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5): 세례를 받으신 분
마3: 13-17
함께 따라 하시겠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에게 세례를
받으신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주님의 모습을 소개합니다.
첫째, 주님이 세례 요한에게 나아가 세례를 받는 모습은
하나님이 이 땅에 세우신 권위에 대한 순종의 모습을 나타내 주십니다. 13절을 보면 주님은 갈릴리로부터 요단에 있는 세례 요한에게
나아옵니다. 그때 세례 요한은 ‘제가 예수님께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도리어 예수님께서 제게 오셨습니까?’라고 말하며 당황해 합니다(14절).
그런데 말이 좀 안 되는 상황입니다.
왜냐하면 요한은 이미 주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은 이것에 대해 상세히 전달해 줍니다. 세례 요한은 주님이 그에게
다가오기 전에 이미 하늘로부터 말씀을 들었습니다. 요1:33절을 보면,
‘너는 그 어떤 사람에게 성령이 내려와 그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바로 그분인 줄 알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앞에 절 32절을 보면 세례 요한은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로부터
내려와 그분 위에 머물러 계신 것을 보았다’고 기록합니다.
당황해 하는 요한에게 주님은 15절에서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옳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제서야 요한이 예수님의 말을 따르게 됩니다. ‘이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은 요한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명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과의 관계에서 세례 요한의 사명은
무엇이었을까요? 요 1: 31(33절)절은 두 가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내가 물로 세례를 주러 온 이유는 이분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물로 세례를 주기 위함이고 주님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한 두 가지 소명을 밝힙니다.
세례를 베풀 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을 때 세례 요한은
자신 앞에 선 분이 누구인가를 확인하게 됩니다.
이제 주님을 세상에 공포하게 되는 사명을 시작합니다. 요 1:29절에서 요한은 ‘주님이 세상 죄를 대신 지고 갈 하나님의 어린 양’ 임을 외칩니다. 보내신 이의 사명을 세례 요한은 다한 것입니다. 한편, 주님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분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먼저 세례 요한을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하나님이 세례 요한에게 주신
사명을 이룰 수 있도록 그에게 나아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협력의 모습입니까?
성도들이 앞으로 이 땅에 세워지게 될 하나님 나라의 권위에
대해 순종해야 할 것을 가르치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산다고 하면서 주님이 부여한 권위에 따르지 못할 경우, 성도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권위 자체를 정말 인정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세례의 의미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겠다는 절대 순종을 오늘 본문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례 받으러 나아가는 주님의 모습은 하나님이 요한에게 허락하신 권위들에 대해 주님도 순종의 모습을 보여주심으로 성도가 함께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어 나가는 순종의 모본이 된 것입니다.
둘째, 주님의 세례 받으심은 단지 물 속에 들어가는
행위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세례가 갖는 의미를 수용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세례는 예수님이 고안해 낸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에 이미 이 땅에 먼저 보냄을 받은 세례 요한에 의해 실시된 것으로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세례 요한이 행했던 세례를 수용한 이유는 사람들을
물 속에 잠기도록 하는 것이 세례라고 가르치기 위함이 아닙니다. 성경의 그릭단어(밥티스마)를 사용한 이유는 세례가 물에 잠기는 행위를 나타내기 위함이 아닙니다. 물에 잠긴다라는 의미를
가진 그릭 단어를 사용한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물속에 잠기는 행위가 ‘죄를 씻는다’는 참 의미를 잘 전달해 주기에 물속에 잠긴다는 단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물 속에 들어가서 세례를 받건 아니면 물을 뿌려
세례를 받건 중요한 것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만약 주님이 그런 형식을 강조하기 위해 그 단어를 사용했다면 주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율법을 요구하는 분이나 다름 없습니다.
물속에 잠긴다는 의미를 가진 세례라는 그릭 단어는 하나님의 마음이 가장 잘 전달되는 죄 씻음의 의미입니다.
단어 자체가 물속에 침수한다는 의미를 갖기에 반드시 세례를
베풀 때에 사람이 물속에 들어가야 한다고 가르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만이 ‘맞다’고 말하면 정말 곤란한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세례의 참 의미가 발견됩니다.
세례는 물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죄를 씻어내는 의미가 있기에 물속에 들어가는 행위를 통해 그것을 상징화하는 것뿐입니다.
그 한 예가 바로 초대교회가 성도들을 가르치기 위해 만들어진
지침서인 디다케에서(AD
50-80) 발견됩니다. 세례를 줄 때 흐르는 물에 들어가고, 물을 담아 몸을 담그고, 그것도 없으면 물을 세 번 뿌리게 하도록 말합니다. 이것이 초대교회가 세례라는 단어인 ‘벱티스마’를 어떻게
이해하고 실행했는가를 잘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물속에 들어가야만 세례라고 생각하는 것은 세례의
의미보다 세례행위 그 자체를 더 치중하는 태도입니다.
교회나 성도가 진정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세례 받는
양식의 차이에 대한 관심보다 세례의 의미입니다.
세례는 반드시 십자가에서 죽고 사흘 만에 살아나신 예수만이 나의 구주임을 고백해야만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 인생의 주인 되신 주님을 믿음으로 따르기로 결단할 때 교회가 주는 하나의 성례전입니다.
한 개인에게 있어 세례는 한 사람이 주님을 만나 그분과의
교제의 삶을 시작한다는 공식적인 선포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적인 차원에서는 같은 믿음을 가진 한 사람을 공동체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가 베푸는 성찬에 함께 참석하여 같은 고백을 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세상을 살아갈 때 주 안에서 서로 믿음을 격려하고 힘들 때 서로 위로해 주고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앞으로 다가올 하나님 나라에 적합한 제도로 발전시켜 나가려는 주님의 뜻입니다.
주님이 오신 후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선포되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새로운 이방 백성들조차도 그 안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모든 믿는 자들에게 이제 할례가 아닌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임을 표시하게 된 것입니다. 선택 받은 특정 백성은 이제 믿음으로 구원받는 모든 열방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 원대한 계획에 율법은 한계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세워지게 될 먼 미래 교회의 발전을 바라보며 그에 따른 제도들을 주님은 수용하실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세례에 관한 몇 가지 예를 들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할례를 받았을까요?
당연합니다. 그러면 할례와 세례 둘 다 받으셨다는 결론입니다. 유대인이기에 어린 시절 부모가 주는 할례는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세례를 받는 모습이 보입니다. 하지만 세례는 본인이 성인이 되고 본인의 의지로 안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받았다는 것이 우리에게 참 중요한 것들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실시하고 있는 입교와 같은 의미를 전달해 주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본인의 의지의 고백이 필요 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입교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14세가 된 자녀들이 믿음의 부모들의 지도하에 자라나 자신의 믿음을 고백으로 확인하는 시간을 갖는 다는 것은 제도적으로도
매우 합리적인 것입니다.
4세 이하의 유아들에게 세례를
실시하는 것도 하나님이 구약의 백성들에게 실시한 것을 신약적인 해석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백성 된 표로 할례를 받았습니다. 태어난 아이들을 8일만에 할례를 받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유아에게도 세례를 주는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입술로 고백할 수 없는 아이지만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일지라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백성의 일원으로 받아 들였던 것입니다.
초대교회도 사자 앞에 자신의 아이들을 데리고 함께 나아갈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유아들이 비록 자신의 의지를 가진 후 입술로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부모의
고백과 믿음을 보고 이 아이들도 부모와 같은 믿음으로 같은 고백을 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아세례는 믿음에 기초해서 실시하는 세례입니다. 단지 돌보아 줄 사람이 없기에 함께
죽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어떤 방식으로 받느냐를 논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그 방식 때문에 믿음이
흔들려서도 안됩니다. 오히려 세례의 의미와 중요성과 하나님이 그것을 허락하신 뜻에 집중 되어야 합니다.
세례는 나의 내면의 믿음이 밖으로 표출되는 시간입니다. 주님과 동행을 알리는 소중한
선포의 시간입니다. 같은 믿음의 공동체에 들어 온 형제 자매를 보고 온 성도가 축하하고 함께 즐거워하는 시간입니다.
오늘 세례를 맞는 분들이 일평생 주님과 동행하는 놀라운 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