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3): 요구함
막 8:34-38
사순절 기간 동안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것들을 살펴 보았습니다. 오늘은 십자가가 요구하는 것에 대한 우리의 드림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십자가의 요구는 예수를 만난 사람들에게 예외가 없이 너무나 확실히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단순히 예수를 주인으로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것으로 마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입니다. 그 이상을 요구하며 믿는 한 사람의 온 일생을 통해 삶의 현장에서 십자가의 요구대로 살아가도록 주어진 명령입니다.
십자가의 첫 번째 요구는 주님을 만난 자는 이제 따르라는 것입니다. 이 요구에 예수님 당시와 지금도 실제로 집과 일자리까지 버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실제적으로 우리가 집이나 직장을 버리라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그러나 때로는 주님을 위해 나의 첫 자리를 차지하는 그 어떤 것도 과감히 거부하고 버리며 살아야 합니다.
주님을 따름은 죄를 버리는 일로 시작합니다. 기독교는 버림의 종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생각, 말, 행위와 습관까지도 단호하게 버려야 합니다. 버림은 마음의 자책감 수준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나의 주인 되신 주님께 ‘잘못했어요’ 라는 사과 정도로 마무리되지 않습니다. 주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되는 순간부터 구체적으로 내 삶에 관여하시며 버리기를 지적하는 그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친구 관계 일수도 있습니다. 내가 즐기는 오락일 수도 있습니다. 교만이나, 시기, 증오, 용서하지 않는 태도, 비꼬는 태도, 주의 일에 대한 무관심 등에 주님은 간섭하기 시작하십니다. 예수 믿고 난 뒤 이 부딪힘이 내 속에 일어난다면 예수가 내 인생의 주인 되심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 징조입니다. 오랫동안 사탄의 미끼가 되어 나를 죄 가운데 묶어 둔 것들에 대해 철저히 주님은 간섭하십니다. 심지어 주님은 눈이 범죄 하거든 빼어 버리고, 손이 범죄하면 잘라 버리라고까지 말합니다(막 9:43). 물론 문자적 해석을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를 따르지 못하게 하는 죄에 대해 철저하게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따르는 자에 대한 요구입니다. 부담스러우십니까? 이 요구는 죄의 사슬에 해방되어 우리가 마음껏 자유를 누리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참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지금껏 지속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이미 풀어주셨습니다(요 5:24). 그러므로 이제 단지 주만 바라보며 힘껏 달려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코끼리를 길들이는 예화가 있습니다. 새끼 때부터 늘 다리에 쇠 사슬을 매어 둔다고 합니다. 어른이 되어 풀어두어도 도망가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님이 이미 십자가에서 승리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죄의 사슬에 묶여 있다는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감정만 앞서 슬퍼하고 눈물 흘리는 그런 모습이 아니길 바랍니다. 죄가 더 이상 나를 이길 수 없음을 말씀에 의지하여 믿음으로 선포하며 죄를 잘라버리는 복 된 날이 오늘이 될 줄로 믿습니다.
십자가의 두 번째 요구는 주님을 따르는 자들을 향해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앞에서 주를 다를 때 죄라는 외면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은 이제 내면의 문제를 해결할 순서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밖으로 나타나는 행위의 죄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내 속의 이기적이고 욕심으로 가득 찬 자아와 철저히 자기 중심적 삶의 태도를 굴복 시키는 것입니다.
내 의지가 살아있고는 제대로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을 끌고 가려고 합니다. 자신이 주인이 되고 주님이 종이 되는 모습을 끝내야 합니다. 내 마음의 중심에 주인 되어 않아 있는 자아가 내려오고 그 자리에 주인인 예수 그리스도가 자리 잡는 삶입니다. 여기에는 철저한 나라는 자아는 무시 되어야 합니다. ‘부인’이라는 단어는 베드로가 십자가를 지시려는 주님을 외면할 때 세 번이나 사용한 바로 그 단어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십자가의 요구 앞에서 철저하게 나를 죽이는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주의 말씀이 자신의 생각하는 바와 맞을 때만 은혜가 되는 그런 느낌도 매우 자기중심적인 신앙생활입니다. 오히려 나에게 말씀이 들려올 때 속에서 나의 경험과 지식과 부딪히고 거슬리고 듣기 힘든 그 시간이 사실 주님이 우리들의 중심에 자리 잡고 싶어하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을 거부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그 시간과 감정만을 기다리는 예배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자기 중심적 사고가 처음 나타나는 것은 창세기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 서로 벗은 부끄러움을 무화과 나뭇잎을 사용하여 수치를 가립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물으며 살아가던 모습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주님이 에덴에 찾아와서 아담을 부를 때 스스로 숨어 버립니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닙니다. 그들의 부끄러움을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독단적으로 행동한 일입니다. 자신의 생각으로 그렇게 하면 될 것 이라는 사고가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작고 하찮은 인간의 자기 중심적 생각이 하나님을 덮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피 묻은 보혈이 아담을 덮어 주었습니다. 인간의 자아는 주님의 보혈로 나를 덮일 때 자신이 주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알게 됩니다. 이때 주님이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귀 기울이게 됩니다. 내 속에 계신 성령 하나님이 나를 지배할 수 있게 내 것만 옳고, 나의 것 만이 주장 되기를 고집하는 태도를 내려 놓게 됩니다. 자기가 세운 기준 안에서의 모든 것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모습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보혈만을 묵상하는 남은 사순절이 되기 바랍니다.
십자가의 세 번째 요구는 자가를 부인한 우리에게 이제는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요구하십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먼저 십자가를 질 때 일어나는 일이 무엇입니까? 십자가를 지는 모든 자는 죽게 됩니다. 그러므로‘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다름 아니라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믿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러 간다는 태도가 주님을 따르는 나의 삶을 지배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갈 5:24절에서 도전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자기 십자가를 진 사람의 고백입니다. 나의 죄의 본성인 정욕과 탐심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철저한 깨달음이고 믿음입니까? 이 죽음은 한번이 아니라 ‘날마다’ 일어나야 합니다. 매일 내 의지의 죽음에 대한 선포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뜻은 결코 내가 죽지 않고는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본문 35절에“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여기서 목숨(psyche)은 인간의 육체적 호흡 또는 생명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단어는 자아를 나타냅니다. 내 의지 속에 살아 생각하고 결정하는 ‘자아’를 뜻합니다. 자아가 십자가에서 죽어야 주님과 다시 산 새로운 내가 나의 의지를 주님께 굴복할 수가 있습니다.
내가 죽을 때 내가 가진 시간과 돈과 가정 생활과 직장에서 주님이 지배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내가 죽을 때다 내 것이라고 생각한 모든 것이 주님 주신 것이라는 믿음이 생깁니다. 주를 위해서라면 다 드릴 수 있는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나의 죽음으로 이제 주님이 주인 되어 사는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분의 뜻이 나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는 것은 유익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이 땅에 태어나고 주님의 목적을 이루어 드리는 소명으로 살아가는 출발이 되기 때문입니다.
먼저 나의 자아를 지고 십자가 위에 서십시오 그러면 나는 죽게 됩니다. 내가 죽으면 주의 소명을 이루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내가 선 자리는 모두가 하나님의 사역지가 됩니다. 주부는 가정에서, 직장인은 내가 하는 그 일이 주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사역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나를 부르셨다는 확신이 생기는 것입니다. 나를 향하신 부르심을 감당하는 인생이 그때부터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십자가의 요구는 38절에서 주를 공개적으로 시인하라는 요구입니다. 개인적으로 주를 인정하고 주님으로 모시는 삶은 자연스럽게 사람들 앞에서도 예수를 나의 주로 인정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38절에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마 10:32-33).”
조금 분위기가 다릅니다. 이 말씀들은 뭔가 무거운 암시가 있습니다. 앞으로 일어날 것으로 믿는 우리가 주님을 부끄러워할 일이 생긴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실제 기독교 역사상에서 수 많은 박해 시절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 가운데서 기독교가 더 이상 다수가 아닌 소수가 되는 시간으로 돌아갈 것을 의미합니다.
기독교가 처음 태어나던 시절의 교회 모습과 같습니다. 우리에게도 “예수는 나의 주인이시다”라는 고백이 요구될 때 믿음의 선배들처럼 주님을 공개적으로 시인하는 것을 회피해서는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세상의 왕 “시저는 주님이다”라고 강요하던 시대에 우리의 선배들은 죽음을 두려워하며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를 무시하는 세상 권력에 주님의 자리를 내어드리지 않았습니다.
지금 북한이나 IS국가들에서 일어나는 기독교인 살해 현장과 같습니다. 박해를 피해 도망치다 죽는 사람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목숨과 주님을 바꾸지 않고 주님을 인정하며 지금도 사라져 갑니다. 이름도 빛도 없이 죽는 그들의 피를 바라보며 우리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것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돕는 기회들이 생길 때마다 적극적으로 물질로 후원하고 관심으로 지원해야 할 것입니다(임현수 목사 북한 억류).
그리스도를 주로 모신다는 것은 모든 삶을 그리스도의 지배 하에 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고백한대로 살아가는 성도의 삶을 말합니다. 십자가는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나의 구세주로 고백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온전히 나를 죽여 그분이 나를 주관토록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그 요구는 주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부요케하며 더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긴 위한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십자가의 요구하심에 응답하고 주님의 요구대로 그대로 살아가는 복된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참고도서. 존 스토트, 기독교의 기본진리 (생명의 말씀사, 1962,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