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복(14): 기이한 사랑을 받습니다
시 17:7-8, 13, 15
지난 주에 ‘주께 피한다’는 말씀의 의미를 살펴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영으로 존재하시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분입니다. 다행히도 ‘피한다’는 의미는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 내가 의지할 분이 하나님이라는 확신을 갖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본문
7절을 보면, 주께 피하는 자들이 언급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신다고 합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우리에게 기이한 사랑을 ‘나타낸다’고 말하지만, 반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우리 성도들의 입장에서는 확실히 ‘체험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또 ‘기이하다’는 말은 ‘특별하다’는 뜻과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사람들이
생각도 할 수도 없는 방법으로 또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들을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들 눈에 기이하게
보이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조건적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대부분 조건적인 사랑에 익숙합니다. 저 사람이 내 의견에 동의하기 때문에
친분을 쌓고, 또 나에게 이익이 되기에 거래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와는 다릅니다. 조건 없이 무조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말도 안
해 본 사이인데도 나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내 마음의 문을 마구 두드립니다. 게다가 내 곁을 떠나지도 않고 문 밖에 서 계십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문을 안 열어주면 몇 번 시도하다 돌아 갑니다. 그런데 주님은 시간이 지나 떠난 줄 알고 열어 보면
여전히 서 계십니다. 그래서 다시 그냥 문 닫고 들어와 버립니다.
세월이 지나도
끝까지 나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문을 열어 주님을 안으로 영접할 때까지 찾아 오십니다. 그런 기이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저와 여러분이 예수 믿는 성도로 함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뜻과 선택이 아닙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택하심과 성령의 부르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미워하고 싸우는 것은 신앙생활에서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와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힘듭니다. 그래서 안되면 도와 달라고 부르짖고, 안되면 금식하고, 안되면 서원까지 해서 사랑을 풍성히 가진 성도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기이하다고 말하는 둘째 이유는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국가이든 인간은 상대의
태도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한번 사랑한 사람은 변절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사랑해 주십니다. 징계해서라도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시고 계속 사랑하십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신해도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사람 사이 거래 관계는 계약으로 맺어진 것이기에 상대가 파괴하면
깨어질 수 있고 전쟁까지도 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한 번도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와의 관계가 일시적인 계약이 아니라 언약 관계이기에 영원하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통해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주신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오늘 날 예수를 믿은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됨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죄에 넘어지고 반복적인 죄
된 삶이 있을지라도, 다시 그들을 용서하시며 영원히 사랑할 것이라는 선포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허물과 죄가 발견되고 내 마음에 안 든다고 상대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정말 잘못된 것입니다. 이런
일은 성도간에 또 부부간에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뭐
저런 사람이 있어?’ 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하셨고, 지금도 용서하십니다. 앞으로도 용서해 줄 사람임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옆에 있는
분과 짝을 지어 한 번 따라 해 주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용서해준 사람입니다.” “미워하는 마음이 있었던 나를 용서해 주세요.” “서로 사랑하며
함께 주의 뜻 이루어 가기 원합니다.” 예수를 믿는 저와 여러분이 상대를 대하는 태도가 안 변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가 아님을 꼭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왜 이처럼 사랑할까요? 저
같은 경우는 물 한 그릇 떠 놓고 하나님께 절도 안 해본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생면부지의 나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게다가 세상에서 우리가 어깨에 힘주고 살지만 아무것도 아닙니다. 한 줌의 흙이요, 시들어질 꽃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 사랑 받는 이유가 있습니다.
인간은 만세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전제 되어야만 구원 받을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사랑 받는 이유는 너무 귀한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으로만 구원 받는 대상이었기 때문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창조 전부터 이미 하나님의 사랑 받는 대상이었습니다.
8절을 보면, 그런
우리를 하나님은 눈동자같이 지키시며 특별한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눈동자’라는 말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이란
뜻입니다. 2) 우리 자신이 귀해서가 아니라 너무 존귀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값비싼 십자가의
희생으로 사망에서 구해낸 존재들이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다 배신하고 제 갈 길로 갔던 멸망 받아 마땅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니 내 생각이 당신 보다
낫다. 좀더 거룩하다. 이런 생각들 이제는 너무 유치한 것입니다. 그런 우리들이 하나님의 기이한 사랑을 받는 존재가 된 것 감사하며 신앙생활 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나눌 것은 하나님은 이런 기이한 사랑을 어떻게
보여 주느냐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살면서 생기는 질병, 전쟁, 기근으로 필요하다면 기이한 기적까지도 허락하시며 우리를 구해
주십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런 차원을 넘어갑니다. 현재를
너머 내세까지도 하나님의 기이한 사랑이 미치는 것을 말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13절을 보면 단지 육신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혼까지 구원하는
사랑입니다. 게다가 15절을 보면, ‘내가 깨어날 때’라는 말은 ‘평소에
잠 자다 깨는 것’이 아닙니다. 단 12:2절을 보면, 사망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으로 죽은 자를 일으키는
부활을 말합니다. 이런 엄청난 하나님의 기이한 사랑을 고백하는 다윗에게서 예수 그리스도가 후손으로 올
만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기이한 사랑을 여기까지 고백하며 이것까지 체험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