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세 번째 십자가 위에서의 말씀
요 19:26-27
2016년도 가상칠언예배는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 가운데 세 번째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주님이 하신 말씀을 들으면 지극한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효심이 묻어 나오는 본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은 좀 다르게 말씀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보고 듣는 순간 좀 이상한 것이 발견되고 들려 오기 때문입니다.
첫째, 예수님은 자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여자여’ 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여자여’라는 소리는 여성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현장 가장 가까운 곳에 주님이 아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25-26절). 다섯 명의 사람들 가운데 어머니 마리아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자여’라고 부른 것은 분명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이 소리를 우리가 현장에서 들었다면 뭔가 잘못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을 것입니다. ‘주님이 너무 고통 가운데 있어 약간 이상스럽게 되었나’ 라는 착각을 불러 일으킵니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주님을 낳아서 길러주신 육신의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를 어머니로 불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뒤에 이어지는 ‘아들이니이다’ 라는 말과 잘 연결되기 위해서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공동번역과 새번역은 ‘어머니’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릭원문은 분명 어머니가 아닌 ‘여자여’(woman: 개역개정, KJV, NASV)라고 부릅니다.
물론 성경학자들은 당시 가장 극존칭의 말로 자신의 어머니를 불렀다고 말합니다(‘Dear woman’: NIV). 그렇다면 주님이 마리아를 그렇게 극존칭으로 부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낳아주고 먹여주고 입혀주신 부모의 사랑에 대해 감사하는 그런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이 해석을 무시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어린 예수가 장성하기 까지 수고하고 사랑해준 육신의 어머니에 대한 마지막 인사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뭔가 석연찮은 것이 남아있습니다.
두 번째 이상한 것은 ‘여자여’ 라고 부른 후 이어서 ‘보소서’ 라는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한국 성경 번역과 영어 성경은 대부분 ‘Behold’ (NASV, KJV)로 번역합니다. 이 말도 의문이 듭니다. 지금 모든 사건의 현장을 지켜보고 있는 마리아에게 다시 무엇을 보라는 것일까요?
그래서 NIV성경은 이 그릭단어(ἰδού)를 ‘behold’ 로 번역하지 않고 “here is”로 다르게 번역합니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그런 의미로도(here I am)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NIV번역은 ‘여기 당신의 아들이 있습니다’ 라고 한국말로 번역됩니다. 그래서 NIV는 전체를 “Dear woman here is your son”(NIV) 즉 ‘여자여 여기 당신의 아들이 있습니다’ 로 번역합니다.
그러나 한가지 더 궁금점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자신의 아들임을 알고 있는데 이렇게까지 말할 필요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대인의 성경은 이 본문을 다르게 번역합니다. “그가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여기서 ‘그’는 분명 예수님 자신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전혀 새로운 삼자를 소개합니다. 이렇게 번역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이 번역은 앞 뒤 문맥의 상황과 서로의 대화를 살펴 원문과는 다르게 번역을 한 예가 되는 것입니다.
전체상황을 보면 분명히 어머니와 그의 사랑하는 제자가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러므로 ‘여자여 보십시오 그가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라고 번역된다면 주님이 지금 마리아에게 ‘보라고’ 말하는 ‘당신의 아들은’ 예수님 자신이 아니라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이 본문이 ‘여기 당신의 아들이 있습니다’로 번역된다면 당신의 아들은 죽어가는 예수님이 아니라 이제 새롭게 아들처럼 어머니를 모시게 될 요한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다음 이어지는 27절에서 주님이 사랑하는 제자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부탁하기 때문입니다. 그 제자에게 말하면서 ‘보라 네 어머니라’고 주님이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두 구절 전체를 보면 이렇습니다. 26절에서 주님은 어머니에게 요한을 ‘당신의 아들입니다’ 라고 말하고 27절에는 요한에게 마리아를 ‘너의 어머니이시다 ’ 로 소개하는 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두 구절을 다시 보면 이렇게 해석 됩니다. 26절은 예수님은 자기 어머니에게 요한을 가리키며 말씀하시되 ‘여기 당신의 아들이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되는 것이고, 27절은 예수님의 제자에게 이르시되 ‘여기 너의 어머니가 계시다’ 의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하나 안 풀리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그것은 앞에서도 이미 보았던 것입니다. 마리아를 ‘어머니’(μήτηρ 메테르) 라고 부르지 않고 ‘여자여’ (γυνή 구네)라고 부른 이유가 여전히 설명이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의도가 ‘이제 여기 있는 요한을 당신의 아들로 삼고 사세요’ 라는 의미라면 ‘여자여’ 보다는 ‘어머니’가 더 정황상으로나 정서적으로 더 어울린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은 이 순간에 ‘어머니’라는 단어가 분명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자여’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선택하여 사용 하였느냐는 것입니다.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이 질문을 마음에 품고 다시 새롭게 이 문장들을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지금부터는 이 문장을 원어적으로 살펴보면 의미는 이렇습니다. ‘여자여 보라 당신의 아들을.’ 왜냐하면 여기서 사용되는 ‘보라’는 imperative 명령형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장이 주는 의미는 연민적인 아들과 어머니 사이의 대화가 아닌 단호함이 있는 문장입니다. 그렇게 해석하라고 어법을 명령형으로 사용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놓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지금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를 뛰어넘는 뭔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주님의 의도적인 용어 선택이 있다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여기서 어떤 인간적인 어머니를 바라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아닌 어머니의 주님으로, 하나님으로서, 구원의 주로서 한 인간인 여자, 육신의 어머니를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라’는 명령은 이제는 나를 당신의 배에서 나온 ‘육신의 아들’로 보지 말라는 강한 메시지입니다. 마리아도 그렇게 보아야 할 시점이 왔다는 것입니다.
지금 상황이 어떤 시점입니까? 주님의 마지막 순간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하고 싶은 말을 하기를 원할 것입니다. 어머니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요? 어머니에게 인간적인 평안을 주는 말을 하기 원했을까? 물론 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선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26절 첫 대화에서 청유형인 ‘보십시오’가 아니라 명령형인 ‘보라’가 사용 되는 것입니다.
위안보다는 더 큰 것을 주고 싶어하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어머니에게 뭔가 깨닫게 하려는 의도로 보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어머니 보십시오’가 아닙니다. ‘여자여 보라 당신의 아들을, 그가 누구입니까?’ ‘당신의 아들이 메시야임’을 보라는 명령인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어머니에게 부탁하는 간절함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유언과 같은 것입니다. 가장 말하고 싶은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 인간으로 오신 목적이 ‘효’를 다하는 주님보다 그분이 구세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게 하는 것이 더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에 맞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의 말은, 직역하면, ‘여자여, 보라 당신의 아들을’입니다. 이 말은 주님은 이제 인간적인 관계에서 마리아에게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관계를 인식시키기 위해 마리아에게 어머니라는 단어보다 ‘여자여’ 라는 존칭을 사용합니다.
주님이 아이일 때 한 사건이 있음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눅 2:41-46).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어린 예수를 잃어버리고 찾다 성전에 있는 예수를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어머니 마리아가 주님께 이렇게 말합니다(눅 2: 48). “아들아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걱정하며 너를 찾아 다녔다.” 그러자 주님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제가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것을 모르셨습니까?”(눅2:49). 누가복음은 그때 어린 예수가 한 말을 알지 못했다고 기록합니다(눅 2:50). 그러나 51절에 보면 “마리아는 이 모든 일들을 마음속에 간직해 두었습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치 주님이 어린 시절 자신의 어머니에게 말했을 때 그 느낌과 비슷한 느낌이 십자가 밑에서도 느꼈을 것입니다. 지금 마리아는 예수님 사이에 두 사람만이 아는 육신의 아들과 하나님의 아들의 관계를 이 대화에서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인간관계를 끊으려고 그런 말을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보다 더 중요한 주님이 오신 목적을 알지 못하면 나와 형제와 관계,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3:31-35절을 보면, 어머니 마리아와 동생들이 와서 주님을 찾으십니다. 그때에도 주님은 단호한 어조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그리고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보아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자매들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내 어머니이다.”
우리는 이런 주님의 마음을 십자가에서도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오늘 이 십자가에서 죽어가면서 부모와 자식의 인연을 못 끊어서 애달파 하는 주님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주님의 오심이 인간관계 때문에 더 희미해 것을 염려해서 주님은 의도적인 용어 선택을 여기서 하십니다.
‘보라’는 어머니의 눈물 어린 눈에는 여전히 주님을 자신의 배에서 나온 아들로 보는 그 감정을 버리라는 소리로 들립니다. 그리고 보아야 할 것은 당신의 아들이 바로 당신을 구원할 구세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고 주님은 자신의 어머니에게 아들로서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어 나오는 27절에서 자신이 제자에게 ‘이제는 보라 네 어머니라’ 고 부탁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요한이 마리아를 섬겼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무엇을 십자가에서 보고 계십니까? 한 인간으로 그저 와서 죽어간 영웅을 바라보십니까? 아니면 소설처럼 느껴지는 이야기로만 한 인간을 보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주님의 명령이 들려옵니다. ‘보라 너의 구세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보라’고 명령하십니다. 2000년이 지난 사순절 고난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아직도 주님이 나의 구세주로 인정하지 못하고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는 삶이 없다면 다시 십자가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아직도 주를 알지 못하는 분이 계시다면 이 밤에 남아서라도 저에게 묻고 알고 예수를 영접하는 시간을 가져 보시기 바랍니다. 다른 성도님들은 조용히 자리에 앉아 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으신 주님을 바라보며 감사함이 있는 기도를 이어가시고 다들 조용히 집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