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신(3): 나도 할 수 있습니다
로 16:8
헌신에 참 방해가 되는 것이 한 가지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름아닌 “나 같은 사람이 주의 일을 할 수 있을까?” 라는 내 속의 무의식적인 저항입니다. 오늘 보게 될 한 사람의
헌신을 통해 주의 일을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첫째, 하나님께 드려지는 헌신은 정말로 모든 성도가 드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의 ‘암블리아’라는 남성의 이름은 로마 당시에 너무나
흔한 노예 이름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당시 노예가 해방되는 경우가 성경에서 소개됩니다.
빌레몬서 1:9-10절입니다. 오네시모는 실제 노예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주인 빌레몬 집에서 도망쳐 나오게 됩니다. 그러다 잡혀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때 마침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 감옥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힘든
감옥생활 속에서도 오네시모를 개종시켜 믿음의 아들로 삼게 됩니다. 바울의 사역 속에서 더 많은 노예
출신들의 사람들이 개종하는 놀라운 일이 있었을 것을 가정해 봅니다. 이들 중에 한 사람이 바로 오늘
주인공일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 묘지(1세기) 카다콤에서 비석이 하나 발견 되었습니다. 비석에는 굵직한 글자가
쓰여 있었습니다. 성서학자들에 의하면 이것은 그 당시 교회에서 유명한 사람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게다가 그의 묘비 주변의 정교한 장식이 그것을 증명해 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상식을 벗어나는 것이 그 비석에 있었습니다. 어느 시대를 불문하고 사람이 죽으면 비석에 이름과 성을 기록합니다. 그런데
그 비석은 잘 장식되긴 했지만 그냥 이름만 암블리아로 크게 적혀 있었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그가 비록
교회에서 유명한 위치에 있긴 했지만 그의 신분이 노예였을 가능성을 뒷 받침 해 줍니다(바클레이 주석, p. 305).
비석의 주인공이 바울이 가리키는 암블리아인지는 의문이 여전히
남지만 하나 중요한 것을 발견합니다. 당시 로마 제국은 6천만
명의 노예를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노예가 믿음의 공동체에 들어왔을 때는 뭔가 달라졌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노예라는 신분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가장 무익한
사람이 주 안에서 가장 유익한 하나님의 사역에 헌신하는 사람으로 변화 되었던 것입니다(빌1:11).
세상이 모든 것을 막아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노예도 주
안에서 자신을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자유가 있습니다. 의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주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분들입니다. 누구의
부탁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스스로 일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가장 성도가 주님을 위해
자유롭게 할 수 있는 헌신은 전도입니다. 누구에게나 주님이 맡긴 일입니다. 어느 곳에서나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맡긴 한 영혼에
대한 사랑과 관심의 헌신이 2016년에 모두에게 있기를 소원합니다.
둘째,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환경일지라도 ‘주
안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됩니다. 로마서가 기록된 시기는 성경학자들에 의하면 바울의 3차 선교 여행시기 정도입니다. 대략 60년 정도이고 네로 황제가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던 그런 시절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당시 로마계급 사회 구조는 가장 하급구조에 노예들이 속해 있었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 자유는 허락되었겠지만 법적으로는 주인의 소유물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노예들이 새로운 세계를 맛보게 된 것은 바로 기독교의 영향이었습니다. ‘주 안에서’라는 단어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계급과 신분을 타파하고 사람이
사람으로 대접을 받는 그런 구조가 생겨난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완전한 새로운 세상이었을 것입니다.
로마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노예제도였습니다. 경작지를 돌보고 상층 사회가 요구하는 것을 생산해 내는 노동력을 제공했습니다.
주인이 요구하는 대로 쉬지 않고 부릴 수 있는 사회구조를 로마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구조가 파괴될 수 있다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반대로 그런 억압 속에 있던 자들에게는 얼마나
큰 기쁨이었겠습니까?
로마는 노예 사회구조라는 틀을 깨뜨리지 못하도록 여러 장치로
유지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예들이 교회에 들어오면 이 틀이 무너지는 일이 일어나곤 했습니다. 여전히 신분상으로는 종이지만 또 다른 신분을 주 안에서 가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서는 인간의 존엄성이 지켜지고 사랑의 관계가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노예인 오네시모는 주 안에서 형제로 대하도록 바울이 빌레몬에게
요청하게 됩니다(1:16). 너무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물론
이런 예는 극히 드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예가 생겨났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추구하는 것을 이
땅에서 실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 안에서 일어나는 일 입니다.
예수 밖에서는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소유물입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변화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 안에 들어올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 어느 누구도 종으로 삼을 수 없는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영적으로 사탄의 노예라는 사실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를 믿는 것은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환경에 들어와
복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아직도 이 복을 누리지 못하고, 맛보지
못한 분이 계십니까? 예수를 나의 구세주로, 내 인생의 주인으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이때 내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 맛을 모르기에 신앙생활이 신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험난한 세상에서 성도가 살맛 나는 이유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노예도 존경 받는 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모든 것을 가능하지 못하게 만드는 세상을 역으로 섬기는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암블리아가 노예의 신분을 벗어나 자유인으로 섬기다 죽었는지
아니면 여전히 노예로서 교회에서 섬기는 자로 살다 죽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노예라고 가정할 경우 그는
어떤 일을 교회에서 할 수 있었을까요? 아니면 어떤 계기로 자유인이 되었을 때 그는 교회를 위해 무슨
일을 했을까요? 그리고 어떤 일을 했기에 그가 죽었을 때 비문에 큰 글씨로 그의 이름을 교회가 적어
주었을까요?
성경은 아무것도 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주 안에서 유명한 자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존경 받는 자로 세워졌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본문에서 사용하는 ‘문안하라’는 의미는 인사하라는 뜻도 있지만 ‘존경하라’는 의미도 내포하기 때문입니다.
이 ‘문안하라’는 단어가 본문을 살펴보면 일반 사람들에게 사용 되었음을 보여줍니다(3, 5,
6, 7절 등). 그가 노예였다면 그에게 문안하라는 의미가 단지 안부를 전하라(쉬운성경)라는 의미라 할지라도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안하라’가
존경과 감사를 나타내라는 의미로 사용 되었다면 그는 대단한 인물임을 알려주게 됩니다.
암불리아를 소개하면서 바울은 ‘나의 사랑하는’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합니다. 물론 9절에도 다른 사람에게도 사용되었습니다. 바울 사도의 사랑 받는 자로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바울이 교회의
영적 지도자라면 이 사람들은 바울이 죽고 난 뒤 다음 세대를 이끌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성경학자들이 제공한 사실들을 기초하여 볼 때 노예출신의
그가 초대교회를 이끌어 갈 지도자로 부상함을 보여줍니다. 모든 것이 불가능한 현실에서 가능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가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주 안에 들어와 세상을 섬기는 자로 헌신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유일한 답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헌신은 신분에 상관없이
하나님은 존귀한 자로 그를 높여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다스리는 주님의 방식입니다.
노예로 있던 자가 무슨 학식이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얽매던 세상을 거꾸로 섬겼다는 것입니다. 그가
세상을 섬기는 자가 되었을 때 그는 존귀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만큼은 가장 확실한 것입니다. 우리 역시 주 안에서 섬기는 자가 될 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유명한 자가 되고, 무익한 자가 유익한 자가 되는 놀라운 변화를 체험하게 됩니다. 크리스천들은
세상에서 높은 자리에서 스스로의 자존감을 찾는 사람이 아닙니다.
믿음의 성도는 헌신에서 자신의 자존감을 찾는 섬김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올해 한 해 믿음의 공동체를 섬기시고, 세상을 섬기는
코넬한인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