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7): 사람을 부르십니다 

 마4:17-22


 

오늘 말씀은 주님이 제자들을 부르시는 모습입니다. 모두 함께 따라 하시겠습니다. “주님은 사람을 부르십니다.”


첫째로 생각해 볼 것은 주님은 왜 사람들을 부르실까요? 그 이유는 주님이 이 땅에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함께 하기 위해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주님이 가장 먼저 하셨던 일은 17절을 보면 전파하는 일이었습니다(개역개정). 새번역은 선포, 현대인의 성경, 공동번역과 쉬운 성경은 모두 전도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를 원어로 보면 두 동사가 사용됩니다. κηρύσσω(케루소, 선포하다, proclaim)λέγω(레고, 말하다, speak, say)가 사용됩니다. 결국 선포하는 것은 전도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선포하였는가? 라는 질문이 중요합니다. 선포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것입니다. 이 문장 역시 원어를 직역하면 회개하라 왜냐하면(γάρ가르, because천국이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로 번역됩니다.

 

천국(the kingdom of heaven)은 땅이 아닌 하늘의 개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가까이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하늘에 있어야 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어떻게 존재할 수 있습니까? 주님이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 임하고 가까이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는 당시 유대인의 비친 로마제국처럼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시민권을 얻고 백성이 되는 그런 나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 사는 인간이 주님을 영접하는 순간 우리에게 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누가복음 17: 20-21절에서 하나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속에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순간부터 그분이 나의 주인이 되어 다스림을 받게 됩니다. 그때부터 그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들이 한 인간의 영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변화이기에 하나님의 나라는 내 속에 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개념은 죽어서 가는 곳도 되지만 지금 성도가 이 땅에서 누리는 복된 삶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고백한 성도가 이 땅에 살면서 천국에 산다는 것을 못 믿고 느끼지 못하면 그것은 거듭나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못한 사람들이 있다면 지금 있는 자리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돌아서다라는 말이 바로 회개라는 히브리어 단어와 동일합니다. 주님은 우리들을 부르셔서 천국 가는 방향과 다르게 가고 있는 사람들을 부르기 원하십니다(소명). 하나님 나라를 향해 돌아서라고 외치는 일을(전도) 담당시키기 위해 우리를 부르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어디서 사람들을 부르셨습니까? 18절을 보시면 갈릴리 호수입니다. 네 사람 모두 어부들이었습니다. 볼 것 없고, 자랑할 것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네 명 모두 그물을 던지거나, 손질하고 있었습니다. 열심히 삶의 현장에서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일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편하고 시간들이 많은 사람들을 불러 주의 일 맡기면 될텐데 왜 하필이면 바쁜 사람들을 부르실까요? 아마 그들이 가진 좋은 자질을 보셨는지도 모릅니다.

 

어부들은 일단 극한 환경에 견디어 내는 인내심이 강합니다. 고기가 잡히지 않는 날도 있지만 쉽게 실망하지 않고 또 다음 날 도전하는 정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험한 파도와 싸우는 용기를 가진 자들입니다. 게다가 형제들이 언급되는 이유는 고기를 잡는 일이 사람들의 도움이 있어야 가능한 일임을 시사합니다. 한 사람은 그물을 던지거나 끌어올릴 때 다른 한 사람은 노를 저어 방향을 잡아 주어야 합니다. 이런 어부들의 협력하는 모습이 주님의 지상 사역을 수행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객관적으로 살펴본다면 주님의 계획을 이루는데 효과적이지는 못합니다. 개인적인 인격의 문제도 있는 자가 있었습니다. 지식과 세상 경험이 너무 없었습니다. 물고기를 잡는 일은 전문가로서 손색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23절에서 언급되는 주님이 하셨던 회당에서 가르치고, 천국복음을 전파하고, 약한 사람들을 고치는 일을 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사람들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택하시고 부르셨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왜냐하면 주 안에서는 거칠고 험한 성격도 다듬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서 불가능은 없습니다. 부족한 것은 채우십니다. 약한 것은 강하게 하십니다. 구부러진 것은 펴서 사용합니다. 모난 것은 두드려 부드럽게 만들어 사용하십니다.

 

이 어부들이 불림을 받은 것은 그들이 가진 좋은 성품들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은 평범한 사람들을 불러 주의 일꾼으로 만드시는 방법을 보여주기 위함일 뿐입니다. 주님은 자신들의 일을 열심으로 하고 있는 그들을 세상 속에서 찾아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일을 맡기려고 하십니다. 하지만 부족하고 연약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부르십니다. 함께 하시면서 가르치십니다. 주님을 알게 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르게 변화시켜 나가셨습니다. 주님이 옳으셨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주의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기까지 배우는 자로 따르게 됩니다. 스스로 홀로 서기가 가능했을 때 그들을 사도로 땅끝까지 보내십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주의 사역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분들입니다. 여러분의 재능이 사용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정말 빙산의 일각입니다. 주님이 채우고, 더하셔서 완성된 여러분을 주님이 사용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불림을 받았을 때 우리는 너무 초라한 모습에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주의 손에 의해 지금 우리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잘나서 나 되었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교만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나를 나 되게 만드신 위대한 분이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어떻게 주님은 사람들을 부르십니까? 18-19절을 보면 3가지 동사로 그 과정을 소개합니다. 주님이 갈릴리 호수를 거닙니다. 사람들을 보십니다. 그리고 부르십니다. 배회가 아니라 의도를 가지고 찾아 다니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유심히 살피고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합한 자들을 부르셨던 것입니다. 너무 쉽고 간단하게 이루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오늘 본문은 네 명의 제자들만 부르신 것만 기록합니다. 그리고 나중 마 9:9절에서 마태를 부르시고 그 뒤에 다시 마10:2절에서 12명을 다 부르시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러므로 한번에 모두를 부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복음서 전체를 볼 때 오늘 이 네 명 조차도 시간을 두고 점차적으로 여러 번 불렀음을 보여줍니다.

 

먼저 요한복음1:35-42절을 보기 바랍니다. 원래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와 (요한?) 두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세례 요한의 증거를 듣게 됩니다. 그 뒤 두 사람은 주님을 따라가 보다 와 보라는 음성을 듣고 주님이 사시는 곳에서 하루 동안 교제를 나눕니다(39). 그 시간을 통해 두 사람이 주님이 메시야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안드레는 그의 형제 베드로를 찾아 주님께로 데려오게 됩니다(42). 아마 이때 요한도 자신의 형제인 야고보를 전도했을 것입니다.

 

이 네 사람은 그때부터 세례 요한이 아닌 주님을 본격적으로 따라 다니게 됩니다. 그러나 아직은 자신들의 모든 것을 버리지 못하고 그냥 주님을 따라 다닌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일들이 있은 후 드디어 네 명의 사람들은 오늘 읽은 본문 마4:19 22절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고 기록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누가복음 5장에 한 번 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또 한번 더 뭔가 사건이 그들에게 있었다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누가복음 5:2절을 보면 두 배가 있습니다. 어부들이 조업을 마치고 그물을 씻고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주님은 베드로에게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라는(4) 말을 하십니다. 베드로는 그 말에 의지하여 그대로 했을 때 기적을 체험합니다(6). 이 기적을 체험한 제자들은 이제 확실히 자신의 직업과 소유와 가족까지도 버리고 주님을 따르게 됩니다(11).

 

주님은 온전히 주님을 따르기로 준비되었을 때가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몇 번이고 우리에게 다가와 부르고 계십니다. 주님은 갈릴리를 거니시며 한 사람 한 사람을 전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또 다른 사람을 전도하는 방식으로 제자들을 부릅니다. 우리는 이 주님의 방식을 그대로 우리의 전도에도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4월 달 전도의 액션은 바로 내가 마음에 품고 기도하고 계시는 분들에게 직접 이제는 교회에 와 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하신 것 같이 하루 날을 잡아 식사 교제를 하시기 바랍니다. 아무 반응이 없을 지라도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속 하기 바랍니다. 주님도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20, 22절을 보면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이것 때문에 걱정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고전 9:5절의 베드로를 보면 처음에 주님을 따르면서 버리고 간 그의 가족들과 함께 사역을 하는 모습을 봅니다. 뭔가 말이 안됩니다. 그렇다면 버린다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결국 버린다는 것은 전적으로 목회자가 되는 소명도 포함됩니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에게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집사가 되고 부서장이 되고 목장지기가 되는 것도 포함합니다. 더 중요한 의미는 주를 위해 살지 못한 내 삶의 태도를 바꾼다는 의미입니다. 직업을 버리고 목사로 선교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난 후부터는 같은 직장에서 일을 한다 할지라도 다른 삶의 목적과 태도를 갖고 같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좋은 집과 좋은 차를 타는 것을 위해 일하던 직업관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계속되는 일이고 같은 직장이지만 새로운 세계관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만나서 줄곧 따라 다니는 시간이 있었음을 이미 앞에서 보았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5장에서 기적을 체험하면서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전적으로 따르게 됩니다. 그물이 찢어질 듯 엄청난 물고기를 잡는 기적을 체험하는 순간 변화가 일어납니다. 내 가족의 생계만을 위해 고기 잡던 어부가 이제 남들에게도 나눌 수 있는 여유가 생기게 됩니다. 전에는 고기가 많이 잡히면 내 배에만 채웠습니다. 버릴지언정 다른 사람을 불러 그들의 배를 채우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면 남의 배를 빌려 수고비 지불하고 모두 내 것으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변했습니다. 애써도 얻지 못하는 친구들의 부족을 보고 그들도 불러 내 것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나누게 됩니다. 기쁨을 함께 합니다

 

이들이 이렇게 변한 이유는 그들이 따르는 분이 예사로운 분이 아님이 확인 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기적을 베푸는 분 때문에 이제 배부르게 편안하게 살 수 있겠구나에 대한 확신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이유는 자신을 변화시킨 주님의 능력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으로만 살아온 자신들이 이제 남들과 나누는 변화된 모습을 봅니다. ‘생선을 잡는 어부는 그저 나를 위해 살뿐입니다. 하지만 사람 낚는 어부는 남들을 살릴 수 있음을 발견한 것입니다. 자신들이 정말 가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전까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무슨 의미인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나누고 있는 행동을 보며 자신들을 그렇게 만들기 위해 부르신 주님을 신뢰할 수는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예수를 믿고 나를 변화시킨 주님의 능력을 발견하지 못하면 우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조금도 내 것을 내어 드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부르심에 결코 응답할 수 없습니다. 변하지 않은 체 주님을 졸졸 따라 다니며 나의 배부름을 채워주는 왕으로만 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치는 것을 멈추시기 바랍니다. 전적으로 이제 그분의 부름에 한번 응답해 보는 복된 성도님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