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2):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
마 1: 22-23; 18:19-20
예수님에 대해 마태복음을 살피면서
알아가고 있습니다. 한번 따라 해 보시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첫째,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되는지 알기 위해서는 먼저 시도해 볼 것이 하나 있습니다. 마 18:20말씀입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약속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혹시 계시면 이 말씀을 믿고 한번 도전해 보시기 바랍니다.
더 중요한 것은 앞 절인 마 18:19절의 약속입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사람이 기도할 때 우리와 함께 해주시고 그 기도에 응답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렇다면 한번 속는 셈치고 하나님의 임재를 도전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도전을 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만족해야 합니다. 기도를 하기 전에 최소 의 인원이
필요합니다. 반드시 나 외에 다른 한 사람이 함께 하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올해 이타카의2월이 작년보다 덜 추웠지만 그래도 한 주 이상 강 추위가 지나갔습니다. 힘이 들고 어려운 때면 늘 누군가 옆에 같이 있기만 해도 힘이 납니다. 그래서 친구가 좋고
가족이 좋습니다.
친구는 어려울 때에 힘이 되어줍니다. 특별히 청년들에게 부탁 드립니다.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많은 믿음의 친구들을 만드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만난 분들이
험한 세상 살아갈 때 힘이 되어줄 친구들입니다. 공부하는 일에 집중해야 하겠지만 좋은 믿음의 친구들을 만나는데도
지혜롭게 시간을 할애하시기 바랍니다.
이곳에서 만난 형제 자매가 여러분의 위기의 순간에 기도 응답의
비결이 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사귀지 못한다면 진정 나를 위해 기도해 줄 수 있는 기도의 동역자 한 사람은 최소한 만나기를 부탁 드립니다.
기혼 되시는 분들은 추위가 부부가 함께 더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될 줄 압니다. 아이들을 재우고 부부가 함께하는 시간을 마련하기 바랍니다. 지금 현재 가정에 직면한 문제와
이곳을 떠나 미래를 준비하는 문제들을 두고 더 많이 기도하는 시간을 마련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두 사람이 하는 기도에 함께 하심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나의 기도제목을
나눌 친구를 만드시고, 기혼자들은 부부가 함께 기도할 때 하나님의 임재를 몸으로 체험하는 시간이 허락될 줄로
믿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한번도 하나님의 임재를 내가 직접 체험하지 못한 분들이 혹시 계십니까?
일단 한번 이 약속을 붙들고 첫 도전부터 시도해 보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다는
확신을 갖기 위해서는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내가 지금 겪고 있는 모든 삶을 직접 체험하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은 주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거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초월적인 하나님이 우리 삶 속으로 들어
오셨다는 것입니다. 높고 먼 하늘에만 계시는 하나님이 이 땅에 와서 산다는 것입니다. 인간과는 먼 존재로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삶을 같이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같은 복이 우리에게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 사시며 이민자의 삶도 살아 보셨습니다. 이상하십니까? 언제냐고 묻는다면 주님은 분명 어린 시절 헤롯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 가십니다(마2:13). 마 2:15절을 보면
주님은 헤롯이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었다고 말씀합니다. 기간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혹시 좀 길게 잡는다면 예수님은 어린 시절 애굽 말을 배웠는지도 모릅니다. 분명
이민자로 살았습니다. 이 땅에서 사춘기를 지내며 아이들의 질풍노도와 같은 그런 감정도 이해하십니다.
20대를 지나며 청년기의 열정도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공생애 나이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유대인의 관례상 30살에 공생애가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서(2:19, 6:1, 12:1) 세 번의
유월절을 지내는 것을 참조하여 주님의 공생애 기간이3년 정도 되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런 것으로 추정해보면 주님은 이 땅에서 태어나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대략 33년의 생애를 사셨다고
말하곤 합니다.
제가 이번에 이디오피 선교를 가서 현지 목사님에게 그곳 남자들
평균 수명을 물었습니다. 대략 45-60세 정도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렇다면2천 년 전 남자들의 평균 수명이 얼마나 될까요? 대략적으로40-45세로 추정합니다. 주님의 나이는 대략 적으로 추정한 것이지만 사람의 일생을
다 살아보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 인생이 태어나고 죽기까지의 과정을 다 경험하셨기에 인생의 희노애락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문제와 슬픔을 더 잘 이해하고 아파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현실이 냉정하게 우리를 실망시키더라도 우리가 경험하는
것을 다 체험하신 주님이 나를 먼저 이해하십니다. 때로는 내가 겪는 고통과 질병이 가장 크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말로만 사랑하시고 나의 아픔을 모른다고 소리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은 우리가 겪고 있는 그 모든 것을 다 알고 체험했다는 의미입니다. 게다가 주님은 십자가에서
이 세상의 모든 허물과 질고를 다 짊어지셨습니다.
그러니 지금 내가 진 짐은 십자가에서 주님이 감당하신 세상 모든
짐과는 비교가 될 수 없습니다. 나에게 공허와 흑암이 앞에 있고 혼돈스럽게 만드는 현실이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한 가지 사실을 꼭 붙잡으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의 모든 고난을 이미 체험하셨고 나의 고통 가운데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힘들
때 제발 나의 짐만 바라보지 마시고 내 곁에 함께 아파하시고 같이 짐을 지고 계시는 주님께 시선을 한번 돌려 보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그렇다면 나와 함께하시는 것은 분명한데 왜 하나님의 임재를 전혀
느끼지 못할까요? 가장 근본적인 답부터 드리고자 합니다. 내가 주님의 백성이 아닐 수 있습니다.
미국 대통령과 미국에 함께 살아도 그다지 연관이 없습니다. 나는 한국 시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출석한다고 해서 모두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주일을
습관처럼 잘 지키지만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했다면 여전히 하나님은 멀리 계시는 분으로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요청합니다. 계3:20에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주님은 우리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거하기를
원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 문은 밖에서 열리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만 열리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의 심령 속으로 들어오도록
내가 허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허락할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예수를 나의 구주로,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기를 원하지 않는 분에게는 주님이
함께 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미 믿은 분들은 또 이렇게 반문하실 수 있습니다. 나는 이미 주님을 영접한 사람인데 왜
나는 그분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 해답도 간단합니다. 내가 내 삶의 주인 될 때 주님은 더 이상 나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주인이 되는 때는
우리가 교만할 때입니다. 교만은 주님을 내 속에서 몰아내어 버립니다.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기분이 그분을 종으로 삼아 버립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죄를 지을 때 입니다. 죄짓는 순간은 말씀에 불순종하는 때입니다.
교만은 어느 정도 주님을 인정하고 주님을 곁에 세워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순종의
죄는 완전히 주님을 무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한 공동체 내에서 이런 대우를 받는다면 당장 그곳을
떠날 것입니다.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무시당하고 외면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함께 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성도는 늘 깨어서 내가 교만에 가까운 위험 수준에 있는지, 아니면 주님과의 관계가 정말 위험한
단계인지를 늘 확인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간단합니다. 교회에
주어진 권위에 순종하고 있는지, 말씀을 무시하고 내 힘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기도하는 것이 일주일이 넘어가는지, 성경을 펴 본지가 언제인지 모른다면 우리는 이미 위험 수준을
넘어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언제,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가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고전 3:16에 의하면,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을 보면 ‘너희’라는 사람은 믿는 자를 의미합니다. 우리 속에 계시는
하나님의 영을 성령이라 부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영을 소유하게 됩니다.
요 14:16절은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라.” 하나님의 영은 믿는 자 안에 영원히 거할 것을 약속합니다.
엡1:13절은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성령은 우리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이 내게서 일어날 때 주어진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를
영접하고 믿는 순간에 우리 속에 오셔서 성령으로 영원히 함께 해 주십니다. 이것이 임마누엘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왜 믿는 나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는데 왜 나를 돕지 않으십니까?(신정론) 라는 마지막 질문이 남습니다. 고통 가운데 있는 성도들이 던지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해서 모두 다 고쳐주고 내게는 아무런 사고나 질병도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부모와 늘 함께 있는 아이에게도 사고가
발생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부주의가 우리 인생의 사고와 질병의 원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주무시지도 않고 졸지도 않는다고 하십니다(시 121:4).
우리 삶에 하나님의 부재가 느껴지는 또 다른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십자가를 보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아들을 철저히 외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님과 함께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겪는 고통의 순간에도 하나님은
주님을 떠나지 않으시고 그분과 함께 계셨습니다(몰트만의 신학). 우리가
생각하기에 고통을 당한다는 것 자체는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주님과 십자가에서 함께 하셔도 십자가의 그 고통을 덜어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위한 구원의 계획이 망쳐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성도님들께 참 힘들게 말씀 드립니다. 우리의 구원이 질병이나 사고보다 더
큰 것이기에 때로는 나의 고통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들이
다 지난 뒤 우리가 하는 고백이 있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이 고난이
나에게 없었다면 주님을 알지 못하고 외면했을 것입니다. 주님 힘든 시간, 어려운 질병 주셔서 주님 알게 되었고 주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죄인에게 고통을 통하여
구원 허락하심을 감사합니다.” 이런 간증들을 듣습니다.
인간은 고난만을 보며 하나님의 부재를 느낍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가운데도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임마누엘입니다. 고난과 아픔, 질병과 죽음 가운데 함께 해주십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있는 하나님을 바라보기를 진정 원하십니다. 이것을 증명하는 것이 부활사건입니다. 로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우리의 죽음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에 우리가 살아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 있는 모두는 태어남에서 죽음 그리고 다시 살리시고 그 이후 영원히
함께 하는 하나님을 믿는 복된 성도님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