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신앙생활(7): 덕을 세우는 신앙
고전
8:1, 4-7, 13
신앙과 삶은 연속 선상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기 전과 후에도 여전히 내가 살아왔던 세상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조금 혼란이 생기기도 합니다. 예수를 믿기 전과 후에
삶이 확실히 구분되고 분리가 잘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예를 하나 고린도교회에서
소개합니다.
고린도는 잘 알려져 있듯이 치유의
신(아스클레피우스), 태양 신(아폴로), 미의 여신(아프로디테) 등을 섬기는 신전이 많기로 유명합니다. 예수를 알기 전에 이런 신들과
우상들을 섬기던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지속되는 일이 하나 일상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먹고 사는
영역에서 일어났습니다. 당시 여러 신전에서 우상에게 바친 제물들이 시장에 유통되고 사람들은 그것을 사서
먹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예수 믿는 성도들 사이에 혼돈이 발생했습니다.
한쪽은 “예수 믿는 사람은 우상에 드려진 제물을 먹어서는 안 된다”와 또 다른 쪽은 “아무 문제가 없다”는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사실 고린도교회는 이 논쟁으로
몸살을 앓았습니다. 이런 일은 오늘날 예수 믿는 성도들 사이에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술이나 담배를 해서는 안 된다
또는 된다’ 와 같은 문제인 것입니다. 한국교회에서는 대단히
민감한 문제지만, 미국 성도들에게는 별 문제가 안 되기도 합니다.
여기서 먼저 명확히 해 둘 것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래야 앞으로 언제든지 교회 내에서 생길 수 있는 문제에 대해 잘 대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지금 다루고 있는 것은 구원을 받느냐 못 받느냐와 같은 그런 중대한 주제를 다루는
것은 아닙니다. 2) 죄인가 또는 죄가 아니냐에 관한 문제도 역시 아닙니다.
3) ‘맞다 틀리다’ 또는
‘해라 하지 말라’가 분명하게 성경에 언급되어 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4) 현실에서는 서로 생각이 달라 부딪힐
수 밖에 없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본질적인 교리 문제는 아니지만 신앙생활에서 중요하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을 다루려고 합니다. 바울 사도가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가는지 한 번 보려 합니다.
첫째, 자신의 주장은 확실하지만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을
피합니다. 1절 상반부에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라는 말을 보면, 우상 제물의 섭취에 대한
바울 사도 개인의 생각은 확실합니다. 세상에는 수 많은 신들이 있습니다(5절). 그러나 하나님은 오직 한 분 뿐이시고(4절) 모든 만물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6절).
그래서 이방인들이 섬기는 우상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기에 우상에 바친 제물도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 사도 자신의 주장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장을 간접적으로 말할 뿐입니다.
그 이유는 7절 상반부를 보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런 지식을 모든 성도가 소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 외에 다른 이방
신들을 인정하지 않는 성도들에게는 사실 우상제물이란 아무것도 아닙니다. 심지어 그것을 어느 장소에서
마음대로 먹는다 해도 문제가 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는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큰 충격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상에 바친 제물을 먹는
것은 우상과 관계를 맺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또 그들은 우상제물을 먹는 행동을 보면서 예수를 믿으면서
동시에 우상을 섬겨도 된다는 오해를 하게 됩니다. 심각한 것은 본인 양심은 허락하지 않지만 사람들 앞에서
괜찮은 척하며 제물을 먹는 사람들까지 나왔습니다. 이런 죄까지 짓게 만드는 모습을 보면서 바울은 더
신중하게 이 문제에 접근했던 것입니다.
둘째로, 1절 하반부를 보면, 자기 자신보다는 타인을 먼저 배려하는 사랑으로 덕을 세우는 신앙이 필요함을 주장합니다. 우상제물을 먹느냐 먹지 못하느냐에 대한 문제는 선과 악의 진리에 대한 싸움이 아닙니다.
이 문제를 둘러싼 성도들의 태도의 문제입니다. 상대를 서로 이해하고 사랑으로 대하지 못하는
데서 출발했던 것입니다.
우상 제물은 먹어도, 먹지 않아도 아무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각자 자유로운 판단의
문제에 불과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자유함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한 사람은 그것을 알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자유마저도 이런 지식을 갖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사랑으로 덕을 세우는 신앙을 더 강조합니다.
마지막으로, 덕을 세우는 신앙은 이렇게 결론 지을 수
있습니다. 1) 나보다 남을 더 생각합니다. 혹시라도 다른 성도들에게 미칠지 모르는 부정적 영향까지도
염두에 두게 됩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말하고 행동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는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말과 행동에 제한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자신에게 유익을 가져다
주고 자신의 의가 드러난다 해도 하나님이 원하는 바가 아니면 멈추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이 주는 절제의
열매입니다. 남의 잘못이 눈에 들어와서 즉각적으로 면전에서 말하고 싶지만 참습니다. 오히려 그 사람을 돕고 격려하며 기도하게 됩니다. 이것이 쌓여 여러분의
인격을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2) 무엇보다 비교우위를 갖지 않는 신앙입니다. 성도는 남보다 더 강한 믿음과 성경에 대한 지식을 더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일단 나와 상대를 비교하게 되면 누군가는 믿음이 강하고 올바르고 누군가는
약하고 틀린 믿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인정하려고 하겠습니까? 이런 취급을 당하는 사람은 맞고 틀리고를 떠나 일단은 기분 나쁠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에게는 상대를 기다려
주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올바른 성경의 진리와 믿음을 소유하게 될 때까지 배려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인내하지 못하는 못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남한테 내가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내가 가진 것, 알고
있는 것을 드러냅니다. 이것이 자랑이고 교만이 되는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덕을 세우는 신앙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내 행동이 먼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지를 생각합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가 힘들고 어려움에 빠지지 않도록 늘 신중합니다. 3절처럼 하나님은 그런 신앙의 소유자를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게 하시고, 그를
또한 높여 주십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성경의
진리를 주장하는 것에는 물러 설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비본질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는 내 자존심보다 사랑이
앞서야 합니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양보로 덮어질 때 갈등은 사라지게 됩니다. 사랑으로 덕을 세우는 신앙이 우리 공동체 안에서 더욱 풍성해지면 좋겠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 주인공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