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6): 부활하셨습니다
마28 1-10
성도들에게 가장 즐거운 절기 중의 하나가 부활절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죽음에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모두 함께 따라
하시겠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믿습니까? 아멘.
첫째, 부활은 주님이 확실히 죽은 후 사흘 만에 사신 사건입니다. 부활 사건은 온 인류가 놀라는 일입니다. 그리고 믿지 못하는 사건이 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인류에게 그런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주님에 의해서 처음으로 일어난 사건입니다.
주님은 이천 년 전 팔레스타인의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셨습니다(마27:50). 주님이 죽은
그날 저녁 아리마대 출신의 요셉이라는 부자가(마27:57) 자신의
무덤에 주님의 시신을 모시게 됩니다(마 27:60). 이때
그는 큰 돌을 굴러 입구를 막고 돌아가게 됩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마 15:42) 그날은 “준비 일 곧 안식일 전날’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죽은 날은 금요일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27: 62절에
의하면 이튿날 곧 준비일 다음 날, 토요일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빌라도를 찾아갑니다. 주님의 하신 말을 기억하고 로마병정들로 하여금 무덤을 삼 일째 되는 날까기 지키게 하라고 요청하게 됩니다(마27:64).
그리고 다음 날 마28:1절에 의하면 인류 역사상 처음 있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마태는 그 날을 ‘안식일 다음 날’(쉬운성경)이라고
기록합니다. ‘안식 후 첫날’(개역개정)은 토요일 다음날로 일요일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주님이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여 ‘주일’로 지켜지게 됩니다. 그래서 마태는 그 날을 ‘한 주의 첫 날’ 이라고 1절에서 적고 있습니다(쉬운성경).
그러므로 분명히 주님의 시체는 사흘 동안 무덤 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삼 일이라는 수는 의미가 있습니다. 삼이라는 수는 주님이 확실히 죽었음을 말합니다. 신명기 율법에도 사람을 죽일 때 증인을 두 세 명을 반드시 세우게 합니다(신17:6). 신중을 기하고 확실성을 보장하려는 의도인 것입니다. 전도서(4:12)에서도 가장 단단한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날 때 삼 겹으로 꼰 줄의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주님이 하루 만에 아니면 나흘 만에 살아나도 상관없지만
삼 일이라는 의미가 던지는 바는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는 부활신앙은 어떤 사람들이 제시하는
논리와 과학적 증거에 흔들리는 나약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도 제자들에게 죽기 전에 십자가에서 죽고 사흘
만에 살아날 것을 미리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실제 그 사건이 그들에게 일어났습니다. 우리도 죽기 전에 이미 지금 이 땅에서 부활할 것을 믿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도 죽고 다시 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처럼
우리들에게도 약속하신 말씀이 그대로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둘째, 부활은 거짓말로 지어낸 사기극이 아닙니다. 마28:12-15절에
의하면 주님의 시체를 제자들이 훔쳐 가서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거짓 소문을 유대인들이 지어 냅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을 한번 잘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 27:60절에
의하면 주님이 죽으신 날 저녁 요셉이 자신의 무덤에 시체를 두고 돌을 굴러 입구를 막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마27: 62)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찾아가
경비병들을 무덤에 세워 둘 것을 요청합니다. 만약 시체가 도난 당했다면 바로 금요일 저녁에서부터 그
다음날 지키기 전 시간일 것입니다.
그 이후는 병정들이 인봉을 하고 지키기 때문에 도난이
발생할 일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마27:66). 그렇다면
군인들이 무덤 안을 확인하지도 않고 지켰을까요? 병사들이 그렇게 무책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봉인하기 전에 이미 시체가 사라졌다면 군인들의 보고가 반드시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었다면 병사들이 지킬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로마는 그곳을 봉인하고 병사들로 하여금 지키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보아 군인들이 시체를 확인
한 후 지켰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다른 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잠시 기절했다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의
작열하는 태양과 병사들의 시달림에 지쳐 주님은 잠시 기절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은 것처럼
누워있는 시체를 요셉이 가져갔습니다. 주님을 둔 무덤은 석굴이었습니다.
건조한 석굴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의해 주님이 깨어났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실제 죽지 않았기에 살아 났다는 것은 사기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이유는 주님과 함께 달렸던 강도들은
십자가에서 내려져서 뼈를 꺾었습니다(요 19:32). 그러나
주님은 이미 병사들이 죽은 것을 확인하고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요19:33).
두 강도는 확실히 죽었지만 주님은 다리를 꺾지 않았기에 실제 죽지 않고 기절했다 깰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성경 구절을 그들은 빠뜨리고 있습니다. 병사들이 다리는 상하지 않았지만 군사들은 주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러 피와 물을 다 쏟아내게 만들었습니다(요 19:34). 어쩌면 이것은 전쟁터에서 군인들의 확인 사살이나
다름없습니다. 오히려 두 강도들은 다리가 비록 꺾였으나 살 수 있는 가능성 면에서 본다면 더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피와 물을 쏟으신 주님은 확실히 죽은 것입니다.
한 곳 더 주님의 죽임이 확인되는 곳이 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에게 가서 주님의 시체를 달라고 합니다(막 15:43). 그러자 빌라도는 주님이 이미 죽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백부장을 시켜 주님이 이미 죽었는지를 묻습니다(막 15:44). 백부장으로부터
확답을 들은 후 시신을 요셉에게 주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막15:45). 그러므로 주님의 부활에 대해 거짓이기에 믿지 못한다는 말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부활은 믿는 사람들에게 이 땅에서부터 기쁨을 선사합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그 날 새벽에 여인들이 무덤을 찾아옵니다. 하늘과 땅이 이 날을 기뻐하듯 땅이 흔들렸습니다(2절). 그리고 하늘의 천사가 여인들에게 다가와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주님은 살아나셨다.’ 이 사건을 확인시키기 위해 ‘주님이 누우셨던 곳을 보라’ 고까지 말합니다(6절). 부활 사건은 하늘과 땅이 기뻐한 날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대조되는 두 그룹의 사람들을
보아야 합니다. 지진이 나고 천사가 돌무덤을 굴러낼 때 4절에
보면 경비병들은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마친 죽은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한편, 함께 있던 여인들도 두려워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군인들과 차이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8절에
보면 여인들은 두려워하면서도 매우 기뻐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주님을
다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죽기 전에 반신반의했던 말씀이 이제는 모두가 믿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동일하게 부활의 때에 주님의 얼굴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음으로만 간직해 온 그 모든 것들이 확연해 질 것입니다.
우리가 그 날에 보게 될 것들이 요한계시록에 약속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생이 있는 곳에는 인생처럼 눈물과 아픔이 없습니다(계21:4). 이 소리만 들어도 행복하지 않습니까? 이것만 생각해도 기쁘지 않습니까? 시기와 다툼 비교 속에 살아가고
경쟁으로 서로 다투는 그런 삶이 없습니다. 죄를 지으려고 해도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죄로 인해 고민하며 사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약속 하나만으로
우리는 이 땅에서부터 행복해 하고 소망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날에 어떤 사람들이 될 것인가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태복음25장에 의하면
마지막 때에 주님이 천사들과 함께 오시고 영광의 보좌에 앉으십니다(마25:31).
모든 사람들이 주님 앞에 설 것입니다(마25:32). 그런데
구분이 있습니다. 오른쪽과 왼쪽, 양과 염소(마25:33), 그리고 영생과 영벌이(마25:46) 있습니다. 믿지
않는 자에게는 심판과 사망이 선포됩니다(마25:41, 46). 하지만
성도에게는 심판이 없고 그 심판에 따른 사망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성도는 이 믿음 때문에 땅에서부터 이미 천국을 이루며 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남들보다 덜 가져도 행복합니다. 나도 부족하지만 나보다 더 없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여유가 생깁니다. 미워하고 원수처럼 여기는 자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도 나와 같이 영생에 들어가야 할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결국 우리는 약속하신 모든 것들을 이미 믿고 살기에 기쁘고 행복합니다. 주님이 한 병자를 치유할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마 8:13). 성도는 믿은 대로 이루실 것을 바라보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순간에도 우리가 믿은 대로 이루어 주실 것을 믿는 이 땅의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