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1): 어색함
요일 4:9, 요 19:23-24, 고전 15:4-6, 마 16:24
저는 십자가를 언제 처음 보았는지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기억하는 것은 누군가의 목에 걸린 십자가로 생각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목에 걸고 다니는 것이구나’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을 흘러 다시 십자가를 바라보는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그때에는 십자가가 너무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상징도 아니고 장식도 아닌 생명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십자가를 온전히 이해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이기까지 어색함이 있었습니다. 그 어색함은 저만 느꼈던 감정이 아닐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동감하는 부분이고 앞으로도 그런 분들이 생길 수 있을 것입니다. 한 가지 감사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어색함을 느끼지만 또한 그분들도 십자가를 이해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저도 그런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첫째, 십자가는 외형상 어색함이 있습니다. 십자가 모양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 보다 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지난번 비전트립을 갔을 때 하나 구입한 이디오피아 십자가들입니다. 80여 개의 모양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세상에 알려진 십자가는 더 많이 있겠지요.
그 중 기독교의 상징으로 사용되는 것은 ‘그릭 십자가’입니다. 두 개의 나무가 서로 교차하게 만들어진 것으로 상하좌우의 길이가 달라 불균형을 이룹니다. 이것이 뭔가 좀 어색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균형을 이루는 그릭 십자가도 있습니다. 이것은 주로 많은 초대 교회들의 바닥에 깔려 있던 것으로 현재에는 적십자가 그 모양을 사용합니다.
우리의 관심은주님을 좇는 자들의 상징으로 사용된 십자가입니다. 그 외형적 모양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명들이 있습니다. 상하는 하나님과 인간의 사랑을 의미하고 좌우는 이웃과의 사랑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아무리 인간의 사랑이 크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향한 사랑과 비교할 수 없음을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색함으로 다가온다면 곤란합니다. 사랑이 어색해지는 것은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의 사랑이 왜곡 되었습니다.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주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웃에 대한 사랑을 무시하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우선적인 것이 우선될 때 모든 것이 선하게 이루어진다는 진리를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9절은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이 구절은 어쩌면 예수님 입장에서는 하나님께 배신감 느끼는 구절입니다. 대신 우리는 이 구절을 읽는 순간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소중한 대상인가를 느끼고 감격하는 구절입니다.
독생자를 희생시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바로 여러분과 저라는 사실에 감격하지 않으십니까? 우리가 그렇게 소중한 존재입니까? 조금만 힘들어도 하나님을 원망했던 광야에서의 이스라엘과 같은 존재가 아닙니까? 다 죽이고 새로운 민족을 선택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 끝없이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사실이 너무 감사할 뿐입니다. 십자가는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그 사랑에 우리는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의 외형상의 어색함은 우리를 향하신 사랑의 깊이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사랑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보다 더 깊고 긴 사랑은 존재할 수 없음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제 십자가의 외형상의 어색함이 주님의 사랑을 느끼는 자리가 되기 바랍니다.
둘째, 십자가는 한 남자가 그 위에서 벌거벗겨 죽었다는 어색함이 있습니다. 십자가 형은 가장 악랄한 죄인들에 대해서만 실행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수치를주기 위해 벌거벗겨 사형에 처했습니다. 그러면 주님도 그렇게 돌아가셨을까요? 어찌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 앞에 벌거벗김을 당할 수 있습니까? 아무리 자신이 죽으시고 인간을 살리는 고귀한 사명을 가지고 오셨지만 자신의 수치를 다 드러내기까지 그 임무를 수행한다는 것은 좀 그렇습니다. 십자가에서 죽긴 하되 좀 어색한 것은 빼고 뭐 그런 식은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성경은 당시 죄인들과 동일하게 예수님을 취급 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역사의 현장을 요19: 23-24은 소개합니다. 분명히 주님의 옷이 벗겨집니다. 설마 속옷은 아니겠지요? 라고 말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겉 옷만 벗겨진 것이 아니라 속 옷도 다 벗겨져 나체가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주님의 속 옷을 벗겨 군인들이 제비 뽑아 나누어 가지려는 모습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24절).
한 죄 없는남자가 세상 앞에서 벌거벗겨 죽어 간다는 것이 참 어색합니다. 그것도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지음을 받은 인간들에 의해 수치를 당하는 모습입니다.
세상 신화에는신이 만든 인간들이 너무 시끄러워 잠을 못자게 해서 소음을 없애기 위해 다 죽이려고 홍수를 내었다는 신화도 있습니다. 그런데 신이 인간에게 놀림을 당하는 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을 이렇게 보여주셨습니다. 자존심, 배신감, 수치심 다 버리셨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해야만 우리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살 수 있도록 하시는 미션에만 신경을 집중하셨습니다.
한 순간 감정으로 대했다면 하나님의 분노를 어떻게 우리 피조물이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이 그렇게 죽어가는 모습 앞에 그 아들에 대한 사랑을 어둠으로 덮으시고(마 27:45) 그 아들과 하나님 만이 나눌 수 있는 대화를 하셨습니다. 아무도 두 분의 은밀한 사랑의 대화를 들을 수 없도록 땅이 흔들리며 사람들의 귀를 어둡게 만들었습니다(마 27:51). 사람들은 ‘하나님의 분노’라고 말하지만 사실 하나님은 벌거 벗겨진 아들의 수치를 어둠으로 덮고 위로와 사랑으로 다가오셨던 아들에 대한 사랑의 장면인 것입니다.
주님이 벌거벗긴 이유는 시 22:18절의 예언의 말씀(“그들이 둘러서서 내겉옷을 나누고, 내 속옷을 넣고서는 제비를 뽑았다”)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예언을 이루는 것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질문할수 있습니다. 주님은 한 가지도 빠짐없이 예언을 이루심으로 온전히 구약과 신약의 말씀이 다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구약의 말씀은 주님을 예언한 것이고 신약은 예언된 주님이 실제로 이루시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확신을 다시 심어주신 것입니다.
한 가지더 주님이 벌거 벗겨진 이유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그들은 서로가 벌거벗음을 부끄럽게 느낍니다. 주님은 죄로 인해 인간들이 느끼는 수치를 제거하시기 위해 그분이 직접 십자가 위에서벌거 벗었던 것입니다. 죄에 대한 용서함은 우리가 느끼는 죄에 대한 수치감마저 완전히 없애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인간은 늘 스트레스와 우울증과 정신 이상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온갖 죄에 대한 값도 지불했지만 죄로 인한 수치심까지도 다 덮을 수 있음을 십자가는 보여주신 것입니다. 십자가는우리 인간을 위한 완전한 사랑을 보여 주심입니다. 십자가의 한 남성의 벌거 벗김은 어색함이 아니라 죄를 지어 죽을 수 밖에 없는 피조물을 향한 진정한 사랑입니다. 십자가는 주님이 벌거 벗기까지 우리를 향한 사랑을 확증해 주신 소중한 장소입니다.
셋째, 십자가는 죽는 곳인데 살아나는 생명의 역사가 있어 좀 어색합니다. 십자가는 모두가 죽음으로 끝이 나는 곳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을 당하고 그 어느 누구도 살아나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철저하게 십자가는 사람을 죽이고 확실히 죽을때까지 죽이는 처형법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십자가 형을 받고 살 수 있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살아난 것은 기적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이 시간 속에서 일어났습니다. 이것을 ‘역사’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주님이그 일을 했음에도 사람들은 그 사건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한 번도 인류는 부활을 경험해 보지못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금도 병원에서 죽은 줄 알고 두었는데 살아났다는 이야기가 가끔 뉴스에 나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죽습니다. 죽지 않는 부활로 살아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에서 산 자는 주님뿐입니다.
인류는 주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까지 진정한 복음을 듣지 못했습니다. 복음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예수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죽으심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그분은 죽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죽음으로만 끝을 내려고 합니다. 결국 십자가는 예수를 믿는 자는 주님과 같이 다시 살아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믿음을 주는 도구입니다.
세상은 아직도 주님이 다시 살아나셨음에도 불구하고 거짓이라고 사기라고 말합니다. ‘죽기는 죽었는데 부활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그의 시체를 훔쳐갔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체면상태에 있었다. 그로므로 그가 확실히 죽은 것도 아니다. 그가 산 것은 단지 체면상태에서 깨어난 것에 불과하기에 부활이 아니다. 십자가는 예수가 죽고 살아났다는 사실에 대해 인정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부활은 거짓이 아니라 수 많은 사람들이 목격하고 증언한 사실입니다(고전 15:4-6).
그러므로 믿는 자는 불신자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십자가를 바라보지 말아야 합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주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동일한 믿음을 고백하는 공동체임을 믿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음이 아닌 생명이 주어지는 어색함은 과학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생명 주시기를 원하시는 아버지의 능력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십자가는 내가 져야하는 어색함이 있습니다.이미 주님이 인류의 죄를 담당하고돌아가셨는데 난 왜 또 십자가를 져야 합니까? 남의 죄를 용서해주기 위한 것도 아닌데 왜 나는 또 십자가를져야 할까요? 참 어색한 질문입니다.
많은 분들이교회와서 십자가 지라는 소리에 겁이 납니다. 그러나 주님이 지신 그 십자가를 지라고 우리를 부르신 적은없습니다. 일단 안심하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져야 하는십자가는 무엇입니까? 마 16:24을 보기 바랍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나를 따르려거든’ 이라는 의미는 주님과 관계를 가진 자들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을 말합니다. 성도들은 예수님과 관계를 맺음으로 인하여 우리들의 삶에서 주어지는 고난을 견디며 신앙생활 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나의 십자가입니다. 믿음 생활하기 어렵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주님뜻대로 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때로는 박해, 전쟁, 가난, 그리고 아내로부터 남편으로부터 핍박 가운데도 믿어야 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들이 갑자가 세상을 떠나는 것도 어떤 분들에게는 자신의 십자가가 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사람으로부터 그리고 교회로부터 실망했음에도 예수는 믿어야 합니다. 그런 것들이 주님을 따르는 것에 방해요소는 되지만 신앙을 포기할 절대적인 이유는 아닙니다.
왜냐하면신앙은 여러분과 개인의 문제를 다루기 때문입니다. 내 아버지 술 드시고 문제 일으킨다고 그분이 내 아버지가아닐 수 있습니까? 주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들이 세상에 수 없이 많이 있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어야 구원에 이르는 사실은 불변한 진리입니다.
나의 삶에서 만나는 온갖 고난을 지지 않으면 주님을 포기할 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따를 때 자기 십자가를 지는것이 너무 힘들 수 있습니다. 이미 주님이 그것을 알고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또 혼자 지지 말고 함께 지자고 위로하십니다. 우리들 가운데 자기 십자가를 지다 쓰러진 분이 계신다면 다시 일어나 주님을 따라 가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내가 져야하는 십자가의 어색함이 내게 주어지는 부담이 아니라 생명을 주시고 더 풍성한 것을 주기 위한 주님의 뜻입니다. 십자가의 어색함이 사라지고 오직 주의 사랑만을 느끼는 사순절 되기를 소원합니다. 주의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 교회와 가정과 개인에게 흘러 생명으로 이어지게 하시고 이 땅에서 풍성함을 얻는 놀라운 은혜가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