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신앙(1): 알아야 합니다
막 12: 18-25
부활 주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당연하지만 그렇지 못한 분들이 예나 지금이나 있습니다. 오늘은 꼭 부활을 알고 믿어야 하는 이유들을 본문에서 나누고자 합니다.
부활을 꼭 알아야 하는 첫째 이유는 우리 인생이 현세주의 자로만 이 땅에서 살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현세주의 자라고 해서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서 긍정적 삶의 자세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노력하는 열정적인 사람들입니다. 좌절하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 꿈을 이루어 내는 성취 지향적 특성을 가집니다. 최선을 다해 부를 축적하고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자들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삶의 태도를 가진 자들이 예수님 당시에는 사두개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너무 지나친 현세주의적 태도는 영적 세계에 대해 매우 무지하고 부정적 태도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마 22:23; 막 12:18; 눅20:27; 행 23:8절에 의하면 부활과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한다면 내세를 부인하고 오늘과 이곳만의 삶을 강조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예수님 당시 대제사장 계열과 귀족 층에 있던 자들로서 자신들의 정치적 지위와 물질적 부를 누리며 그것에 만족하며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들과는 달리 로마제국의 지배에도 여전히 그들의 지위는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안정을 보장 받고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 로마와 결탁하여 물질적 부도 축척하여 누리는 삶을 영위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이런 환경들은 그들로 하여금 내세에 대한 관심보다는 현세에 더 집중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가진 부와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혹시나 가진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르는 내세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멀어질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부활 신앙을 갖지 못할 때 우리 신앙생활도 자연스럽게 세상 중심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전부인양 살아서는 안됩니다. 아기가 어머니의 배에서 나오듯 모든 인생은 반드시 이곳을 지나 새로운 세상을 맞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알아야 하는 둘째 이유는 자신의 영적 무지로 주님을 괴롭히는 자리에 서지 않기 위함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이 대단히 어려운 질문에 답을 못할 경우 부활에 관한 자신들의 생각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계략이었습니다. 결국 이들의 태도는 나중 주님을 부인하고 죽이는 자리에 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영적 세계는 답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지식이나 경험으로 알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도 답을 찾지 못해 인류는 계속 연구 중입니다. 아마 주님이 올 때까지 연구실의 불은 켜져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조차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합니다. 이것이 부활을 믿지 못할 때 나타나는 하나님에 대한 세상의 반응입니다.
사두개인들은신명기 25장에서 언급된 ‘형사취수’ 법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왔습니다. 일곱 형제가 자식이 없어 형제들 모두가 큰 형수를 자신의 아내로 취했다면 이 여인은 과연 부활 시에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는 기막힌 질문입니다. 오늘날 사두개인들이 있다면 혹시 다른 질문들도 가능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죽어 부활할 때 언제 나이로 부활하게 됩니까? 아니면 사람이 죽어 매장을 하지 않고 죽은 시체를 불에 태워 화장할 경우 어떻게 됩니까? 또 불의의 사고로 신체 일부가 상하거나 상실한 사람들의 경우는 어떻게 되느냐? 뭐 이런 질문들이 다 포함됩니다. 어느 누구도 답을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답을 주지 못해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무지와 그들의 편협적인 사고를 안타까워하십니다. 부활에 대한 무지와 불신은 결국 주님을 괴롭히는 자리에 설 수 밖에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아직 부활에 관해 모르는 사람이라면 알기를 바라는 자리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호세아 선지자는(호 6:2-3) 이렇게 외칩니다. “여 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 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부활을 몰라서 주님을 괴롭히는 자로 살아가지 마시고 알고 믿어서 진리를 선포하는 복된 사람으로 서시기를 바랍니다.
부활에 대해 알아야 하는 셋째 이유는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오해하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 ‘오해’라는 단어를 공동, 새번역, 현대인의 성경은 ‘잘못된 생각’으로 번역합니다. 잘못된 생각은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과 삼일 후에 부활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사두개인들은 성전에서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모른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제사장의 역할은 두 가지입니다. 한 가지는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입니다.그리고 그들은 백성들을 가르치는 의무가 주어집니다. 그렇다면 가르치는 자가 모르고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참 안타까워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약 성경은 분명히 부활에 대해 가르치고 있느냐를 먼저 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부활’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활을 인정하지 않았을까요? 아닙니다. 부활의 믿음은 확실합니다. 이미 창 22장의 아브라함의 부활 믿음을 지난해 나누었습니다. 올해는 다른 성경 구절들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시 16:10에 “이는 내 영혼은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사 26:19절은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로다. 호 6:2에“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 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구약의 모세오경(창 22장), 선지서(사26장, 호 6장), 성문서(시16편) 모두다 부활에 관한 놀라운 고백들을 담고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못했지만 구약의 사람들 역시 죽음은 마지막이 아닌 새로운 삶의 출입문으로 믿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 줍니다. 부활을 보지 못한 자들도 부활 믿음을 가지고 살았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직접 본 증인들이 전해준 사실을 믿지 못한다면 무엇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경험한 것만 믿는다면 우리는 너무 어리석습니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세상도 한번 다 돌아보지 못한 우리들이 어찌 영적 세계를 다 경험하고 믿으려 하십니까? 영적 세계는 먼저 믿음으로 아는 것이고 나중 죽어 경험하는 곳입니다. 믿음 안에(예수 안에) 들어와야만 그 세상을 맛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부활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내세에 누릴 복이 너무 좋기 때문입니다. 살아서 소유하지 못하고 죽어서 갖게 되는 복은 의미 없는 것입니까? 아닙니다.살아서 갖는 것이 의미 있다면 죽어서 갖게 되는 것도 그만큼 아니 더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5절에서 내세에서 누리는 것들은 이 세상의 것과 다르다고 말합니다. 주님은 이것을 간단히 다시 살아날 때는 시집도 장가도 가지 않고, 마치 하늘의 천사와 같이 된다고 답합니다.
‘시집도 장가도 가지 않는다’는 의미는 생로병사와 인간의 욕망, 감정으로 지배 받는 이 세상과는전혀 다른 삶이 있음을 뜻합니다. 시집가고 장가가는 모습은 창세기에서 세상이 만들어지고 난 뒤 바로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기점으로 하여 인류는 죄를 범하고 범죄 함이 더해가는 모습이 창세기 4-11장을 통해 나타납니다.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다는 의미는 단지 인간의 생물적인 욕구와 종족 보존을 위한 삶이 아닌 다른 차원의 세상이 있다는 것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게 될 그런 다른 삶을 위해서 하나님은 반드시 인간을 천사와 같이 되게 하십니다. 고전 15:51절은 ”우리가...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되리니”라고 말합니다. 이 변화는 시공간에 제한을 받는 인간이 내세에서만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변하게 하시는 이유는 완전히 하나님을 이해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육체를 가진 사람들은 영으로 계신 하나님을 볼 수도 없습니다. 볼 수도 없으면서 어찌 온전히 이해하겠습니까? 이 땅에 살면서 그렇게 알고 싶어했고 만나고 싶어하던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하며 그때에는 보게 될 것입니다.
변화 시키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 인간의 완전한 죄성이 사라지게 만들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한 이유는 영으로 존재하시고 죄를 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천사는 영적존재지만 죄를 범함). 고전 15:54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시는 가장 최고의 복임을 알게 됩니다. 죄를 지어야 남보다 잘되고, 빠르고 이길 수 있는 세상에서 예수 믿고 죄 가운데 허덕이며 빠져 나오지 못했던 날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이 변화는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이 사라지고 죄에 대해 완전한 승리를 외치는 날입니다. 내가 죄를 지으려고 해도 죄를 지을 수 없는 존재, 오직 하나님의 뜻 만을 이루는 온전함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영광의 날인 것입니다.
현세 지향적 삶은 잠시 잠깐의 시간에 투자하는 삶이지만 부활의 신앙은 영원을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신앙입니다. 그 영원한 시간에서 죄로 몸부림치는 시간이 아니라, 죄를 짓지 않고도 내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내는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믿고 나아가는 부활절이 되시기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