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4): 뒤에 오시는 분
마3: 1-12
함께 따라 하시겠습니다. “예수님은 뒤에 오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이 땅에 세례 요한보다도 더 뒤에 오셨습니다(눅 1:36).
첫째, 세례 요한이 먼저 온 이유는 나중 오실 주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일이었습니다(1-2절). 이 사명 때문에 주님보다 먼저
이 땅에 온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먼저 와서 사람들에게 어떤 회개를 요구했는지 궁금합니다.
누가복음 3장은 그에게 나아온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회개할 것을 소개합니다. 10절에는 옷이 두 벌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양식이 있는 사람도 그렇게 하라고 말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과 나눔이 없는 이기적인 삶을 회개하라고
합니다. 13절에는 당시 로마가 요구하는 세금의 네 배 이상을 받던 세리들에게는 세금을 액수보다 더 거두지
말 것을 지적합니다. 14절의 군인들에게는 강제로 사람들에게 돈을 뺏지 말고 거짓으로 사람들을 고발하지 말
것을 회개시킵니다. 힘을 가진 자들의 거짓과 부당한 행위를 회개하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그는 사람들에게 회개해야 한다고 외쳤을까요?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천국이 허락되기 전에 먼저 심판이 있고 그 심판을 피하기 위해서는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7절). 이것을 종말론적 묵시(eschatological
apocalyptic)라 부릅니다.
이 신앙을 예수님 오시 전에 유독 강하게 가진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말라기 이후 말씀이 이스라엘에 300-400년 동안 멈추게 됩니다. 그들은 이 현상을 보고 세상의 종말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끝에 메시야가
와서 자신들을 구원해 줄 것을 믿었습니다. 특히 주님 오실 때 이런 신앙을 고수한 사람들을 향해 성경 학자들은
엣세나파라고 부릅니다.
세례 요한과 그들의 공통점은 매우 경건한 삶을 살았고
물 세례를 실시했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살며 나중 오실 주님을 위해 준비하는 자로 자신을 소개합니다(11절). 주님 보다 먼저 이 땅에 와서 사람들이 저지르고 있는 죄에 대해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
그의 사명이었습니다(8, 10절). 나중 주님이 오셔서 이 땅에 세우게
될 십자가의 구원사역을 위한 준비 작업이었다는 것입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 역시 주님은
세상의 심판 주로 다시 오실 것을 믿습니다. 바쁜 삶 가운데 있는 우리들에서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주의 심판 날이 아직 가까이 있지 않다는 안일한 생각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살고 있지 못하는 행위들에 대해 철저히 회개하기를 원하십니다. 성도는 구원받기 위해 착한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이기에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정말 바쁘게 사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바쁜 가운데도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나를 살피고 주님 오심을 준비하는 성도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둘째, 세례 요한이 주님보다 먼저 온 이유는 사람들에게
물 세례를 주기 위해서 입니다.그렇다면 11절에서 세례 요한이 행한 물 세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물 세례는 죄를 깨닫게 하는 회개로 시작되었습니다. 그가 외친 회개는 율법을
사람들이 지키지 않는다는 것을 먼저 알게 하였습니다. 율법의 완성 없이는 구원을 절대 얻을 수 없다는 절박함을
보게 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 율법을 지키기로 새로운 다짐을 하도록 하는 물 세례를
실시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세례를 베푸는 세례 요한이라 불렀던 것입니다.
지금 여기까지 오해 없이 따라와야 하는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은 주님의
십자가를 알지도 못했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단지 그는 주님이 오시기 전의 마지막
율법의 시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라고 말씀합니다. 분명 주님은 세례 요한이 율법에 속한 자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11절에서, ‘여자가 나은 자 중에 세례 요한 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라는 말을 하십니다. 조금 이해하기
힘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완전히 새로운 구원관이 세워지게 될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율법을 지킴으로 받는 구원이 아닌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얻게
되는 새로운 법이 선포되는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행위가 아닌 믿음만을 통해 구원을 얻은 자들을 요한보다
더 큰 자라고 칭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보다 더 크신 이가 만드신 길을 따르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믿음으로 구원받는 길을 제시합니다. 당시 구약의 동물제사를 실시하던
유대인에게는 매우 생소한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까지 한 번도 그런 것이 소개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유대인들이 알고 있던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에 이르는 신앙을 뒤집는 사건입니다. 이런 혁명적인 신앙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바로 십자가를 받아 들이기에는 너무나 무리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중간에 무엇이 필요할까요? 바로 이 역할을 한 사람이
세례 요한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어주는 중간 작업을 한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의 한계성을 알게 하는 것이고 한계성을 극복하는 새로운 뭔가를 기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그것을 극복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요한을 보고 주님보다 먼저 와서 주님의
길을 준비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의 회개와 물 세례는 지금 우리가 예수를
영접할 때 일어나는 회개와 그리고 구원받은 후에 받게 되는 세례와 구별이 필요합니다. 이 차이를 잘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다르게 말하면 요한의 회개와 물 세례는 아직 충족되지 못한 무엇이 남아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셋째, 주님은 세례 요한으로 만족시킬 수 없는 것을
완성시키는 분으로 오셨기에 나중 오셨습니다. 이쯤 되면 ‘그것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세례 요한이 촉구한 회개는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합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말하는 죄라는 것은 율법을 지키지 않고 행하지 않은 행위 등에 관한 것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법이 될 수도 있습니다. 또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일 수 있습니다.
구약적 관점에서 볼 때 율법의 불이행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에 대한 회개를 요구할 때 일어나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사람마다 불이행의 수준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 요한이 요구하는 회개가 애매하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것은 놀랍게도 세상에는 이런 세상적, 종교적,
윤리적, 도덕적, 요구사항 등을 잘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이런 세례 요한의 회개가 필요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구원에 이를 때 요구되는 회개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빠져 나가지 못하게 만듭니다.
주님이 요구하는 회개는 모두가 죄인임을 인정하게 만듭니다. 바로 이것이 세례 요한이
촉구한 회개와 정확한 차이가 있습니다. 좋은 예는 바로 마태복음 5장에
있습니다. 주님이 산에서 나아온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내용들입니다. 뭔가 확실한 차이를 보게 됩니다.
사람들은 죄라고 할 때 그들은 반드시 그 기준이 율법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주님이 죄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소개합니다. 율법이 말하는 죄와 주님이 죄라고 정의하는 것에 대한 구별을 보게 됩니다.
세례 요한이 마태복음 3장에서 회개하라고 말하는 내용을 보면 전부가 율법을 이행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율법을 지킬 것을 요구한다는 것을 누가복음 말씀을 통해 이미 보았습니다.
예를 들면, 세례 요한은 사람을 죽인
것 자체만을 율법에 따라 죄라고 부르고 회개하게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마 5:22을 보면 형제를 미워하는 자도 살인한자로 취급합니다. 전혀 새로운 개념의 죄에 대한 인식입니다.
그리고 마 5:28의 경우는 세례 요한이라면 실제 육체적으로 일어난 간음을 죄라
불렀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짓을 안 한 사람은 회개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 요한의 회개가 가진 약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마음에 음욕을 품은 사람은 모두
간음하였다고 말하고 그 죄에 대해 회개를 요구하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세례 요한보다 뒤에 오신 이유가 됩니다. 요한이 알 수도 없었고 선포할
수도 없는 진리를 주님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죄이고 누가 죄인인가를 밝히는 최종적 기준을 제시하셨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변명하거나 토를 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뒤에 오신 이가 내린
마지막 결정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세운 기준을 넘어갈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조차도 인간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율법이 죄라고 말하는 것 보다 더 근원적인 곳에 자리잡고 있는 인간의 죄를 바라보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이 뒤에 오시는 이유는 인간이 생각지도
않는 가장 큰 죄를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않는 죄입니다.
로 3:10-18,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를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 함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이 세상의 사람들 모두가 이 죄목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바로 이 사실을 모르고 살았던 나를 주님 앞에 세우는 것이 회개입니다. 내가 진정 죄인이 아니었음을
모르고 산 죄, 지금도 죄인이 아니라고 버티는 고집과 아집. 이런 나의
모습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가장 진실되게 나를 알게 되는 순간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나의 의지가 아니고 성령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부담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내 속에서의 성령의 강력한 역사입니다.
억지로 ‘내가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내게 오셔서 죄인임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이것을 세례 요한은 ‘성령 세례’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저항할 수 없는 강한 성령이 나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나를 강하게 붙잡는 힘이 나의
의지를 꺾고 나의 입술을 열게 만듭니다. 한번도 내가 나를 죄인으로 보지 않았는데 성령이 나에게 올 때 진정으로
나의 나 됨을 하나님 앞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백하게 됩니다. “주님 제가 정말 죽을 죄를
지은 죄인이었네요.” 내 입술을 통해 고백이 나옵니다. “이 죽을 수
밖에 없는 나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오직 주님의 보혈만이 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이 고백이 마음에서 믿어지고 입술에서 나오는 순간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다 태워 버리는 것과 같은 기쁨을 내 속에서 체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주님이 주시는 불 세례입니다.
내 심령 속에서 일어나는 구원에 이르는 회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나를 대신해서 화목제물이 되심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이 사랑을 깨닫는 순간 억제할
수 없는 감격과 기쁨이 몰려 오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일평생 단 한 번뿐인 주님과 나와의 첫 사랑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첫 사랑을 일평생 우리는 잊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보다 먼저 온 세례 요한이 줄 수 없었던 성령과 불 세례의 전부 입니다.
이 은혜 주님 오실 때까지, 이 사랑 주님 만날 때까지
간직하며 살아가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