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4): 확증함
히 6: 4-12
오늘은 십자가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정말로 내가 구원받은 사람인지를 어떻게 확증할 수 있는가를 나누고자 합니다. 다르게 말하면 내 믿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인지를 점검해 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나의 구원이 하나님 앞에 설 때 문제가 없는지 도전받는 시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먼저 본문을 살펴 보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6절에서 배교가 일어나고 구원을 잃어버리는 일이 일어납니다. 문제는 그런 일이 발생하는 사람들이 4-5절에서 언급된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과연 믿음의 사람인지 아닌지 확인이 우선 필요할 것 같습니다.
4절을 보면 “한번 비췸을 얻고”라는 의미는 복음을 듣고 깨닫고 지식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이들은 또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어”성령도 받고 그 은사들을 체험한 경험도 있습니다. 이들은 또한 5절에서는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믿고 죄 용서함과 그들을 의롭다고 선포하는 내용과 하나님의 자녀 되는 복을 누린 사람임을 말합니다. 그리고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라는 의미는 죽음 이후에 복음이 가르치는 심판과 부활과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생 등을 깨닫고 믿은 자들을 언급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6절에서 ‘타락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타락은 배교를 말합니다. 이런 행위는 십자가의 죽음을 헛되이 만드는 것이며 다시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라 말합니다. 더 나아가서 배교한 자들에게는다시 회개할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본문은 난해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구절들은 믿음을 가진 자들이 과연 타락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믿음을 가졌던 자들이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면 과연 우리가 가진 믿음은 확실한가? 이런 의문에 휩싸이게 만듭니다. 더 나아가 지금 내가 비록 믿음을 가졌다고 하지만 나중 배교할 수 있다는 불안을 줍니다. 그리고 내 믿음이 구원에 이를 것이라는 확증을 어떻게 가질 수 있겠느냐는 의문을 줍니다.
오늘 본문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그러나 크게 구분하면 두 가지입니다. 한 해석은 믿음을 가진 자도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해석은, 성도의 구원은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고 확실하다는 반대 주장입니다. 우리는 어는 것이 맞느냐 틀리느냐에 시간을 많이 할애하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둘 다 장 단점이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히려 맞다 틀리다 보다는 서로가 지적하는 경고를 받아들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하는 이유는 두 가지 해석이 둘 다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너무나 필요한 부분들을 서로 보완 해주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해석은 기본적으로 오늘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려는 태도를 갖고 있습니다. 믿음을가진 자일지라도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근거는 신앙 경험에서 나옵니다. 초기 기독교는 많은 순교자가 있는 반면 배교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비록 믿음을 가진 자라 할지라도 실제 삶에서 배교자들이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해 줍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증거입니다.
지난 주 “십자가의 요구함”이란 설교에서 예수 믿고 주님을 따를 때 반드시 믿음의 공개적인 시인을 요구한다는 것을 말씀 드렸습니다. 비록 장차 일어날 일이지만 종말의 때에 많은 믿는 자들의 배교에 대해서도 성경은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디모데에게보내는 편지에서 바울은 그런 증거들을 우리들에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딤전 1:18-20절을보면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 명하노니,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함이라.” 여기서 언급되는 두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분명히‘믿음이 파선했다’는 말은 믿음을 가진 자라는 것을 뜻합니다. 딤전 4:1절에도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믿음을 지키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주님도 마태복음 13장에서 씨 뿌리는 비유에서 보여줍니다. 돌밭에 떨어진 씨처럼 복음을 받아들여 믿음 생활을 시작했지만 곧 자신에게 닥치는 시험과 핍박에 좌절해 버리고마는 신앙도 있다는 것입니다(마13: 20-21).
이런 성경 말씀을 갖고 첫 번째 해석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보완하지만 역시 한계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믿음을 파선한 자들’ 그리고 실제 ‘배교한자들’이 과연 진정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었는가를 확인해야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그러나 그 확인은 우리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은 믿음의 고백으로(로 10:9-10) 시작 되지만 그것으로 끝 나는 것이 아닙니다. 지속되어야 하고 고난을 인내로 이겨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늘 깨어있어 자신이 넘어질 수 있음을 알고 조심하고 겸손함으로 주 앞에 나가는 신앙인이 되어야함을 깨닫게 해 줍니다.
다음으로, 두 번째 주장이 있습니다. 이들에 의하면 오늘 본문은 초대교회 당시 많은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라고 합니다. 박해로 인해 유대 크리스천 개종자들이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시점에서 그들에게 준 경고에 불과한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러므로 실제 상황에서는 배교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그 이유는 9절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 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이같이 말하나”라는 것은 앞 절에서 배교에 대해서 사실 말했지만 그것은 경고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로 이어가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 속에 배교가 아닌 오히려 칭찬받을 신앙의 열매들이 있음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성경 전체는 여러 곳에서 구원의 확증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10:28을 보면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오늘 본문과 매우 상반되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성도의 견인’이라는 중요한 신학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성도는 결코 버림을 당하지 않는다는 구원에 대한 확증을 말해 주는것입니니다.
특히 로8:33-39절,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누가 정죄하리요…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 말씀은 이 세상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구원에서 떼어낼 수 없다는 확신을 줍니다.
이런 근거를 통해 본문 4-6절은 실제 배교가 일어난 것이 아니라 단지 경고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진실된 믿음을 가진 자들은 결코 타락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주고 있습니다. 이들의 믿음 밑바닥에는 ‘만약 누군가가 배교한다면 그들의 믿음은 처음부터 거듭나지 않는 자들’이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의 믿음에 대해서는 우리가 판단할 영역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누군가의 믿음에 대해 ‘당신은 구원에 이를 믿음이고 당신은 배교할 분이군요’ 라고 단정지을 분 있으십니까? 아무도 할 수도 없고 또 그렇게 해서도 안됩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오직 하나님만이 판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두 번째 주장에서 배울 것이 있습니다. 믿음 생활을 해 나갈 때 만나게 될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은 더 강하게 우리를 붙들고 나아간다는 확고한 믿음을 갖게 합니다. 그리고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내가 예수를 믿을 때부터 처음부터 확고히 가져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두 가지 해석들이 지적하는 경고를 다 신앙생활에서 취해야 합니다.
하지만 두 해석 다 시원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가진 믿음이 구원을 확증하는 믿음인지 알수 있느냐에 대한 답을 안 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누구나 다 소유하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내 믿음이 확실히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실제 상황에서 배교가 일어난다면 나의 구원을 어떻게 확증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답은 다른 곳에 있지 않습니다. 계 3: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사데’ 교회에 대하여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고 경고하십니다. 성도들의 착각이 하나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이 자신은 구원 받았다는 확증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입술로 주님을 고백했기에 ‘구원받을 거야’ 라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조차 없다면 정말 곤란하겠지요.
그러나 내가 구원 받았는지의 확증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임을 증명할 수 있는 삶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구원의 조건과는 다른 것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삶이 없을 때 주님은 죽은 삶을 산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구원 받았다는 것을 나의 삶이 확증해 주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계3:2절에서 지적됩니다.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우리는 말씀 앞에 서야만 내 구원을 확증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 믿고 바뀐 것이 있는지요? 예수 믿고 변화된 삶을 사는 도전이 내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고 계십니까? 기도해야 되는 것 알지만 올 수는 없고,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말씀 정말 행하고 있습니까? 조금만 나와 다른이야기해도 서로 용납하지 못하는 우리들 아닙니까? 좁은 길 택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사람들이 다하는데요. 다른 교회도 그렇게 하는데요.” 내가 원하는 것을 정당화 시키는 우리의 신앙생활이 아닙니까? 이런 신앙의 모습이 고정화 되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말씀대로 지금 산다면 우리는 마지막까지도 말씀대로 살게됩니다. 우리를 배교케하는 미혹과 고난의 위협속에도 흔들림없이 그대로 주님 말씀대로 살게 될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졌는지는, 내가 지금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사느냐가 확증해 주는 것입니다. 입으로만 주님을 고백하고 삶으로는 전혀 말씀대로 사는 삶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의 구원을 확증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그런 삶은 나중에도 그런 삶으로 이어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릅니다. 맞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완성이 아니라 과정으로 들어가는 출발이 되는 장소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구원 받은 자라는 확증은 내가 지금 구원 받은 자의 삶을 살고 있느냐가 나타내 줍니다. 예수 믿고 하루가 되어도 주 안에서 변한 것이 있다면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을 믿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에 예수 향기가 없다면 심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불안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내일이 또 주어지는 것입니다. 기회의 날입니다. 말씀대로 한번 그렇게 살아보라고 주시는 은혜의 날입니다. 덤으로 주는 이유는 도전해 보라는 도전의 날입니다. 그리고 나의 구원을 확증해 보라는 마지막 기회의 날입니다.
이번 주는 고난주간입니다. 성도님 모두가 다시 한번 나의 삶을 말씀에 비추어 도전해 보시고 나의 구원을 확증해 보는 놀라운 은혜의 한 주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