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신앙생활(1): 십자가가 답입니다

고전 1:10-12, 18

 


시간이 빨리 지나 벌써 올해 두 번째 달이 시작 되었습니다. 1월 한달 동안 제직들을 위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주제를 바꾸어 교회를 다니는 성도는 어떤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가를 집중해서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보아 왔던 고린도전서를 중심으로 여러 주제들을 다루려고 합니다.

 

고린도전서의 배경을 간단히 살피고 말씀을 이어 갈까 합니다. 18:1-3절을 보면, 바울은 2차 선교여행 시에 그리스 아덴에서 복음을 전하다 실패하고 고린도로 가게 됩니다. 마침 그때 글라우디오의 명령에 의해 로마로부터 추방당한 유대인 부부 브리스길라 아굴라를 그곳에서 만나게 됩니다(2). 바울은 텐트를 만드는 같은 일을 하는 부부와 함께 살면서 고린도 교회가 개척되게 됩니다(3).

 

시간이 흘러 고전1:11절에 의하면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 내에 분쟁이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너무나 안타깝게도 이 교회는 바울, 아볼로, 베드로, 심지어 그리스도에게 속한자라는 파가 만들어져 서로 싸우고 있었습니다(12). 사실 같은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다들 친할 수는 없습니다. 자주 만날수록 더 친해지는 것은 인정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성도라면 반드시 마음에 품어야 하는 세 가지 신앙관을 오늘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첫째, 교회에서는 어떤 사람을 중심으로 영향력을 가진 그룹을 형성하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고린도교회는 여러 가지 이유로 분열이 생겨 네 개나 되는 파당이 존재했습니다.  

 

그 중 마지막 그룹이 좀 특이합니다. 심지어 그들은 사도들의 이름조차 빌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은 그리스도께 속했다고 주장합니다. 놀랍게도 이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이런 모습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둘째, 자신들만이 진정으로 그리스도께 속한 참 성도라는 영적 우월주의에 빠지는 신앙생활을 철저히 배격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영적 우월주의를 알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먼저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앞서(나중이라도) 자신의 생각은 이러하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다음은 반대 의사를 자신은 밝혔기에 차후에 함께 하는 교회 활동에 함께 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공동체가 세운 영적 리더십을 무시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성도에게 필요한 신앙태도는 공동체적 신앙입니다. 비록 다른 사람들과 반대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주의 일은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공동체적 신앙에는 두 가지 아름다운 것이 있습니다. 의견이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모습은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겸손의 표시입니다. , 나와 다른 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사랑이 그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어떻게 공동체적 신앙을 만들어 갈 것인가를 살펴 보려 합니다. 고전 1:10절을 보면, 1)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려는 마음이 되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현실에서 가능하다고 생각하는지요? 집에서도 의견이 자녀들과 어른으로 나누어지는데 교회 안에서 과연 가능한 일입니까?

 

다시 한 번 더 우리 성도님들께 여쭈어 보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한 목소리를 내고 있을까요? 한 마음인가요? 같은 생각으로 나아가고 있는가요? 답조차 다양할 것입니다. 일단 생각이 다르다는 것은 하나가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안 되는 것을 하라고 바울 사도는 명령하는 것입니까? 너무 무책임합니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정말 불가능한 것을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강요하는 그런 분인가? 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일단 본문을 살펴보면 강요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바울 사도는 공동체 생활을 하는 성도들에게 부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명령이 아닌 권한다는 말을 사용합니다.

 

바울 사도로부터 한 목소리, 한 마음, 한 뜻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라는 음성이 들려옵니다. 또 일단 할 수 있을지 못할지를 떠나 그런 노력은 우선으로 성도에게 필요한 것임을 알려 줍니다. 그래서 믿음의 성도에게 기도가 있습니다. 성도는 마음이 하나 되도록 한 자리에서 모여 함께 기도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이미 기도 시리즈를 통해 말씀 드렸지만 기도는 우리의 다양함이 모이는 시간이요. 그 다양함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녹아 드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다른 생각이 성령에 의해 태워지고 없어지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부부는 하나가 됩니다. 하나된 교회는 기도하는 교회임에 틀림없습니다.  

 

기도하지 않기에 하나가 안 되는 것입니다. 다들 모여 기도하는데 그 자리에 모이지 않기에 내 생각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가지 못합니다. 결국 내 뜻만 살아남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도 바울은 교회가 하나되는 또 하나의 새로운 비장의 무기를 끄집어 냅니다. 바로 고전1:18절에서 언급되는 십자가입니다.

 

2) 다양성을 가진 공동체가 하나가 될 수 있는 비결은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드리게 됩니다. 십자가 신앙이 필요한 이유는 그 앞에 선 모든 성도는 다 자신의 생각과 고집과 아집을 내려 놓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뜻만이 살아 승리하는 장소입니다.

 

왜 십자가 앞에는 하나님의 뜻만이 승리할까요? 내 생각을 희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앞에 서면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십자가는 구조 자체가 두 기둥이 얽히는 모습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연합입니다. 한 인간이 하나님과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연합되어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살면서 자기 생각 고집 없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내 생각이 남들과 마주치면 비교가 되고, 비교는 우위를 결정하려 합니다. 그래서 내 생각이 맞고 상대는 틀린다고 판단합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특징은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에서 사고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비교하는 대상은 전부 사람뿐입니다.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이 들면 기를 죽입니다. 또 내 생각이 맞든 틀리든 무조건 밀어 붙여 나를 부각시키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정받고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우리를 연합시켜 주는 십자가 앞에 서면 우리는 너무나 다른 존재를 만납니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하나님의 높은 생각 앞에 서게 됩니다. 이것이 사 55:8-9절에서 이사야 선지자의 고백입니다.

 

성도는 공동체의 일을 할 때 한 목소리, 한 마음, 한 뜻이 되려는 태도로 살아야 합니다. 또 나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만나고 부딪힐 때, 그 사람과 대응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내 생각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지 십자가 앞에 서야 합니다. 겸손과 희생과 사랑의 십자가 신앙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성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