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2): 필요함 

2:11-19 

 

사순절을 통해 십자가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십자가가 왜 이 세상에 꼭 필요했는 가에 대한 필연성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들이 세운 에서부터 출발합니다. 담은 뭔가를 보호하는 차원도 있지만 소통을 막는 역기능도 있습니다. ‘담을 쌓고 산다’ 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부부 사이의 담은 서로의 소통을 막아 사랑 할 대상들이 하나 되지 못하게 만듭니다. 담은 또한 하나 된 것을 가르고 구분 짓기도 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너와 나라는 경계가 생깁니다. 원래는 하나였지만 분단 되고 구분되게 하는 것이 사람들이 세우는 담입니다.    

 

11절은 유대인들이 세운 담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교만함으로 이방인들과 거리를 두게 만들었습니다. 이방인들을 할례 받지 못한 자라고 손가락질 합니다. 저주의 대상이라는뜻입니다. 유대인만이 최고라는 생각과 그들만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았다는 특권의식에 사로잡힙니다. 다른 이웃들과 소통을 꺼려합니다. 15절을 보면 이 담의 재질은 율법이라는 단단한 구조로 세워져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준 율법을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도구로만사용하였습니다.  

 

더구나 이방인들이하나님의 복을 함께 누리고 싶어도 알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율법으로 다른 이들을 정죄하는 곳에만 사용합니다. 결국 이스라엘이 쌓은 담은 하나님의 복이 세상으로 흘러가는 것을 차단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담은 무너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원래부터 하나님은 그런 담을 만들라고 명령하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을 택한 것도 다른 민족을 축복하는 도구로 삼기 위해 시간 상 먼저 택한 것 뿐입니다. 먼저라는 축복은 있어도 그들만의 특권은 아니었습니다. 주신 복을 먼저 누리고 다른 민족에게 나누는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바로 이것이 창세기 12:1-3절의 아브라함의 소명에서 발견됩니다(땅을 주고 민족을 이루겠다. 그러나 이것들은 세상을 축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후손들은 이웃과 소통하며 하나님이 허락한 복을 나누지 못했습니다. 자신들만 누리는 것이 맞다는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힙니다.이 생각의 담은 그들을 지배했고 시간이 갈수록 더 높아만 갑니다. 이방인들이 진정 하나님을 알고 싶어도 갈 수 없게 만드는 방해물이 되었습니다. 이럴 때 생기는 극한 감정의 표현이 14절에 미움의 벽’(쉬운성경, "원수된 것": 개역개정)이라는 표현이 발견됩니다.

 

성도님들 가운데 이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살아오면서 내 주위에 벽이 있을 때 왠지 그 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계속 담이 막을 때 어떤 느낌이 드셨는지요? 처음에는 호기심이 발동하지만 나중에는 거부감과 적대감이 더 커지는 경험을 가져보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허락 하지 않는 담은 늘 하늘에 의해 무너지는 역사를 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율법을 앞세워 쌓은 담 역시 무너져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왜 저 율법이 폐하여지고 그리스도의 보혈이 필요한 가를 보여주는 십자가의 필연성을 설명해 줍니다. 2:4-5절에 의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허물로 죽은 우리들을 그냥 죄 가운데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고 말씀합니다. 결국 십자가가 필요한 것은 우리가 그 필요를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크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백성만이 누리는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직접 나선 것입니다.

 

우리가 이방인으로 살 때 느끼는 서러움과 처지를 알 때, 왜 저 십자가가 필요한 가를 더 크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12절을 보면 우리는 이방인으로 하나님 없이 산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선택받은 백성이 아닙니다. 선민에게 허락한 복의 기업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살아도 소망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죄 가운데서 나서 그저 쓰레기처럼 버려져야만 하는 인생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왜 구약시대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이 뚜렷한 가에 대해 궁금해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심판의 계획이 얼마나 분명한 가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이런 구분을 보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 대한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 이미 밝혀진 것입니다. 한편,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심판을 피하는 복 된 길을 찾기를 바라는 소망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의문을 풀고 넘어가야 할 것입니다.하나님은 이방인들을 다 죽게 만들고 유대인들만 선택하여 복을 주기로 원래부터 작정하셨는가?’ 에 대한 질문입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이방인들도 이스라엘이 받는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화 되는 것이고 그들의 종이 되는 길이 있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가나안 정복 때 보여집니다. 스스로 굴복하여 종이 되어 이스라엘 구성원이 되기로 자처하는 기브온 사람들(9:3), 가나안 정복 당시 가족의 목숨을 살린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 온 기생 라합, 그리고 유대인에게 결혼한 롯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벨론 포로를 겪고 난 뒤 율법을 지키기로 결단하는 하는 자들을 그들의 회중에 다 들어오게 했습니다. 그리고 구약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여 한 나라가 망하는 것을 막는 요나의 전도도 볼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도 다양한 방법으로 이방인을 그대로 두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흡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로마서 1: 21-23절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로 고개를 돌리기 보다 자신들의 길을 더 원하고 있었습니다. 바벨탑 이후 사람들이 흩어진 것은 이미 하나님을 섬기기를 포기한 모습입니다.이런 사람들을 부르기 위해 하나님은 한 사람을 통해 민족을 만들고 세상에서 점점 강하게 만들었습니다그러나 그들이 세운 담으로 인해 이방인들도 하나님이 사랑한다는 사실을 잊고 살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변질 된 것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는 세상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한 질문이 더 남아 있습니다. 이런 것을 다 알고 있는 하나님이라면 처음부터 율법을 주지 말고 바로 이 땅에 주님을 보내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답은 간단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한 섭리입니다. 그 어느 누구에게도 간섭 받지 않으시고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는 하나님만의 절대 의지입니다.

 

인간은 오랜 시간 동안 모든 것을 다 경험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실제 세상에 오셨을 때 알지 못하고 배반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율법의 한계성 마저 알고도 폐기하지 않고 오히려 붙들며 담을 든든히 세워갔습니다. 이 모든 것이 생략된 체 바로 주님이 온다고 해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인조차 하지 않고 그냥 없애 버렸을 것입니다. 수 많은 하나님의 종들을 보내어 돌아오기를외쳤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먼저 알고 따르던 이스라엘 백성들 조차도 선지자들을 다 죽여 버렸습니다. 자신들을 정죄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것은 주지 않고 힘들게 하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갈 4:4절에 의하면 때가 차매주님이 오신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만이 결정하는 영역임을 선포합니다. 세상의 주관자이시며 가장 지혜로우신 분이 결정한 것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구원에 관해서는 관여할 수가 없습니다. 그냥 그분이 세운 길을 따라가야만 할 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결정이고 가장 적합한 결론이라는 것입니다.

 

1: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창조가 있기 전부터,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우리를 흠 없는 거룩한 백성으로 선택하셨다고 선포합니다. 믿기로 결정하는 사람들 만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구원의 대상임을 밝히십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자를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 삼기로 작정하셨다고 이어서 5절에서 말씀합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결국 천국에 간다는 UNIVERSALISM과는 다른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 모두들 다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선택했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왜 필요합니까? 바로 이것이 모두를 무조건 구원하겠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록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길을 허락하셔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만 구원이 있는 것입니다(2:8). 그래서 예수 그리스를 통하여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단서를 잊지 않고 바울은 기록하는 이유입니다. 예수를 마음으로 믿고 주로 시인하는 입술의 고백이 있지 않고는 구원은 허락되지 않는 진리가 하나님에 의해 세워졌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유대인들에게 먼저 율법을 주어 지키게 했던 이유는 율법이 아닌 십자가가 세워지고 십자가의 도가 전달될 때 믿기 위함입니다. 좀 엉뚱하게 들립니까? 잠깐만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도 사실 따지고 보면 율법을 지키면 구원이 허락된다는 믿음이 전제 되는 것입니다. 결국 율법은 그 속에서 허덕이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없네요. 내 힘으로는 이것들을 다 지킬 수 없습니다.” 날마다 부르짖으며 하나님께 나아와 은혜를 달라고 간구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 은혜를 선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할 수 있다는 교만을 보입니다. 그리고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한 거짓을 만들어 냅니다. 이것을장로들의 유전이라 부릅니다. 결과는 더 율법을 붙들고 율법 준수라는 담을 쌓아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드디어 인간이 세운 이 율법의 담도 허시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복음이 선포되고 나서야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구원에 이르는 길을 허락 받게 됩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분이 없이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분의 담을 허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구분 짓게 만들었던 율법의 벽을 무너뜨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두가 이제는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에 이른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한 길을 걷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이것을 주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고 14절은 말합니다어떤 구분도 특권 의식도 사라집니다. 주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일만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 주어집니다. 이 일을 위해 주님의 십자가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허신 담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담만이 무너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불통이 된 더 근본적인 담이 무너진 것입니다(13). 불순종의 죄로 인해 인간은 거룩한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이 엄청난 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주님이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습니다. 이것만이 죄 있는 인간이 거룩한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 된 것입니다. 이 가르침은 변하지 않는 것이기에 진리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바꿀 수 없고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14:6). 

 

이 담이 무너짐으로 유대인("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도 주님이 찾아가십니다(17). 왜 주님이 이미 선택 받은 유대인들에게도 필요합니까? 율법이 있을 때까지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구원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율법을 완전히 지킬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 역시 믿음으로 구원 받는 길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방인들에게나 유대인들에게나 동일하게 구원의 길이 되시는 것입니다. 어떤 특권도 어떤 선택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동일한 죄인으로 하나님 앞에 서고 거룩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안타까움을 가진 동질의 사람들만 있을 뿐입니다. 이들 모두에게 십자가는 필요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영적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우리들에게도 이런 담을 쌓고 있는지 살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 안에서는 이웃과 소통을 막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차단하는 이런 담들은 무너져야 합니다. 담이 없는 교회가 되기 바랍니다. 성도 간에 어떤 담도 쌓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속에 어떤 미움도 비난도 정죄함도 있어서는 안됩니다.주님이 허무신 담을 다시 쌓는 일은 허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담은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야 무너집니다. 십자가 만이 인간들의 담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원수와 같은 나를 이렇게 용서하시고 사랑하신 주님을 바라볼 때 이웃을 향해 쌓았던 모든 담은 무너지는 것입니다


함께 따라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대상입니다. 미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서로 사랑 할 일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정말 그렇게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실제 믿는 대로 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