. 삼일 만 가는 내 의지가 아닌 성령의 능력으로 원망과 교만이 사라지고 오직 감사와 찬양과 겸손이 넘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