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1): 죄에서 구원하시는 분
마 1:1, 18-21
코넬교회 성도님들은 2016년 상반기 동안 예수님에 대해
푹 빠지는 시간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 가장 잘 알아야 할 분이십니다. 과연 우리는 예수를 왜 믿고 무엇을 믿는가를 명확히 알고 신앙생활을 해 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그 첫 시간으로 마태복음 1:1절이 말씀해 주고 있는 예수님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구약에 이어 신약이 시작되는 가장 첫 구절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내용부터 살펴 보시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이 말씀은 단지 예수님이 아브라함의 육신적인 혈통이라는
그런 의미를 넘어서게 됩니다. ‘예수님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라는 말은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의 성취를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을 창세기 12장만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곳에도 놀라운 복이 아브라함에게 선포됩니다. 하지만 더 크고 놀라운 복은 아브라함의
말년에 주어집니다. 그 복을 받는 시기를 잘 살펴보는 것도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그 복은 바로 이삭을 하나님께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렸던 창 22장 그 사건 후에 바로 주어진
것입니다.
이삭의 번제 사건 후(22:16) 바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축복하십니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고 창 22:17-18에서 약속해 주셨습니다.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얻으리라’는 말씀은 매우 큰 영적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천하만민이 복을 얻는다는 의미는 아브라함의
씨를 통해 구원자, 메시야가 나올 것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는 말씀은 구원자 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승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마치는
패배가 아니라 부활을 선포합니다. 사탄의 이김이 아니라 하나님의 승리가 있습니다. 부활은 지옥의 문을 열게 한 사탄을 쳐 부수는 승리의 시간입니다. 인간의 죄로 인해 주어졌던
죽음과 사망을 이기는 사건입니다. 영생의 문을 열어 젖히는 은혜의 사건입니다. 인간이 받은 은혜 중 가장 큰 것을 허락 받는 구원의 자리입니다. 이 모든 것이 아브라함을
통해 예언된 것입니다.
얼마나 큰 복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졌습니까? 우리는
단지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후손으로 오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사망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아브라함에게 예언한 것입니다. 이 예언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린 사건에서 부활의
믿음을 경험한 후에 받았다는 것이 의미가 더욱 있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입니다. 예수님의 혈통이 다윗 왕의 후손이라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세상의 왕처럼 왕궁에서 태어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요셉은 왕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목수에 불과했습니다. 목수의 아들이 다윗 왕의 후손이라는 의미는 조상 중에 훌륭한 사람이 있다는 정도의 언급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신 분이므로 요셉의 피가 섞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이라는 뜻도 육신적인 의미를 넘어간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하나님은 왕이 된 다윗에게 한 가지 약속을 나단 선지자를 통해
전달합니다. 삼하7:16절에 의하면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최고의 축복이 주어집니다. 자신의 나라와 왕위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세상 나라가 세워지고 사라져 가는 것을 본 다윗에게는 놀라운 축복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 이후 이스라엘 역사를
잘 알고 있습니다. 다윗에게 준 이 약속이 바로 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아들 솔로몬이
죽자 바로 나라는 둘로 나누어집니다. 통일 왕국은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남은 남유다 마저 주전 586년에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망하게 됩니다.
그 이후도 페르시아의 통치가 이어졌습니다. 이어서 알렉산드가 다스리고 로마 통치
이후에도 나라 없는 백성들로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에게 한 영원한 약속은
어떤 의미입니까? 사실 그 약속을 성취하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주님이 세운 하나님 나라는 사람이 무너뜨릴 수 없고 그 어떤 악한 것도 존재하지
않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에게 준 약속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가 왕으로 다스리는 나라를 의미합니다. 그 나라에는 누구나 초대받아 백성이 되는 것이 제한받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이 그들의 주인 되심을 믿는 자는 모두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늘 우리와
함께 계셔 눈물도 없고 사망도 없고 애통해 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는 하나님의 통치만이 있는 곳입니다(계21:3-4).
믿는 자가 죽어서 들어갈 천국인 것입니다. 그곳에는 죄가 없습니다.
죄를 짓고자 해도 지을 수 없는 온전한 모습으로 변하는 곳입니다. 오직 의인들만
들어가는 곳입니다.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고 죽이고 질투하는 세상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곳입니다.
그 나라에 우리를 들어가게 하려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나라에 이르는
새로운 길이 되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단지 그 길을 믿음으로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그 문으로 들어서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왕 되심을 인정하고 그분의 다스림을
받기만 하면 됩니다. 이미 천국에서 누릴 평강을 누리며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리며 살아가는 백성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라는 단어는 ‘메시야’라는 히브리어를 번역한 것입니다.
‘메시야’는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시대에 오직 선지자, 제사장, 왕만이 기름부음을 받음을
알고 있습니다.
왕은 전쟁으로 백성을 구원합니다. 제사장은 사람들이 지은 죄를 용서받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 제사를 주관하는 중보자 역할을 합니다. 선지자는 하나님 말씀에서 잘못된 길로 가는
사람들에게 심판을 면하도록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른 길로 가라고 인도하는 자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주님은
이 땅에서 세 가지 역할을 다 감당하셨습니다. 하지만 실제 세 사지 직책 중 어느 한 가지도 갖고 이 땅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에게 제사장 예수, 왕 예수,
선지자 예수라는 타이틀이 직접 붙이지 않습니다.
마태는 주님을 ‘그리스도’로 신약의 첫 장 첫 절에서 부릅니다. 주님은 ‘메시야’입니다. 세상에서 기름부음 받는 자들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비록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의미는 예수님께 주어지지만 왕, 제사장, 선지자들과는 다름을 알려 주기 위해 ‘그리스도’라는 단어를
직접 사용한 것입니다.
그 차이를 마1:21절은 잘 소개합니다.
“그가 자기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해 낼 것이다.” ‘그가’라는 의미는 ‘he
himself’라는 의미로 그분이 직접 죄에서 구원할 당사자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다음으로, ‘자기의 백성’이라고 말씀하기에 유대인만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선택 받기로 예정된 자들만 의미한다고 한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21절이 말하는 자기의 백성은 그분이 지으신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지
않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자기의 백성이라는 의미는 모든 사람들을 말합니다. 모든 사람들의 죄를 구원하신 분이심을 선포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잘못 오해할 수 있는 것은 보편구원론입니다. 믿는 자나 안 믿는 자나 모든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여 천국에 이르게 하신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대속물로 주셨습니다. 십자가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어떤 사람도 주님의 십자가 구속의 은혜를 받을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모든 인류의 죄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구원을 받을 수 있지만 그 구원은 오직 믿는
자에게만 허락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에게 주어진 ‘구원자’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세상의 왕 같이 단지 백성들을 적으로부터 지키고 로마로부터 해방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예수님을 단지 나의 힘든 세상 일에서 탈출시켜 주실 분으로만 믿어서는
안됩니다. 그런 것들은 이 세상의 사람이 해 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들에게 ‘영웅’이라 불러 줍니다.
하지만 그들의 구원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다시 반복되는 아픔과 고통이 인간에게
주어집니다. 그래서 사람이 고안해 낸 것은 ‘죽기 전에 잘 살고 죽으면
끝이다’ 라는 생각이 나왔습니다. 그것을 ‘철학’이라 부릅니다. 철학은 내세를 다루지 않습니다.
그래서 죽음 너머 세상을 무시합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있다면 그것 너머에도 영원한 세상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종교가 가르칩니다. 종교의 문제는 인간이 아는 것만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상은 하지만 실체를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만든 수많은 종교들이 세상에 생겨난
것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온 이유는 인간이 가르치는 것을 맞다고 말씀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아는 것이 ‘틀리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틀린다는 것을 아는 존재를 ‘신’이라 부릅니다. 그래서 인간이 알 수도 없고, 이루어
낼 수도 없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하늘 보좌를 버리고 땅으로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죽음 너머 있는 영원한 세상에서 우리가 누려야 할 것을
고민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종교는 죽음 너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는 하지만 영원을 누릴 비밀을 알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 비밀을 사람에게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이것을 ‘계시’(나타냄)라고 부릅니다. 세상 종교는 이 계시가 없어 망하는 것입니다. 계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의 실체를 그대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을 인간에게
분명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그제서야 하나님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장 큰 비밀이 바로 인간에 대한 구원의 계획, 십자가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를 이 땅에 보내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 이 있는 곳으로 올 수 있도록 하는 계획이었습니다.
그 계획은 사실 인류의 조상인 아담에게서부터 보여주었습니다(창3:15, 21).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핑계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글로 쓰여져 있기에 분명한 증거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는 자신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서 보여 주었던 그 계획이
주님에 의해 실현 되었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유대교에서 개종한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복음서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구약의 기름 부음 받은 사람들과 어떻게 다른 가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선지자처럼 하늘로부터 내려 주시는 말씀을 받는 자가 아닙니다. 주님은 말씀 그 자체이십니다.
구약의 제사장처럼 죄 지은자를 위해 대신 동물을 잡아 그 사람의 죄 용서함을 대신 간구하는 중재자가 아닙니다.
죄로 인해 심판을 받게 될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직접 우리를 대신해서 희생제물이 되어 죽으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살아나셔서 그 죽음이 헛되지 않고 말씀하신 대로 맞다는 것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첫 시간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구속해
주시는 구원주’이심을 마음으로 믿고 입술로 다시 한번 고백해 보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