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신(4): 평범하지만 감동이 됩니다
로 16: 12
예수를 영접하고 난 뒤 우리에게 일어나는 많은 변화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눈에 보이는 하나는 헌신하는
삶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내가 관심을 가지고 주의 일을 하기 시작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바라보는 한 평범한 여인의 헌신된 모습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하나님께 대한 헌신은
여성이라고 해서 소극적이지 않습니다. 로마서의 배경은 모든 것들이 남성위주의 사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초대교회에서 여성들의 헌신만큼은 매우 활발했습니다. 12절 한 구절에서 3명의 여인이 언급됩니다. 앞의 두 명, 드루배나와 드루보사는
자매인 것 같습니다. 세 명의 자매 모두에게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수고한”이라는 공통적인 수식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수고’라는 단어는 능동적인 움직임을 의미합니다. 그들의 말이 아니라 실제로 몸이 움직이는 봉사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버시라는 여성은 앞의 두 자매들과는 다른 수식어인 “많이 수고한”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16장 전체에서 20명이 넘는 이름들이 나열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표현은 버시에게만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버시는 부지런하고 많은 헌신들이 그의 기억
속에 남았던 것 같습니다.
어떤 수고를
했을까? 궁금해
집니다. 우선 그녀의 수고는 주 안에서의 수고로움입니다.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한 일이었습니다. 예배, 전도와 선교, 구제와 봉사, 교육, 친교 등 초대교회가 수행했던 모든
일에 참가하고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한가지
예를 들면, 초대교회
예배는 주로 2부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일부는 찬양을 드리고 나서
말씀을 읽거나 아니면 주님의 행적들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 후 온 교우가 성찬식을 하며 친교를
나누는 시간을 따로 가지게 됩니다. 초기에는 성찬이 보통 식사의 한 부분을 차지했다고 합니다(곤잘레스, 158). 교회에 올 때 성심껏 음식을 준비해서 공동식사를 한 후 성찬식이 따로
드려졌을 것입니다. 한 주에 한 번 모이는 성찬과 음식 준비에 상당한 시간과 누군가의 헌신들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예수님
사역 당시에도 그늘진 곳에서 수고한 여성들의 모습이 있습니다. 특별히 그들은 “자신들의 소유로” 섬기는 일에 드렸다고 눅 8:3절에는 기록하고 있습니다(“다른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오늘 본문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합니다. 교회에서는 여성이라고 해서 주의 일에 소극적이지 않음을 성경은 말해 줍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제자 된 모든 성도는 어떤 이유에서이든지 주의 일에 소극적이지
말아야 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저는 10년 안에 제직헌신 서약서가 없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한 해에 하나씩 줄여 갈 것입니다. 오늘
임명 받은 제직들은 내게 있는 모든 이유들을 주의 헌신 앞에 다 내려 놓는 주님의 제직들이 다 되실 줄 믿습니다.
둘째, 주 안에서 드려지는 어떤
평범한 헌신도 순수한 동기와 목적으로 행해 져야 합니다. 버시의 많은 수고는 “주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인간적인 열심과는 구별되는 것입니다. 오직 주를 위한 섬김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헌신입니다. 믿음에 기초한 열심입니다. 자신의 힘에서 나오는 헌신이 아니었습니다. 자기의 의를 드러내려는 열심도 아닙니다.
오직 주 안에서 주를 위하여 주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섬김이었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선 감정에 이끌리지 말아야 합니다. 감정은 우리의 헌신을 일시적으로만 나오게 만듭니다.
그리고 타인을 의식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하기에 나도 해야 하는 수동적인 움직임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이루어지는 헌신은 주님만이 중심이 됩니다. 사람이 있건 없건 그냥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중심적이지 않습니다. 자신이 피곤하면 그만두고 내 할 일이 있으면 가까이 가지도 않는 그런 헌신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주인이신 주님이 이타적인 삶을 사셨기에 우리도 그럴게 해야 합니다. 이상하고
어색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헌신은 뭔가 사회적인 이슈가 있으면 자신의 신념이 발동되어 일어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을 교회는 주의해야 합니다.
세상이 하기에 우리도 해야 할 이유는 꼭 없습니다. 가만히 보면 교회는 늘 해오던
것인데 세상은 그것을 조금 포장을 하는 것뿐입니다. 사실 포장비용만 더 생겨나게 할 뿐입니다.
교회는 순수한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구제와 봉사에 참여해야 합니다.
주 안에서
이루어진 버시의 많은 수고는 주님이 나의 구원주가 되어 주신 그 감격에 보답하는 헌신이었습니다. 죄로 인해 죽음이라는 심판 가운데
있는 나에게 찾아 오신 주님에 대한 자연스런 보답입니다. 성도의 헌신은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은혜가 내게
있어야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헌신은 그 누구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멈출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 속의 구원의 감격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기분이 나를 좌우하지 못합니다. 분위기가 나를 몰아갈 수 없습니다. 오직 헌신은 내 속의 영이 나의 구원에 대한 깊은 반응으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사실 하나를 로마서 16장에 언급된 사람들에게서 발견해야 합니다. 한 사람도 그의 직분을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초대교회는 이미 교회 내에 직분이 제도화 되었습니다. 목사와 장로,
집사 그리고 교사와 감독 등 다양한 직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수고를 언급할
때 그 직분 때문에 그들이 더 수고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이루어지는 헌신은 직분이 주는
부담감으로 행하지 않았음을 말해 줍니다.
우리의
직분이 나를 헌신하게 만든다면 우리는 부담스러워질 것입니다. 직분이 나를 일하지 않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주 안에서
새롭게 된 나 자신의 존재의 변화 때문에 드려지는 헌신은 세상의 봉사와 차별화를 만들어 냅니다. 제직을 맡은
모든 분들이 주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며 충성스럽게 헌신하는 한 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평범한 성도가 드리는 헌신이 하나님과 사람에게 감동을 줍니다. 성경은 버시의 이름을 단 한번 언급합니다. 그리고 어떤 헌신이 바울로 하여금 이 여인의 이름을 적게 만들었는지 이유도 사실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버시라는 한 여인에게서 감동을 받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그녀에 대해
붙여지는 또 다른 수식어는 ‘사랑하는’ 이라는 단어 때문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매우 감정적인 표현처럼 느껴집니다. 혹시 사도 바울이 개인적으로 이 여성에게 이성적인 마음을 가졌다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것은 이성적인 감정이 아닙니다. 로마서 16장 전체에서 쓰여진 인물들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5절에 내가 사랑하는 에배네도(남성), 8절에, 내 사랑하는 암블리아(남성 노예?), 9절에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남성)
등이 있습니다. 모두 남성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붙여진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사랑한다’는 표현은 이성을 넘어섬을 의미합니다.
버시의
많은 수고는 사도 바울에게만 감동을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모든 성도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 감동은 잔잔히 그들의 마음에 자리잡아
그녀를 늘 생각나게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늘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녀는
힘들고 어려운 일이 교회에 발생하면 함께 기도했습니다. 문제를 보고 문제되게 놓아 두지 않는 성도의 삶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돌아보는 살핌이 있었습니다. 아픔과 고민이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 위로하고
함께 그 문제를 풀어 갔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에 막힘이 있을 때 함께 아파했습니다. 교회가 이루는 모든 일에 함께 동참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자는 함께 합니다. 기쁨도 슬픔도 모든 것을 나누는 자입니다. 그래서 가장 인생에서 사랑하는 자는 부부입니다.
교회는 신랑 되신 주님과 우리 성도가 부부와 같은 삶을 나누어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과 친밀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가 어디가 약한 곳이 있는가? 더 돌보고 위로할 부분이 어디인가를 살피는 분들이 많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보살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수고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어야 합니다. 다른 것이 끼어들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을 위해 교회는 움직일 뿐입니다.
앞으로
장로님들이 세워지면 교회는 권사님들과 안수 집사님들이 세워지게 될 것입니다.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섬기는 교회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세워질 리더십을 통해 더 구체적으로 깊이 있게 사역이 이루어 질 것입니다. 사람이 없어 찾아
다니는 목회가 아니라 주의 사역에 동참하실 분들이 넘쳐나는 꿈을 꾸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꿈이 이루어질
것을 주 안에서 기대해야 합니다. 모든
교우가 내 일처럼 여기고 이루려는 의지가 살아나야 합니다.
이 모든
계획들을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 내는 놀라운2016년 새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