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1): 주의 뜰에 거하는 사람의 감사
시65:1-4
예수가 나의 구주임을 고백하는 성도는 늘 하나님께 예배자로 살아갑니다.
하나님께 거하는 사람만이 영혼의 진정한 만족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의 달을 맞아
감사 주제를 몇 주 다루려 합니다. 그냥 주보 순서에 따라 진행되는 예배가 아니라 우리가 드리는 예배
가운데 실제로 어떤 영적인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잘 알게 되면 더 많은 감사가 이어질 줄 믿습니다.
먼저, 찬양을 드리게 됩니다. 우리가 드리는 찬양은 내 모든 것을 드리는
시간입니다. 찬양은 유일하게
하나님께 전부를 드리는 행위에 해당 됩니다. 물론 헌금도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신 것 가운데 일부를 드리는 것이기에 전부라는 표현은 찬양에 더 합당합니다. 1절을 보면 찬양이 시온에서 하나님을 기다린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 드리기 위해 성도들이 서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특별히 찬양을 의인화하여 우리가 드리는 찬양 그 자체를 하나님이 받아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는 하나님께 찬양 드리는 것을 정말 사모했으면 좋겠습니다.
또 주신 재능으로 악기로 목소리로 찬양을 올려 드리기를 기뻐하기 바랍니다.
둘째, 2절을 보면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을 예배 가운데 체험하게 됩니다. 기도 응답은 볼 수 없는 하나님이 우리를 살피시고 사랑해 주신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면 다윗에게만 응답해 주십니까? 아닙니다. 누구에게도
응답하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 다윗은 “모든 육체가 주게 나아오리이다”라고
말합니다.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말은 부르짖음을 거절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속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어야만 할까요? 약점이라도 있으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인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의도적으로
다윗은 연약한 인간을 의미하는 ‘육체’라는 단어를 고른 것입니다.
예수 믿고 난 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라고 부르며 달려드는 자녀를 아버지가 어떻게 거절하겠습니까? 우리 성도님들 자신의 기도를 들어 보시고 하나님을 ‘아버지’ 라 부르며 기도하고 있는지를 점검해 보기 바랍니다. 좀 뒤에 하나
더 나눌 텐데 이것은 기도 응답의 비결입니다(#1).
셋째, 삶에서 잃어 버린 거룩을 회복하는 역사가 예배 중에 일어납니다. 성도는 삶에서 죄에 저항하며 승리를
맛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맥없이 패배를 당하는 것도 현실입니다. 다윗은
3절에서 ‘죄악이 나를 이기었다’고 솔직히 고백합니다. 너무나 놀랍게도 이런 모습을 다윗 이후 천
년이 지난 바울 사도의 모습에서도 보게 됩니다.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나 거듭난 후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선을 따라 살려고 하지만 그때마다 죄가 그를 이기고 악을 행하게 만듭니다. 이런
자신을 바라보며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롬 7:24절에서 깊이 탄식합니다. 이런 모습이 바울 이후 2천 년이 지난 늘 날 우리들에게는 없을까요?
그러나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비록 성도가 죄악 가운데 무너짐에도
불구하고 소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보혈을 의지하고 회개를 통한 죄 용서함이 늘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을 보기 바랍니다. 죄악에 패하는 자신을 보면서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우리의 허물을 주께서 사하시리다”라고 더욱 확신합니다.
그렇다고 이미 구원 받았기에 죄를 지어도 받는다는 구원파와는 전혀 다릅니다. 그들은 죄 짓는 것에 대한 회개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믿고 날마다 성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죄에 대한 회개가 분명히 있습니다. 또 요일 1:9절에 의하면 지은 죄에 대해 회개할 때마다 어떤 죄일지라도 용서받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죽기 전 1초 전에 죄를 짓고 회개하지 못하고 죽으면 어
떡하나? 라는 질문입니다.
사실 우리의 믿음은 이 염려까지도 사라지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예수 믿는다는 것은 예수
십자가의 보혈이 내 과거 현재 미래의 죄까지도 용서하셨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고 입술로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구원은 예수 믿는 순간 이미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믿고 난 뒤 죄 짓는
죄에 대해서는 회개가 일어나야 합니다. 세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1) 확실히 예수를 믿는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2) 회개는 죽기 전까지 이 땅에서 거룩을
유지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성화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3)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께로 복을 받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들으면 죄를 이기지 못하고 연약함으로 쓰러져도
좌절하지 말아야겠다는 소망이 생깁니다.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 회개하면 죄 사함의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남은 문제는 죄를 짓고 쓰러질 때마다 더 쌓여만 가는 죄책감이 문제입니다.
회개하면 용서받는 것은 잘 알겠는데 반복하여 죄를 짓는 나를 보면 너무 밉습니다. 죄책감으로 괴로워하고 의기소침하고 사람 앞에서 자신감이 떨어집니다. 시간이
가면서 우울해집니다. 이런 경우 1) 십중팔구 ‘또 나쁜 짓을 했네’ 라는 마음의 후회는 합니다. 그런데 2) 하나님 앞에 나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3)또 기도 자리에 나가도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머리로만 생각하고 침묵으로 기도합니다. 입술로 어떤 죄를 지었는지 확실히 하나님께 말하지
않습니다. 입술로 죄를 고백하는 것은 공의의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 때 사랑의 하나님은 “그래 참 힘든 일인데 용기 있게 아빠에게
말해주어 너무 고맙구나”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딸아/아들아
이제 걱정 하지 말거라. 아빠가 다 용서해 줄게” 라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여기까지 갔다고 끝이 아닙니다. 4) 이제
도움을 요청해 보기 바랍니다. “아버지 용서는 감사한데요. 내일
또 죄짓고 또 올텐데. 아무리 해도 내 힘으로는 안 되요. 빠져
나올 수 있게 저 좀 도와 주세요.” 반드시 도움을 구하기 바랍니다.
5) 마지막으로
기도응답 받는 비밀 하나를(#2) 더 말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약점이 무엇일까요? 눈물입니다. 나 자신에 대해 실망감에
저린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눈물이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이제부터
너의 옆에 서서 확실히 피하는 길을 보여 줄게. 나만 볼 수 있겠니.
내 소리만 듣겠니. 내 손 붙잡고 따라 오겠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의 도움 받아 승리할 줄 믿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존재입니다. 반드시 하나님과 교제가 있어야 세상이 주지 못하는 영혼의 만족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방법은 하나님의 뜰에 거하는 것입니다. 주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예배의 자리에서 참된 만족을 누리는 하나님과 영적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주일
날 그냥 마당만 밟고 집으로 가는 사람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예배 가운데 내 죄를 고백하고 용서함
받고 회복되어 풍성한 감사로 삶의 자리로 돌아 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