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복(10):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됩니다.
시 11:1-7
우리는 정상이
비정상적으로, 비정상이 정상으로 취급되는 때를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사실이 거부되고 남자와 여자를 만든 창조질서가 무시되고 있는 시대입니다. 특별히 지금 한국에서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올해 통과시키려는 측과 저지하려는 교회가 싸우고 있습니다. 이런 혼돈들 속에서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성지학습과 오늘 말씀에서 한번 찾아 보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선교했던 일곱 교회가 있던 곳을 3 주 전에 다녀왔습니다. 교회
건물들은 이미 땅에 묻혔고 98%가 무슬림화 되어 있었습니다. 겨우
땅속 흔적들을 조금 파내어 기독교인들에게 소개하지만 많은 것들을 방치하고 있는 현장을 보았습니다. 설레임과
함께 어떻게 다시 복음의 땅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막막함이 있었습니다.
이천 년
전의 바울 사도 역시 이방 종교로 둘러싸인 그곳에 그런 마음으로 전도를 시작했을 것입니다. 여러 곳을
다니면서 한 가지 배운 것이 있습니다. 절대 진리가 무너지고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성도는 진리가 아닌 것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하고, 저항하지 못한다면 우리 신앙은 쓰레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지키기
위해 저항했던 선배들의 유산 하나를 소개하려 합니다. 스타워즈의 촬영장소가 되었던 갑바도기아라는 지역에
데린구유(깊은 우물)라는 지하 도시가 있습니다(PPT). 로마 박해를 피해 지하 12층 그리고 2만 명 정도가 살 수 있는 굴을 파서 신앙을 지키며 살았다고 합니다. 더
많은 동굴이 발견되고 있고 8층까지만 가 보았습니다.
자녀를 가르치는
교실, 시체처리장소, 성찬 장소도 있었습니다. 끝이 안 보이는 우물과 위로도 환풍을 위해 높이 뚫은 구멍도 보았습니다. 일체
성화 같은 것이 발견 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기독교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살던 사람들의
평균 키는 140 cm 평균 기대 수명은 35살이라 합니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살았을까요?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이 무엇이길래 120년이라는 긴 세월을 그곳에서 아이를 낳고 신앙을 지키며 견디어 왔던 것입니까?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놀라운 것은 이런 신앙을 가진 부모
밑에 자란 자녀들은 나중에 갑바도기아 신학자들을(바실, 그레고리) 배출하게 됩니다. 그들을 통해 기독교가 든든히 서 갈 수 있는 기초를(삼위일체) 만들어 냅니다(니케아와
콘스탄티노플 신경/사도신경 모체).
비록 지금은
흔적만 남았지만 우리에게 전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땅에 거짓들이 복음을 가로막고 흔들 때 성도가 세상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1) 세상을 향해 비폭력적으로 싸우는 실제적 저항이 있어야 합니다. 2) 고난을 견디어 내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3) 인내를 위해 어떤
것에도 흔들리거나 무너지지 않는 믿음, 이 세가지가 필요합니다.
비 진리에 저항 할 수 있는 3가지 믿음에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본문을 통해 보려 합니다. 다윗 역시 상황은 다르지만 절대 위기를 만납니다. 1절을(현대인의 성경) 보면, 위기에 처한 다윗을 향해 사람들은 ‘너는 새처럼 산으로 도망가라’고 제안합니다. 위기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적절한
타협을 고려해 보라는 제안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사람들의 제안을 거절하고 하나님께로 피한다고 말합니다. 첫째로, 성도는
나의 피난처가 되는 하나님께 피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시에서 ‘하나님은 나의 요새, 산성, 반석’으로 노래하는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보호를 철저히 믿었는지 알게 됩니다. 그러나 가짜 신앙은 하나님께 피하는
것을 비과학적/어리석다 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람들 눈에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에
주의 자녀들을 어떻게 돌보고 지키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훗날 이스라엘도 눈에 보이는 힘센 나라를
의지하고 우상을 섬겼던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눈에 보이는 힘센 나라들을 의지했을 때
안전했습니까? 오히려 그들로부터 삼킴을 당했습니다.
그렇다면 진짜 믿음은 무엇입니까? 1)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분간하는 것입니다. 2)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3) 할 수 없는 일은 과감히 주님께 전적으로 맡겨야 합니다. 4) 일이
진행되는 동안 걱정과 염려에 갇히지 않는 것입니다. 5) 어떤 결과에도 그것이 가장 선한 하나님의 답임을
받아들입니다.
이런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흔들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둘째로, 성도는
사람의 말에 시험 들지 않고, 환경에도 요동하지 않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비결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나의 ‘터’로 삼기만 하면 됩니다. 3절을 보면 ‘터’라는 말이 나옵니다. 터는 기초 토대 기둥이란 의미입니다.
다른 의미로는
나라와 공동체를 세워가는 질서(법 도덕)를 뜻합니다. 사울 시대에도 법은 있었지만 법이 제대로 작동 되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권력을 쥐고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지키는 죄 없는 다윗을 죽이려 했습니다. 의인이 설 자리가 없기에
도망가라고 다윗에게 충고했던 것입니다. 이 땅의 터가 무너지면 어떤 것도 버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을 나의 터로 삼으면 달라집니다. 4절을 보면 하나님은 성전에 계신다고 합니다. 이 말은 가장 인간과 가까이 계시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비록 우리와
가까이 있긴 하지만 세상에는 속하지 않고 초월하여 계시며 세상을 지켜 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터로
삼는 성도는 세상에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흔들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면 5절처럼 하나님은 의인의 고통과 악인의 불의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는 확신으로 이어집니다. 문제는 현실입니다. 기도 응답이 늦어지고 악인의 심판이 지연되면
의인은 실망하고 악인은 더 교만해 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침묵하는 이유가 있지요. 의인 안에 있는 믿음과 악인 속의 악함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인간은 모두
자신이 의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고난이 오고 하나님이 즉각 도움을 주지 않으면 반응하기 시작합니다. 원망과 분노가 올라옵니다. 공의의 하나님은 이 마음을 품은 사람에게
복을 줄 수 없습니다. 원망을 회개하고 의인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이런 나를 기다려 주는 시간입니다.
성도는 마지막으로, 세상에서 정의가 물러가고 악이 판을 칠 때도 정확히 심판하는 하나님의 공의를 의심하지 않는 믿음을가져야 합니다. 6절을 보면, 악인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론과 핑계와 거짓말로 빠져나가는 인간의 교활함을 너무 잘
알기에 그물을 들고 결정적인 순간을 잠시 지켜 볼 뿐입니다.
그들에게는
불과 유황이 기다립니다. 하지만 7절을 보면, 의인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됩니다. 이 말은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구원받고 오직 그들만이 하나님 앞에 선다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는 온갖 비 진리가 난무하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 피하고, 환경에 요동하지 말고, 심판을 의심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을 구원하고 주의 얼굴을
보게 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모두 서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