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복(12): 주의 장막에 거하는 복
시 15:1-5
세상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하려고 할 때 자격을 요구합니다. 대학도, 직장도, 음악회도 내가 가고 싶다고 다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요구하는 것을
구비해야 입장이 가능하고 입학이 허가되고 입사도 그렇습니다. 이뿐 아니라 어떤 곳에는 화장실도 돈을
내야 사용이 가능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1절을 보면 주의 장막에 머무르며 주의 성산에 살 자가 누구인가를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장막은 성전이 있기 전 회막을 말합니다. 성산은 이 회막을 둔 시온
산입니다. 시 전체의 뉘앙스는 성막에 예배하러 나오는 사람들의 자격을 묻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것도 십계명처럼 10가지나 됩니다.
2절에서 ‘정직하게
행하며’는 깨끗한 삶을 요구합니다. 공의를 행해야 합니다. ‘마음에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거짓말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4절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고’는 악한 사람이 비록 잘 된다고 해도, 부러워하거나 본 받지 않을
것을 결심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존경해야 합니다.
그리고 서원한
것을 갚아야 합니다. 모두 5 가지를 말합니다. 한편 3절에서는 남의 허물을 말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웃에게 나쁜 짓 해서도 안 됩니다. 타인을 비방하지 말아야 하는데
이는 상대에게 모욕감을 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또 5절에서는
가난한 사람을 상대로 이자 놀이를 해서는 안됩니다.
뇌물을 받아
죄 없는 사람을 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5 개가 더 추가됩니다. 결국
2, 4절은 세상 살면서 적극적으로 우리들이 바르게 행하며 살아야 하는 것들을 언급 합니다. 반면에 3, 5절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절대로 상대에게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피해를 주거나 아프게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말해 줍니다.
이런 10가지나 되는 조건들을 들을 때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일단 예배자가 지켜야 할 것이 많다는 것에 부담스럽습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리기 위해 10가지나 되는 조건들을 묻고 따지고 예배당으로 들여 보낸다면, 나는 한번이라도 예배자가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오늘
날 성도는 예수님 때문에 어떤 조건도 걸리지 않고 예배당 입구를 프리 패스합니다. 이것이 예배자가 누리는
첫째 복입니다. 나를 죄에서
구원하신 주님의 보혈을 믿고 나아오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모두 예배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불완전한 인간에게 완전함을 요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이 동물을 잡아 가죽 옷을 만들어 아담에게 입힌 이유입니다. 그 동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동물의 피가 인간의 허물과
죄를 덮어 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허락해 주시는 ‘의’를 덧입고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예배자로서 누리는 엄청난 큰 복은 행함이 아닌 오직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일하게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죄인들을 위해 피 흘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배 가운데 주의 보혈에 감격하는
찬양과 감사를 늘 올려드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예배자의 자격을 묻는 10가지 조건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느냐는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웃에 대해 매우 실천적인 삶을 살
것을 요구합니다. 성도는 관념적이 아니라 실제 행함이 있는 신앙의 소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11월이 감사의 달이라면 12월은 사랑을 나누는 실천의 달입니다.
춥고 배고프고
갈 곳 없는 사람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달입니다. 주변에도 이런 분들이 있습니다. 성탄 전에 홈리스들을 찾아보려 합니다. 관심 있는 분은 저에게 연락
주시면 작은 물질을 서로 보태선물을 준비해서 함께 다녀오면 좋겠습니다. 늘 사랑이 교회 밖으로 흘러가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둘째) 구약에서 10가지
예배자의 조건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며 이웃을 소홀히 하는 사람에게 경고를 줍니다. 특히 3절을 보면 이웃과의 관계에서 나쁜 말이나 행동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달리
말하면, 이 세상 사람들에 뒤지지 않는 인격을 소유한 신앙인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고후 3:3절에 의하면, 성도는 하나님의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쓰신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성도의
나쁜 말과 행동으로 하나님이 거짓 탈을 쓴 악한 신으로 비추어 질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엉망으로 살아가는
이런 내 모습 때문에 불신자들이 돌아오기 보다는 더 멀리 떠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면 하나님의 영광 확실히 가리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분명 하나님 일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남도 예수 못 믿게 하지만 본인의 믿음
마저 흔들립니다. 정말 변하지 않는 자신을 보면서 회의가 옵니다. 잘
나오던 교회마저 싫습니다.
세상에는 우리를 흔드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1) “바르게 살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라”고 끝없이 내 귀에 속삭이는 사탄과, 2) 오늘날 교회를 질타하는
세상의 소리입니다. 3) 이런 것들로부터 상처받고 이겨내지 못하는 본인 자신들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모든 것으로부터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엄청난 큰 복을 성도에게 주십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님께 있습니다. 내
의지와 힘으로는 도저히 변화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양심적으로 정말 많이 흔들리는 나를 붙잡아 주시고, 실제적으로 죄를 이기게 하시고, 이웃을 향한 선한 삶을 살 수 있게 주의 임재 앞으로 나오는 자들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 능력을 어떻게 우리들에게 공급하는지 궁금할것입니다. 예배 가운데 “나는 너희가 어떤 사람이든지 상관하지 않고 무조건 지금의 너를 사랑해”라는 주님의 음성으로 우리들이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복을 공급받습니다. 와 여러분은 찬양과 말씀과 기도와 교제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들려진 하늘의 이 소리로부터 빚어진 작품들입니다.
지금도 죄에 허덕이고 있는 나를 사랑한다는 주의 음성을 듣고 스스로 무너지지 않기 원합니다. 세상의 손가락질과 비난에 교회를 안 나가는 ‘가나안’ 성도가 생겨나지 않을 줄 믿습니다. “그 정도의 인격으로는 하나님 자녀가 될 수 없다”는 사탄의 말에 절대 속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에 붙잡힌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